[리뷰] '비와 당신의 이야기' 일상에서 찾은 나만의 기적

전형화 기자 / 입력 : 2021.04.2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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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이라고 좋은 날이 아니요, 비 오는 날이라고 나쁜 날이 아니다. 우산 장수에겐 비 오는 날이 좋겠지만, 매일 비가 내리면 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좋은 날은 다 다르기 마련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그 좋은 날을 기다리는 이야기다. 기다리다가 기적을 발견하는 이야기다.

영호는 오늘도 버겁다. 삼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딱히 꿈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학원에 가야하니 갈 뿐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려던 학원에서 같이 삼수하는 수진이 먼저 말을 건다. 어리버리한 게 마음에 든다며. 당당한 수진이 빛나 보이지만 그 뿐이다. 빛나는 별은 멀리서 보아야 예쁘니깐.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던 영호는 문득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소연이 떠오른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편지를 쓴다. 왜 썼는지는 모른다. 부칠까 말까도 고민했다. 아마 다른 하루가 필요했던 것 같다.

소연의 동생 소희가 언니에게 온 편지를 받는다. 아픈 언니를 돌보며 엄마와 함께 헌 책방을 운영하는 소희는, 그 편지가 반갑다. 기억이 없다는 언니를 대신해 답장을 보낸다. 아마 다른 하루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영호와 소희는 편지를 주고 받는다. 영호에게 그 편지는 다른 하루를 준다. 똑같은 하늘도 그 편지로 보면 다르다. 장국영이 죽던 날, 같이 하루를 보내면 그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라는 수진과는 또 다르다. 별과 비처럼 다르다.


소희도 그 편지가 반갑다. 반복되는 일상 외에 할 것이라곤 없던 소희에게, 꿈도 없지만 어쩌면 꿈이 사치일 수도 있는 그녀에게, 영호의 편지는 즐거움이다. 비록 거짓 즐거움이지만.

원래 둘은 묻지도 않고, 만나지도 않기로 했지만, 비오는 12월 31일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만다. 누군가에겐 눈이 아닌 비가 오는 12월31일이 나쁜 날이겠지만, 적어도 두 사람에겐 비 오는 12월31일은 설레며 기다리는 날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라고 서두를 연다. 마치 이 영화가 기다리면서 갖는 설렘, 죽을 때까지 품고 있을지 모르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같지만 좀 다르다. 조진모 감독은 일상에서 나만이 아는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고팠던 것 같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장국영. 그날은 누군가에겐 무척 슬픈 날이지만, 누군가에겐 설렛던 날일 것이다. 누군가는 그날 밤하늘에서 오로라를 봤을 것이며, 누군가는 그저 똑같은 하루였을 것이다. 누구나에게 같았지만 누군가에겐 특별한 순간들. 나만이 아는 기적과 만난 순간들. 그렇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그런 기적에 대한 영화다. 좋아하는 남자 아이에게 말을 건네며 먹었던 어묵의 맛, 천원보다는 값을 더 쳐주고 싶은 좋은 LP판을 만났을 때, 갑자기 친구와 바다를 보러갔다가 예쁜 조개를 발견한 순간, 오래된 책에서 좋은 문장을 찾았을 때. 나만이 아는 그런 기적들에 관한 이야기다.

꼭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지 않아도, 꼭 12월 31일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이미 겪었을, 어쩌면 겪었지만 몰랐을, 나만의 기적과 만나는 순간들이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는 가득하다. 그리하여 12월31일에 비가 내리는 건, 누군가에겐 기적이요, 누군가에겐 어쩔 줄 몰라 길 위에 서 있던 하루다. 그래도 그날 기다리던 비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또 다른 나만의 기적을 더 잘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다.

누구는 좋은 대학 나와서 세상 다 잘 아는 것처럼 살아도 알아채지 못할 기적, 누군가는 병원에 누워 손가락 하나만 움직일 수 있지만 만나게 되는 기적.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그 기적을 만나라고 권한다. 따뜻하게 스며들게 권한다. 꼭 북극에서 오로라를 보지 않아도 우산 아래에서 오로라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조진모 감독은 그렇게 일상의 작은 기적들을, 그 때는 몰랐을 기적들을, 쌓고 쌓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관객이 알아차리게 만든다. 참 좋다.

영호 역을 맡은 강하늘은 좋은 동무 같다.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비를 멍하니 같이 바라보고 싶은 동무. 그 빗소리를 같이 듣고 싶은 참 좋은 동무 같다. 조금은 더 큰 왼쪽 눈이 웃고 있어도 울고 있는 것 같은 순간이 좋다. 수진 역을 맡은 강소라가 발 없는 새 같다면, 소희 역의 천우희는 오래 된 책 속에서 찾은 좋은 문장 같다. 명징하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큰 사건들은 없다. 거창한 이야기도 없다. 그저 일상에서 만나는 기적들이 충실하다.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일상에서 나만의 기적과 만났던 사람들이라면,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강아지 이름 같을 것 같다.

4월 28일 개봉. 전체 관람가.

추신. 그 강아지 이름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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