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태일이'인가..'기생충' 속의 '태일이'들을 위해 [문바세]

[문화콘텐츠가 바꾸는 세상]-③영화가 바꾸는 세상(③-3)

전형화 기자 / 입력 : 2022.09.08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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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 '태일이' 포스터
문화 콘텐츠가 지닌 파급력과 중요성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때로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2020년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 가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였다. 한국 사회 부의 양극화를 꼬집은 영화 속 반지하는 저소득층 주거 환경을 상징하는 공간적 배경이 됐다. 정부는 당시 '기생충' 흥행을 계기로 주거 복지를 위한 반지하 가구에 대한 전수조사를 계획했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진 지난 8월 침수 피해로 서울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 3명이 사망했다. 현실 속 반지하는 더 참혹하고 참담했다.

올해 큰 화제를 모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했다. 자폐 스펙트럼을 지닌 천재 변호사 우영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따뜻하게 그려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영우 같은 능력을 지닌 자폐인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현실과 괴리감이 크다는 한계점도 드러냈다.


콘텐츠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시대의 흐름은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 스타뉴스는 창간 18주년을 맞아 세상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거나 받아들인 콘텐츠에 대해 짚어보고, 콘텐츠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아가 K-팝, K-드라마, K-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사회 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을 찾아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해본다.






'태일이'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쉬어도 되는 데 쉴 수 없을 때, 다시 '태일이'를 생각한다.

'태일이'(감독 홍준표)는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고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1995년에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담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세상에 선을 보였고, 전태일 열사가 2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51년이 지난 2021년 12월 '태일이'가 다시 관객과 만났다.

수돗물로 배고픔을 달래고, 풀빵 하나에 웃고 울었던 가난한 시절. 하루하루 돈 벌려 애쓰는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보상도 대접도 못 받던 시절. 그때도 노동자의 삶에 최소한 지켜져야 할 것들은 지켜져야 한다는 근로기준법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는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외쳤던 게 아니다. 지키라고 있는 법을 제대로 지켜달라고 외쳤다.

'태일이'는 그런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담았다. 거창하고 숭고한 위인전은 아니다. 인간 전태일의 삶을 담담히 담았다. 22살 청년 전태일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특별한 기교 없이, 극적인 각색 없이, 묵묵히 따라간다. 이 묵묵함이 좋다. 이 묵묵함이 전태일을 암울한 새벽을 깨운 초인이 아니라, 박제된 위인전 속의 영웅이 아니라, 그저 주위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평범한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애니메이션이라 이 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실사였다면 몰입감도, 어쩌면 거부감도 더 컸을 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충격을 줬다면, '태일이'는 부드럽게 다가간다. 배운 적도, 공부한 적도, 알려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스스로가 노동자라는 걸 서서히 자각하게 만든다. '태일이'는 관객 스스로가 태일이라는 걸 슬며시 전한다. 강요하지 않는다. 담담히 전한다.

여전히 세상에는 '태일이'로 가득하다. 24살 청년 김용균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을 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게 불과 4년전이다.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홀로 고치다 숨진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 김군은 19살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물류를 책임 진 플랫폼 노동자들은 노동자라는 지위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노동은 특정 정치세력의 전유물이 아니다. 거창한 게 아니다. 밥벌이다. 안전한 밥벌이, 건강한 밥벌이가 지켜지는 게 건강한 사회다. '태일이'는 이 단순한 진리를 담담히 전한다. 선동하지 않는다. 그저 태일이들이 태일이라는 걸 깨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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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일이'를 제작한 명필름 심재명 대표/사진제공=명필름
"우리의 오늘이 거저 얻어진 게 아니잖아요."

심재명 명필름 대표가 '마당을 나온 암탉'에 이어 두 번째 장편 상업 애니메이션으로 '태일이'를 선택한 이유다. 명필름은 '공동경비구역 JSA' '접속'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건축학개론' 등을 제작한 한국영화 제작 명가다. 그런 명필름은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을 선보여 한국 애니메이션 역대 최다 관객인 220만명을 동원했다. 꼭 10년이 지나 두 번째 애니메이션으로 '태일이'를 선택한 건, 여전한 태일이들의 삶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은 감독님(명필름 공동대표이자 심재명 대표의 남편)이 먼저 제안했다. 이은 감독님은 장산곶매 시절부터 전태일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런데 당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에 그 기획을 묻어뒀다. 그러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하고 난 뒤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실사영화로 만들면 돈도 많이 들 뿐더러 이 이야기를 전세대를 대상으로 하기에는 애니메이션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했다."

심재명 대표는 "명필름 DNA에 그런 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은 감독이 장산곶매 시절 '파업전야'를 만들었고, 심재명 대표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린 '카트'를 제작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심재명 대표는 "'태일이'를 관객이 위인전 속 위인이 아니라, 나랑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이웃이요, 옆 집 오빠요, 형이요, 동생으로 그리고 싶었다. 보통의 청년이요, 청소년이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태일이' 초반부에 담긴, 전태일의 어린 시절을, 심 대표가 특별히 더 좋아하는 이유다.

심재명 대표는 "'태일이'는 코로나 상황에서 아쉬운 흥행 성적을 거뒀지만, 그래도 제작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면서 "공동체 상영, 학교 상영 등으로 청소년들이 책에서 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본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걸 직접 들었다. 정말 감사하더라"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를 비롯해 우리의 오늘이 거져 얻어진 게 아니잖아요. 청년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등 여전히 전태일의 삶은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태일이' 정신은 풀빵 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살면서 행복하게 같이 사는 것. 여전한 태일이들이 '태일이'를 보면서 의미와 재미를 느꼈으면 해요."





영화 '기생충' 등장인물들 중 가장 많은 직업군은 노동자다. 반지하에 사는 노동자다. 더 지하에 숨어살던 노동자는, 반지하에 살던 노동자에 밀려난다. 그리고 반지하에 살던 노동자는 더 지하로 내려간다. '기생충'에 '태일이'가 숨겨져있다. 그 숨김을 '태일이'로 찾을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일테다.

영화는 세상을 반영한다. 세상에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을 파악하든,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든, 그건 관객의 몫이다. 그 몫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건 영화의 몫이다. 좋은 질문과 좋은 답, 영화와 관객의 관계다.

전형화 기자 aoi@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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