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 감독'과 '차세대 에릭센'이 쓴 덴마크 동화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1.07.06 13:59 / 조회 : 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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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선수들이 지난 4일(한국시간) 유로 2020 체코와 8강전에서 승리한 뒤 기뻐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팀의 에이스 크리스티안 에릭센(29)이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조별리그 예선 탈락이 예상됐던 덴마크가 지난 4일(한국시간) 체코를 제압하고 유로 2020 4강에 진출했다.

덴마크의 4강 진출에는 심장 제세동기를 가슴에 품고 연습장을 찾아 동료들을 응원했던 에릭센의 축구 열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덴마크 동화에는 에릭센 스토리 말고도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우선 덴마크의 카스퍼 휼만트(49) 감독은 2020년 갑자기 대표팀 지휘봉을 잡게 된 대타 감독이었다. 전임 감독이었던 오게 하라이데 감독은 유로 2020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때문에 예정대로 열릴 수 없게 되자 대표팀에서 물러났고 휼만트 감독이 이를 이어 받았다.

이는 마치 1992년 유로 대회에서 덴마크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리카드 묄러 닐센 감독의 선임 과정을 연상시킨다. 1980년대 다이너마이트 같은 폭발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는 덴마크 팀을 이끈 셉 피온텍 감독은 1990년 대표팀을 떠났다. 덴마크 U21 팀을 지휘한 바 있고 성인 대표팀의 코치까지 역임했던 닐센은 감독 후보 1순위였다.

하지만 피온텍 감독의 성공신화에 길들여진 덴마크 축구협회는 외국인 감독을 택했다. 전임 감독으로 덴마크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끈 피온텍 감독이 폴란드 출신으로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덴마크 축구협회는 국내 감독을 선호하지 않았다.

덴마크 축구협회는 독일 감독인 호르스트 볼러스를 선임했지만 그의 소속 팀과 계약 문제로 덴마크 감독은 공석이 됐다. 이 때 덴마크 축구협회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닐센 감독에게 기회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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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축구대표팀의 카스퍼 휼만트 감독. /AFPBBNews=뉴스1
30년 전 닐센 감독과 비슷한 상황에서 덴마크를 지휘하게 된 휼만트 감독에 대해 덴마크 언론은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다. 실용성과 효율성을 내세운 전임 하라이데 감독과 달리 휼만트 감독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즐기는 축구'를 추구할 것이라는 게 그 주된 이유였다. 더욱이 유로 2020 대회 조별리그 1차전에서 에릭센마저 잃게 되면서 그에 대한 기대감은 사실상 사라졌다.

하지만 무려 9차례나 무릎 수술을 받고 26세에 현역에서 은퇴해 일찍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휼만트 감독은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수들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친밀해졌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팀의 어려운 상황을 스스로 극복하기 위한 시간을 줬다.

선수들이 잠시 축구를 잊고 재충전할 수 있게 해 준 자유의 시간은 덴마크 특유의 '휘게' 문화의 연장선상에 존재하는 부분이었다. 휘게는 아무리 바쁘고 어려운 순간에도 잠시 동안 일상에서 벗어나 소소한 휴식을 갖는 덴마크 문화다.

이번 유로 2020에서 대활약을 하고 있는 윙백 요아킴 맬레는 "휼만트 감독은 선수들과 소통에 능하다. 그는 많은 선수들에게 자유를 줬다. 그는 좋은 감독이기도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친구이기도 하다"고 말할 정도다. 이는 선수들에게 휼만트 감독이 얼마나 친근한 존재였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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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카스퍼 돌베리가 지난 6월 27일(한국시간) 웨일스와 유로 2020 16강전에서 골을 넣은 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악재와 불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로 2020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덴마크 축구 대표팀의 반전 드라마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선수는 카스퍼 돌베리(24)다. 그는 16강전과 8강전에서 연속 골을 넣으면서 덴마크 공격을 이끌고 있다.

한때 '차세대 에릭센'으로 각광 받으며 17세에 네덜란드 명문 클럽 아약스와 계약한 돌베리는 이후 성장이 멈췄다는 평가를 받았고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그에게 2020년은 최악의 해였다. 1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에서 두 번이나 감염됐으며 맹장염을 비롯한 각종 부상에 시달렸다. 또 작년 고가의 시계를 팀 동료에게 도난당했으며 심지어 포르쉐 자동차을 도난당하기도 했다.

에릭센 없는 덴마크를 이끌고 있는 '대타 감독' 휼만트와 불운을 털어버리고 인생역전에 성공한 돌베리는 유로 2020 덴마크 동화의 주인공이나 다름 없다.

이는 결핍은 성공을 위한 동기를 제공하고 불운은 행운을 얻기 위해 거치는 통과의례라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주는 안데르센 동화의 테마와 맥이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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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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