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종목이던 잉글랜드 축구와 럭비, 무엇이 둘의 운명을 갈랐나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0.11.02 16:00 / 조회 : 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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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많은 관중이 들어찬 가운데 잉글랜드 프로축구 브라이튼(녹색 유니폼)과 아스널의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AFPBBNews=뉴스1
한국인에게 다소 생소한 럭비 월드컵은 단일 스포츠 행사로는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 하계 올림픽 다음으로 많은 관중을 끌어 들이는 대표적인 스포츠 메가 이벤트다. 최근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2015년 영국 럭비 월드컵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5만 1621명으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경기당 평균 관중 수인 5만 3592명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 럭비를 즐기는 국가의 숫자가 축구에 비해 매우 적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괄목할 만한 부분이다. 럭비는 19세기 산업화 시대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영연방국가인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성행했다. 이어 프랑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등으로 확산했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에서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럭비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축구를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우선 축구에 비해 럭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국제적 전파의 범위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한적이었으며 축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경기규칙에 대한 이해가 힘들고 더 많은 장비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단점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잉글랜드에서 근대 스포츠가 태동하던 19세기 중반까지 경기규칙이라는 측면에서 럭비와 축구의 구별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이다. 럭비와 축구는 풋볼이라는 명칭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었으며 지역과 출신학교에 따라 그들의 경기규칙은 제각각이었다.

1848년 잉글랜드의 명문 퍼블릭 스쿨 출신 학생들이 캠브리지 대학에 진학했을 때 이들끼리 풋볼 경기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학교마다 규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경기에서 필드 플레이어가 손을 사용할 수 있느냐 라는 부분이 논란이 됐다. 캠브리지 대학생들은 이 시기에 학생들 간의 경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경기 규칙을 만들어야 했다. 이 규칙에는 손의 사용을 되도록 최소화한다는 규정이 공식적으로 제정됐다.


주로 이튼, 해로우, 윈체스터 스쿨 등 전통 명문 퍼블릭 스쿨에서는 손의 사용을 억제하는 형태의 경기를 선호했으며 럭비 스쿨을 주축으로 하는 신흥 명문 퍼블릭 스쿨에서는 이른바 현재 럭비에 남아 있는 규정처럼 손으로 공을 가지고 전진하는 규정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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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6개국 럭비 대회 잉글랜드(흰 유니폼)와 이탈리아의 경기 모습. /AFPBBNews=뉴스1
여전히 잉글랜드에서 현재의 럭비와 축구 규정이 혼용되고 있을 때였던 1863년 향후 두 종목의 운명을 가르게 될 회의가 소집됐다. 이 회의는 잉글랜드축구협회(FA)의 조직을 위해 17명의 관계자가 모여 축구 경기 규칙 제정을 목표로 진행됐다.

이 회의에서는 경기 중 손을 사용하는 ‘핸들링’의 문제뿐 아니라 정강이 부분을 가격해 상대를 넘어트리는 ‘해킹’에 대한 관계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6차례나 이어진 이 회의는 당시 잉글랜드 사회를 지배했던 계층이라고 볼 수 있는 전통 명문 퍼블릭 스쿨 출신 관계자와 잉글랜드 상류층으로 편입하려는 신흥 명문 퍼블릭 스쿨 출신 관계자들 간의 격전장이었다.

하지만 이 회의에 소집된 관계자들은 전통 명문 퍼블릭 스쿨 출신이 다수였고 결국 축구 규칙 제정을 위한 투표에서 13대4로 손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해킹을 금지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863년 창설된 FA(Football Association)는 그들의 경기를 럭비 풋볼과 구분하기 위해 ‘어소시에이션 게임’이라고 명명했고 이는 나중에 ‘사커’라는 표현으로 발전했다.

반면 FA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에 반발한 신흥 명문 퍼블릭 스쿨 출신들은 1871년 럭비풋볼연맹(RFU)을 발족시켰고 그 시점부터 축구와 럭비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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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의 손흥민(오른쪽 위)이 지난 10월 19일(한국시간) 웨스트햄과 경기에서 골을 넣은 뒤 동료들과 기뻐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문제는 이 당시까지 잉글랜드에서 축구와 럭비는 산업적으로 비슷한 수준에 있었지만 20세기에 돌입하면서 두 종목의 격차는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핵심은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적용이었다.

FA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 잉글랜드 축구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돼 만들어진 클럽에서 노동자 선수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프로페셔널리즘을 허용했다. 반면 럭비풋볼연맹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아마추어리즘을 지키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선수가 럭비 경기와 연습을 위해 희생한 시간만큼 임금으로 보상을 받지 못하도록 규정한 셈이다.

대다수 선수들이 중·상류층이라 굳이 럭비를 통해 임금을 받지 않아도 되는 남부 지역 럭비 클럽과 달리 북부 지역 클럽 선수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에 대신 럭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생계를 위해 보상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에 위치한 많은 럭비 클럽들은 럭비풋볼연맹의 철저한 아마추어리즘에 반발해 1895년 그들만의 리그인 노던 유니온을 구성했고 럭비풋볼연맹 소속 팀과의 경기는 펼쳐지지 않았다.

잉글랜드 축구와는 달리 계층적 분열을 겪게 된 럭비 시장은 축소됐고 자연스럽게 대중적인 인기라는 측면에서 축구에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는 초기 잉글랜드 스포츠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했던 축구와 럭비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가 됐으며 현재 잉글랜드의 대표적 콘텐트로 성장한 프리미어리그(EPL)가 초기부터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로 발전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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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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