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국제고 첫승이 소환한 40년 전 고시엔 '김의명 열풍'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1.03.26 14:12 / 조회 : 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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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국제고 선수들이 지난 24일 고시엔 경기에서 교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뉴시스(일본 MBS 중계 캡처)
일본의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 국제고가 봄철 고시엔(선발고교야구대회)에서 1승을 거두면서 재일 한국인 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교토 국제고는 지난 24일 대회 1회전에서 시바타고를 5-4로 눌렀다.

외국계 학교로는 최초로 고시엔 대회에 진출했다는 사실 자체도 대단하지만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라는 가사가 담긴 교토 국제고의 교가가 승리 뒤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교토 국제고의 경기를 보기 위해 전세 버스를 타고 고시엔 경기장을 찾은 재일 한국인 1000여 명에게는 특히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재일 한국인 사회가 고시엔 대회를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느낀 사례는 전에도 있었다. 한국 혈통의 선수들이 이 대회에서 그만큼 좋은 활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재일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주류 스포츠인 야구는 기회의 무대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야구인으로서 성공의 등용문인 고시엔 대회 출전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한국 프로야구 개막 1년 전인 1981년 고시엔 대회 열풍이었다. 한국계 선수를 다수 포함하고 있던 효도쿠 학원(報德學園)이 같은 해 여름철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해서다.

효도쿠 학원의 에이스 투수이자 4번타자로 활약한 가네무라 요시아키(58·한국명 김의명)은 이 대회 전 경기에서 완투하며 평균자책점 1.15를 기록했다. 타자로서도 대활약했던 가네무라는 대회 타율 5할4푼5리(2홈런 4타점)를 기록하며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

효도쿠 학원에는 김의명 외에도 한국계 선수가 많았다. 타카하라(高原), 니시하라(西原), 오카베(岡部)는 모두 한국계 선수였다. 뿐만 아니라 효도쿠 학원과 결승에서 맞붙은 교토상업에도 한유, 정소상과 같은 한국계 선수가 활약해 1981년 고시엔은 재일동포 야구가 크게 빛을 발한 대회로 기록됐다.

당시 대회 전부터 자신이 한국인임을 당당하게 밝혔던 김의명은 “고시엔 대회 우승 이후 나는 재일동포 분들과 일본인들의 응원을 함께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인상적인 발언을 했다. 김의명의 발언은 이른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으로 불안정하고 팍팍한 삶을 살아가던 재일 한국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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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명(왼쪽)이 야구해설가 시절인 2012년 당시 오릭스 이승엽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OSEN
야구선수로서 김의명의 명성은 한국에도 전파됐다.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끈 에이스 겸 4번타자로 소개된 김의명은 같은 해 한국에서 열린 한일 고교야구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일본 고교야구계를 평정한 재일 한국인 스타로 평가 받았다.

당시 국내 스포츠 가운데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고교야구 인기와 김의명 효과에 힘입어 1981년 한일 고교야구 대회는 관심이 급상승했다. 한국은 고교야구 최고 스타였던 박노준, 김건우(이상 선린상고)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예상을 뒤엎고 일본 선발팀에 3연승을 기록했다. 김의명이 선발 투수로 등판했던 1차전에서 4-3 승리를 거두면서 자신감을 얻은 게 3연승의 기폭제가 됐다. 이 경기에서는 훗날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를 이끌게 되는 김정수(광주 진흥고)와 조계현(군산상고)이 일본 타선을 잘 막아냈다.

고시엔과 한일 고교대회의 열풍이 잠잠해졌던 12월 또 다른 소식이 야구 팬들의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재일동포 김의명과 김신부가 각각 일본 프로야구 긴테츠와 난카이에 1순위로 지명됐다는 뉴스였다.

김의명과 김신부는 오사카와 인접해 있는 효고현에 위치한 고교에서 활약했던 투수로 중학시절부터 라이벌이었다. 김신부는 비록 고시엔 대회에는 출전하지 못했지만 오버핸드 강속구 투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 프로 입단 뒤 부상 때문에 잠수함 투수로 전향했고 1986년 한국 프로야구 청보 핀토스와 계약을 맺었다. 한편 김의명은 고교시절 마운드에서 혹사당한 탓인지 타자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재일동포와 한국 야구 팬 가운데는 여전히 40년 전 고시엔 대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1981년은 재일동포 야구 팬들에게 김의명을 비롯한 한국계 선수들의 대활약에 잠시 동안 일본 사회에서 어깨를 펼 수 있었던 시간적 공간이었으며, 한국 야구 팬들에게는 일본 야구에서 한국인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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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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