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불안한 시대에 전하는 단순하고 깊은 질문

전형화 기자 / 입력 : 2021.01.20 10:51 / 조회 : 4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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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회사 취직했다. 열심히 일했다. 야근수당도 안 받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권고사직을 제안받았다.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여자라서, 지방대 출신이라서, 이것저것 생각해봐도 정말 모르겠다. 그냥 부조리하다. 버텼다. 벽을 바라보는 책상에 앉아 그냥 버텼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기회를 준다며, 자신이 회사인양 상사가 말한다. 하청업체에서 1년만 지내면 다시 복귀시켜주겠다고.

정은은 그렇게 지방의 하청업체로 파견을 나간다.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소장은 애들 농어촌 특별전형 받으려 위장전입 온 거냐며 성낸다. 공부 잘해서 원청으로 취직했으면 뭐하러 이런데 왔냐고 빨리 돌아가라고 성낸다. 3명뿐인 직원들은 정은 때문에 옷도 편히 갈아입지 못한다며 투덜댄다. 원청에서 파견 직원 임금도 하청업체에서 주라고 했기에 정은에 대한 반감은 더욱 커진다. 돈은 정해져 있고, 사람은 늘었으니, 누군가는 그만둬야 하는 탓이다.

하청업체의 일은 높디높은 송전탑에 올라 점검하는 것이다. 언제나 감전의 위험이 있고, 자칫 떨어지면 죽는 험한 일이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정은이 있을 자리는 없다. 정은은 송전탑을 오르고 싶지만, 높은 벽 같다. 한 발도 올리기 힘들다. 매일 소주팩 마시며 버티는 정은.


그런 정은이 막내는 이상하다. 막내는 별명이 막내다. 늦게 이 일을 배워서 막내다. 막내는 낮에는 송전탑에서 일하고,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끝나면 대리운전을 한다. 그렇게 번 돈을 아내 없이 키우는 세 딸을 위해 쓴다.

막내는 죽지 않으려 송전탑에 오른다. 정은은 해고되지 않으려 송전탑에 오르려 한다. 둘에게 어쩌면 이유는 같다. 둘 다 살기 위해 송전탑에 오른다. 막내는 정은의 그런 마음을 알게 되자 송전탑을 오르는 방법을 하나씩 알려준다. 그렇게 정은은 버티는 방법을 조금씩 동료에게 배우게 된다.

제목만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 있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도 그런 작품들 중 하나다. 이태겸 감독은 이 제목이 스스로에게 절실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영화를 만들고, 준비하던 두 번째 영화가 엎어졌다. 누군가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해고당했던 것 같았던 그 시기, 이태겸 감독은 한 신문기사를 봤다. 사무직 중년 여성이 현장직 하청업체에 파견돼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버티고 있다는 기사였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출발했다. 일이란 생계를 해결하는 직업인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업이다. 누군가가 해고해도, 누군가가 더이상 너는 네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라는 선언이다.

이 영화는 이 주제에 충실하다. 원청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탈을 쓴 악으로 단순화됐고, 하청업체 사람들은 구체적이다. 노사 갈등에 노노 갈등을 더해야 했기에 이런 도식으로 꾸린 듯하다. 비록 이런 구성이 전형적이긴 하지만 111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던 듯하다.

장소도 단순하고, 인물도 단순하고, 이야기는 전형적이다. 그럼에도 울림이 깊다. 단순하고 전형적이지만, 익숙하면서도 외면했던 이야기를 직시하게 만든 덕이다. 이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중간에 끄지 못하고,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서 직시해야 하는 이야기다. 그렇게 구성됐다.

정은의 뒤를 쫓던 카메라는, 어느새 정은의 시선이 되고, 막내와 같이 우리를 담는다. 그리곤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치 막내의 시선인양, 또는 정은이 관객을 바라보는양, 변한다. 이 시선의 변화야말로, 단조로운 이 영화를 깊게 만든다. 음악은 숨은 주인공 같다. 어쩔 때는 자기 목소리를 내고, 어떤 순간에는 숨는다.

정은을 맡은 유다인은 좋다. 절망하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끝을 알더라도 버티고 버틴다. 그 버팀을 얼굴과 눈과, 툭 내뱉는 말로 공감 하게 만든다. 이 배우의 깊음은 더욱 넓어질 것 같다.

막내를 연기한 오정세는, 훌륭하다. 묵묵히 성실히 최선을 다하고 살아도, 그 최선을 보답 받지 못해도, 그래도 선의를 갖고 사는 사람. 그렇다고 변명하지도,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는, 그러면서도 묵묵히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런 삶의 보답을 받았으면 하도록 응원하게 만든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다.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면, 보게 만든다. 묻게 만든다. 너는 너를 해고하지 않았으면 해, 그렇게 이야기한다. 이 불안한 시대에 전하는 단순하지만 깊은 질문이다.

1월 2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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