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PC주의와 시민독재..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기리며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20.09.21 11:45 / 조회 : 5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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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미국 포스터 문구를 바꿨다가 논란이 일자 삭제된 한국 포스터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1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 긴즈버그는 미국의 두 번째 여성 연방 대법관이자 진보주의와 페미니즘의 상징이다. RGB라는 애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도 적잖다. 다큐멘터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와 한국에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으로 소개된 'On the Basis of Sex'(성별에 기초해)가 대표적이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RGB의 로스쿨 시절과 70년대 성차별 소송을 맡았던 시절을 담은 영화다.

그런 영화지만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2019년 6월 한국에서 개봉했을 때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CGV아트하우스가 SNS에 올린 포스터에서 '영웅적인'이란 원본 문구를 '러블리한 날'로, '정의'를 '힙스터'로, '행동가'를 '핵인싸'로, '지도자'를 데일리룩' 등으로 바꿔서 올린 것. 평생을 여성과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싸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외모와 유행어로 범벅해 버린 것이다. CGV아트하우스는 논란이 거세지가 사과의 글을 올렸지만, '세상을 바꾼 변호인' 소동은 지금 한국의 PC(정치적 올바름)를 둘러싼 현주소였다.

RGB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한국에선 PC를 둘러싼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디즈니 영화 '뮬란'을 둘러싸고 작가이자 방송인 허지웅이 쓴 글과 웹툰 검열 논란에 대해 웹툰작가 주호민이 밝힌 시민독재란 표현이 불을 지폈다.

허지웅은 SNS에 '뮬란' 엔딩 크레딧 논란을 지적하면서 디즈니의 과도한 PC주의를 문제 삼았다. 그는 "PC주의가 이제는 괴물이 되어 정치, 사회, 대중문화 전 영역을 좀먹고 있습니다"라며 "이건 전 세계적인 현상이고 곧 이런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무조건 내가 옳고 너는 불편하다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으니깐요. 이게 세상을 얼마나 더 망칠지 지켜보고 있습니다"라고 적었다.

'신과 함께' 작가인 주호민은 최근 기안84, '헬퍼2:킬베로스' 등 웹툰 표현 논란에 대해 "지금 웹툰 검열이 진짜 심해졌는데 그 검열을 옛날엔 국가가 했지만 지금은 시민이, 독자가 한다"면서 "시민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이어 "아주 힘겨운 시기에 여러분은 만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라며 "계속 그 생각을 해야 한다. '그려도 되나' '이거 해도 되나'. 그 생각 자체를 한다는 게 지금 정상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과연 그런가. 과도한 PC가 세상을 망치고 있는가. 시민독재가 사상을 검열하고 있는가. 한국이 과도한 PC주의가 문제일 만큼, 정치적인 올바름이 사람들의 생각을 옭아매고 있는 사회인가. '세상을 바꾼 변호인' 홍보 문구 논란은 불과 1년 전 일이다. 1년 만에 한국은 과도한 PC 때문에 발칵 뒤집어졌던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신들만의 세상이, 세상의 전부인 줄 단단히 착각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과도한 PC와 시민독재란 표현이 동의를 얻기에는 아직 갈 길이 너무나 멀다. 여전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높은 나라다. 블랙페이스를 지적했던 흑인 방송인이 방송 출연을 못 하게 되는 사회다. 영화 '고요한 아침'을 찍기 위해 내한한 올가 쿠릴렌코가 프랑스 대사관으로부터 받은 선물 중 '82년생 김지영' 영문판 책을 SNS에 올린 것을 두고도 숱한 말들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연예계라고 다를 바 없다. 배우들의 높은 드라마 출연료 기사들이 종종 인구에 회자 되지만 가려진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5년차 남자 주연급 배우 출연료가 20년차 여자 주연급 배우 출연료보다 더 높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는다. 영화는 드라마보다 사정이 그나마 좋긴 하지만 남성 A급 주연 배우 출연료가 여성 A급 주연 배우 출연료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적어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과도한 PC와 시민독재는 그냥 불편한 걸 불편하다고 말할 뿐이다. 물론 이 말들에 맥락은 있다. "사과를 해도 진정성이 없다고 한다. 그냥 죽이는 게 재밌는 것"이라는 주호민의 말에는 맥락이 있다.

시민독재란 말의 맥락에는 자신들만이 정의라고 주장하면서, 상대가 정말 죽을 때까지 몰아붙이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그들만의 정의에 대한 불편함이 담겼다. 불편함보다는 적개심이 담겼다.

혐오를 정의인양 포장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이런 사람들이 내세우는 빗나간 정의와 올바름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정의가 혼재돼 때때로 과격하게 느껴지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런 각각의 정의들이 시대를 이끄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아직은 이런 흐름 속에 빗나간 정의와 올바름이 혼재돼 있지만 결국은 옥석이 가려질 것이다. 역시 시대의 흐름이다.

최근 천계영 작가는 '하이힐을 신은 소녀'를 재연재하면서 "여자 주인공을 통해 남자 주인공이 각성한다는 스토리는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에게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는 잘못된 서사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라며 "수정을 고민했지만 쉽지 않았고 결국 2007년 연재판 그대로 내보냅니다. 대신 작가의 무지했던 과거를 스스로 비판하고 반성합니다"라고 적었다.

예술이란 공감이다. 시대가 바뀌면 바뀐 시대의 공감이 필요하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잣대로 계속 해석되고 그럼에도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이거 해도 되나"라고 고민하는 건, 창작자들의 숙명이다. 과도한 PC와 시민독재란 주장보다 천계영의 반성이 더 울림이 큰 건, 시대와 공감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RGB는 임종 전 손녀에게 받아 적도록 한 유언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임될 때까지 내 후임이 정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미국 대선 전에 자신의 후임으로 보수적인 대법관을 임명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과도한 PC주의가 망치고 있다는 미국조차도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고 우경화로 쏠리는 걸 우려한다는 뜻이다.

RGB는 2015년 한국을 찾았을 때 홍석천 부부와 하리수를 만났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지만 한국은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았다.

과도한 PC주의와 시민독재가 동의를 얻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고 멀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꿈꾸던 세상까지 갈 길은 멀고 멀다. 삼가 고인의 명복과 그녀의 꿈이 이뤄지는 세상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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