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대표팀 지휘한 우크라 축구전설, '애국심' 재조명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2.03.0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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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로바노프스키 전 감독. /사진=디나모 키이우 구단 홈페이지 캡처
러시아 무력 침공에 맞서 변변한 무기도 없이 지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결사항전은 눈물겹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4)는 결연한 의지로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우크라이나어 표기)를 지키며 국민들의 항전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국제사회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여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있다. 해외에 있는 우크라이나인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입영 신청을 하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 전설적 축구 감독이 우크라이나 애국심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올랐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지난 2일(한국시간)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대부분 우크라이나 선수들로 구성된 구 소련 대표팀을 이끌었던 발레리 로바노프스키(1939~2002) 감독을 재조명했다.


로바노프스키 감독은 당시 구 소련 대표팀으로 대회에 출전했던 우크라이나 선수들에게 "우리는 러시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를 대표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구 소련은 1986년 월드컵 16강전에서 벨기에에 3-4로 패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크라이나 출신 로바노프스키 감독이 지휘하고 주축 선수가 모두 우크라이나 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구 소련 시절부터 국제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를 다수 배출한 우크라이나에서 축구의 전통을 확립한 감독은 로바노프스키였다. 그는 선수와 감독으로 우크라이나 축구의 자존심인 디나모 키이우의 역사를 만들었다. 그래서 디나모 키이우 홈구장의 이름은 로바노프스키 스타디움으로 명명됐으며 키이우 시 중심에는 발레리 로바노프스키 길이 있다.


로바노프스키 감독이 국제 축구 무대에 널리 알려지게 된 시기는 1975년이었다. 그는 이 해에 디나모 키이우를 컵위너스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디나모 키이우가 구 소련 축구 클럽으로는 최초로 유럽 클럽 대회 우승을 차지한 뒤 구 소련 축구의 중심은 우크라이나로 이동했다. 이후 로바노프스키 감독은 구 소련이 붕괴되는 시점까지 중요한 때마다 구 소련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디나모 키이우에서 스타 선수를 많이 배출시킨 로바노프스키 감독의 마지막 전성기는 1990년대 후반이었다. 1991년 구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는 독립했지만 디나모 키이우 축구는 극심한 침체기에 빠졌다. 실력 있는 선수들이 대거 독일 프로축구리그 등 서유럽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격으로 디나모 키이우는 UEFA(유럽축구연맹)로부터 징계까지 받았다. 심판을 매수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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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로바노프스키의 동상. /사진=디나모 키이우 구단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다시 디나모 키이우의 사령탑이 된 로바노프스키는 팀을 1998~1999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에 올려 놓았다. 당시 이 팀에는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45)와 공격형 미드필더 세르히 레브로프(47)가 대활약했다.

특히 셰브첸코는 우크라이나에서 당대 세계 최고 축구 스타였던 브라질의 호나우두(45)와 비견될 수 있는 선수로 추앙됐다. 팀 플레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로바노프스키 감독은 "셰브첸코는 골 감각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훈련에 임하는 자세가 다르다"고 칭찬했다.

로바노프스키는 축구 경기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꾼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이미 1970년대에 세밀한 데이터를 활용한 과학 축구를 주창했다. 무엇보다 축구 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포지션이 아니라 그가 경기 중에 서 있는 위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공격수와 수비수는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니라 경기 중 상황에 따라 이 역할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축구 철학이었다.

선수들의 패스 방향과 성공률 등을 매 경기 분석한 로바노프스키의 과학 축구는 1970년대에 다른 클럽이나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당시 구 소련 컴퓨터 산업의 중심지가 키이우였다는 점이 중요했다. 1957년 창설된 키이우의 컴퓨터 연구소는 자동화 시스템과 초기 인공 지능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1963년 이 연구소에 근대적 퍼스널 컴퓨터의 원형이 제작되기도 했다.

한때는 배관공이 되려고 있지만 축구 선수의 길을 선택했으며 열 공학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친숙해진 로바노프스키가 축구에 과학을 접목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상대 팀이 디나모 키이우의 축구 스타일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경기마다 전략과 전술을 바꿨고 여기에는 데이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절대로 과학만을 신봉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선수들의 희생정신과 협력이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데이터와 전략이 있다고 해도 경기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봤다.

전 세계가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에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는 이유에도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희생정신과 협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보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실리가 판을 치는 개인주의 시대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용기 있는 선택이 남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우크라이나 위기 극복을 위한 이들의 희생과 협력정신은 로바노프스키 축구를 관통하는 키워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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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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