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보기 드문 '대기만성', AL 이달의 투수 지올리토 스토리 [댄 김의 MLB 산책]

댄 김 재미저널리스트 / 입력 : 2019.06.0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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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지올리토. /AFPBBNews=뉴스1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큰 그릇은 완성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말로 흔히 큰 인물이 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오랜 세월을 통해 가치가 입증된 말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빨라지고 속도전이 된 현대사회에선 갈수록 쉽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말인 것도 같다.

스포츠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프로구단들은 당연히 ‘대기만성’보다는 ‘대기속성’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길게 보고 유망주를 뽑았다고 해도, 그 선수가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팀에서 가용전력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지 무한정 기다려 주지 않는다.


미국프로풋볼(NFL)이나 미국프로농구(NBA)의 경우 드래프트 상위지명선수는 당장 팀의 주전급이 될 것으로 기대되니 사실 ‘대기만성’이라는 표현은 발붙일 곳도 없다. 요즘은 NBA도 2부리그(D-리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D-리그를 통해 올라오는 선수가 NBA에서 롤-플레이어 레벨을 넘어 스타급으로 발돋움하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

NBA보다 선수 수명이 더 짧은 NFL은 말할 것도 없다. 스타 쿼터백 밑에서 후계자로 키우는 백업 쿼터백 같은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이상 2~3년을 기다려가며 선수를 양성하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대기만성이라는 표현이 적용될 만한 사례가 가끔 나오는 곳이 바로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다. 메이저리그는 드래프트에서 뽑힌 뒤 오랜 시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다가 20대 중반 이후, 심지어는 30대에 빅리그에 올라와 뒤늦게 꽃을 피우는 일이 있을 수 있는 리그다.


하지만 이제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그런 사례는 갈수록 보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 구단들은 드래프트 1~2라운드에서 뽑은 톱 유망주들의 경우 길어야 2~3년 안에 빅리거로서 성패를 결정하려 하고 있다.

요즘 메이저리그에서 핫하게 뜨는 유망주들 가운데 20대 초반은 물론 아예 10대 앳된 얼굴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후안 소토, 로널드 아쿠냐 주니어, 애런 저지, 코디 벨린저, 워커 뷸러 등은 데뷔와 거의 동시에 리그 톱스타급으로 부상했다.

진짜 특급 유망주라면 과거처럼 루키리그에서 시작, 싱글A-더블A-트리플A를 차례로 거치는 성장코스를 차근차근 밟아가는 대신 뜸들이지 않고 기회만 되면 바로 빅리그로 불러올리는 것이 요즘 추세다. 물론 소수 특급 유망주들 이야기로,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커리어 마이너리거의 길을 걸으며 기회를 노려야 하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직도 지명된 뒤 5년 이상이 지난 선수들 가운데 뒤늦게 꽃을 피우는 경우들이 있다. 이번 시즌 초반 돌풍의 주인공으로 떠올랐으나 현재는 부상자명단에 있는 타일러 글라스나우(탬파베이)는 2011년 드래프트 지명선수이고 4일(한국시간) 류현진(LA 다저스)이 내셔널리그 ‘5월의 투수’로 선정될 때 아메리칸리그(AL) '5월의 투수‘로 뽑힌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우완투수 루카스 지올리토(25)는 그 이듬해 드래프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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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지올리토(오른쪽). /AFPBBNews=뉴스1
지올리토는 지난 2012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6번으로 워싱턴 내셔널스에 지명됐다. 전체 16번 지명이라면 상당한 유망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지명된 뒤 6년 만인 지난해부터 빅리그에서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다음 달에 만 25세 생일을 맞는, 아직 젊은 나이라 사실 ‘대기만성형’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하지만 그래도 요즘 세상에서 만성형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그의 스토리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지난해 평균자책점 6.13으로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 중 메이저리그 꼴찌였다는 사실이다. 또 90개의 볼넷은 AL 1위이자 메이저리그 전체에선 2위였다. 지난해 10승13패로 두자릿수 승리를 따냈지만 그의 위치는 팀에서 선발진에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 그가 지난 5월 한 달간은 6경기에서 5승무패, 평균자책점 1.74를 기록하며 AL 이달의 투수로 뽑혔다. 화이트삭스 투수가 AL 이달의 투수상을 받은 것은 보스턴으로 떠나간 전 에이스 크리스 세일이 지난 2015년 6월 수상한 이후 4년 만이다.

지올리토의 시즌 성적은 8승1패, 평균자책점 2.54로 팀의 에이스는 물론 올스타급 피칭을 하고 있다. 지난해 가장 큰 문제였던 제구력이 올해 훨씬 좋아진 데다 지난해 평균 91~92마일 정도였던 빠른 볼 구속을 93~94마일대로 끌어올렸다. 또 위력적인 체인지업과 슬라이더의 비중을 높이고 대신 많이 맞았던 구종인 커브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완전히 다른 투수로 변모했다.

지난달 24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원정경기에서 삼진 9개를 뽑아내며 4피안타 완봉승을 거둔 퍼포먼스는 그를 한 단계 높은 에이스급으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올리토는 “난 항상 내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다”면서 “올해가 지난해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다. 난 통계 수치엔 별 관심이 없고 그냥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올해 내 목표는 볼넷을 줄이는 것이었고 어떤 타자이든 두려워하지 말고 공격적인 투구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올해 67⅓.1이닝동안 삼진 78개를 잡고 볼넷은 20개만 내줘 삼진/볼넷 비율 3.90으로 ML 전체 31위에 올라 있다. 이 부문 1위는 류현진(13.80)이다.

리그 하위권이던 선발투수가 1년 만에 갑자기 최상위권 에이스로 변신한 것은 쉽게 보기 힘든 케이스여서 지올리토의 상승세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제 겨우 25세가 되는 그의 나이와 정신적 성숙함, 그리고 뛰어난 체격조건(198cm·111kg)을 감안하면 화이트삭스가 드디어 떠나간 세일의 뒤를 이을 에이스를 얻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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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벅스턴. /AFPBBNews=뉴스1
또 다른 대기만성형 케이스로는 현재 메이저리그 승률 1위를 달리는 돌풍의 팀 미네소타 트윈스의 중견수 바이런 벅스턴(25)이 있다. 벅스턴은 지올리토와 같은 2012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번으로 지명된 초특급 유망주 출신이다. 그해 전체 1번 지명선수인 카를로스 코레아(휴스턴)와 함께 거의 100%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재목으로 꼽혔던 선수다. 마이너 시절 두 차례나 전체 1위 유망주로 꼽혔고 한 번은 2위에 랭크됐을 정도로 호타준족 외야수의 상징적 선수였다.

하지만 코레아가 기대만큼 쑥쑥 성장해 3년 만인 2015년 빅리그에 데뷔, 그해 AL 신인왕에 오르고 2017년엔 올스타, 2018년엔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된 것과 달리 벅스턴은 코레아와 같은 2015년 빅리그에 데뷔했어도 부상과 부진에 발목을 잡히며 좀처럼 치고 나오지 못했다. 빅리그에서 4년째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지난해는 불과 28경기에 나서 타율 0.156에 그치면서 그의 엄청났던 잠재력이 그대로 낭비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부활을 알리고 있다. 최근 벅스턴의 중견수 수비 하이라이트를 보면 그가 왜 마이너리그 시절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됐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미네소타가 벅스턴을 뽑았을 때 기대했던 모습이 7년 만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미네소타가 올해 메이저리그 승률 1위를 달리는 돌풍의 팀으로 떠오른 데는 벅스턴의 부활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네소타에 아직 ‘대기만성’은 아니더라도 ‘better late than never(아예 안 오는 것보다는 늦게 오는 게 낫다)'라는 안도감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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