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지구 종말의 딜레마

이덕규 객원기자 / 입력 : 2019.03.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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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은 게임과 영화에서 아주 좋은 ‘떡밥’이다. 종말 이후의 세상, 그 안에서의 파멸과 혼란 그리고 인간본성에 대한 묵시록적 내용까지. 게임에서 멸망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주로 핵전쟁이 났다거나,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아 대부분 인간이 좀비가 됐다든지, 홍수 가뭄 지진 같은 자연재해로 멸망한 경우다.

종말을 다루는 장르를 ‘포스트 아포칼립스(종말물)’라고 한다. 게임은 지구 종말의 순간부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지구는 어떤 최후를 맞게 될까. 멸망 이후의 인류는 삶은 어떨까. 종말을 다룬 게임들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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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나는 제3차 세계대전에서 무슨 무기가 사용될지 모른다. 하지만 제4차 대전이 일어난다면 몽둥이와 돌로 싸울 것은 확실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체르노빌 사건과 핵전쟁의 위협


지구 종말의 첫 번째 원인은 핵전쟁이다. 실제로 핵전쟁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하는 내용을 담은 게임은 많다. 시대에 따라 전쟁을 일으키는 당사자는 다르지만, 여전히 핵전쟁은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1987년 출시된 RPG ‘웨이스트랜드’는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 이후 지구의 모습을 그렸다. 종말물의 원조 격으로 이후 ‘폴아웃’시리즈에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게임은 세기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방사능으로 뒤덮인 지구는 황무지로 변해있다. 온갖 돌연변이와 악당들이 활개 치는 세상은 그 자체가 무법천지다. 주인공은 핵전쟁 이후 황폐해진 미국을 돌아다니며, 무법자들을 제거하고 세상의 질서를 잡아야 한다.

당시 중세 판타지 위주의 RPG장르에서 ‘웨이스트랜드’의 종말론적 세계관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게임은 핵전쟁의 위험성을 규탄하고 있다. 핵폭탄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면서 받게 되는 충격과 혼란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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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스트랜드, 포스트 아토칼립스(종말물) 게임의 원조격 작품으로 핵전쟁 이후 황폐해진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게임은 당시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터지면서 전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핵무기 개발에 대한 비판이 전 세계적으로 공감대를 이루었다. 체르노빌 사태가 일어난 지 1년 후에 출시된 ‘웨스트랜드’에도 대중적인 관심이 컸다.

냉전 시대 세계의 패권을 양분했던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이었다. 당시 게임매체들은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제대로 다룬 유일한 게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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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발매된 웨이스트랜드2. '종말 다음에는 뭐가 있을까?' 라는 질문과 함께 실사 오프닝 화면이 시각적 충격을 준다.
종말 후, 인간의 딜레마


웨스트랜드의 계보는 잇는 게임은 그 유명한 ‘폴아웃’이다. 폴아웃은 여러모로 웨스트랜드와 비슷하다(거의 후속작이나 다름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웨스트랜드는 미·소의 핵전쟁을 다뤘지만, 폴아웃은 미·중의 전쟁을 다뤘다.

미국과 핵전쟁을 한 상대가 소련에서 중국으로 바뀐 것 빼고는 대부분의 설정이 비슷하다(사실 후속작으로 개발하려 했지만 ‘웨이스트랜드’의 상표권이 EA에 있었기 때문에 법적분쟁을 피하기 위해 폴아웃이란 제목을 썼다고 한다).

‘폴아웃’은 핵전쟁이 끝난 지 84년 후 핵 방공호 ‘볼트13’에서 시작된다. 방공호 관리자는 정수장치의 부품을 구하기 위해 지원자를 제비뽑기로 선출한다. 재수 없게 걸린 주인공은 부품을 구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황무지를 떠돌게 된다. 주인공이 보게된 세상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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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아웃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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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아웃2. 웨이스트랜드의 실질적인 후속작으로 1편과 2편은 인터플레이에서 만들었다
핵전쟁 이후 세상은 무법천지로 변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원시 그대로다. 때문에 선과 악이 따로 없다. 돌연변이가 된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면 된다. 온갖 약탈과 살인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벌어진다. 어차피 원시시대는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도덕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악행을 저지를 수 있고, 끝까지 정의를 지킬 수도 있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선악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차피 종말 이후의 세상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니까.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일 뿐이다.

폴아웃 시리즈는 종말 후 인간 본성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폴아웃: 뉴 베가스’에서 주인공 앞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등장한다. 당신은 그들을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릴 것인가? 전자를 택하면 정의라는 가치를 지키는 것이고, 후자를 택하면 돈을 얻을 수 있다. 절망 밖에 없는 극한의 환경에서 플레이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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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아웃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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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아웃4. 개발사가 인터플레이에서 베데스다 게임스튜디오로 바뀐 후 폴아웃 시리즈는 최고의 오픈월드형 RPG로 자리 잡았다.
종말 후 이념의 딜레마


‘메트로 3033’은 지구 종말을 사실적으로 다룬 게임이다. 게임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핵전쟁 이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지하철을 배경으로 한다.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지하철역으로 대피한다. 지상은 방사능 오염이 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했다.

이들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일종의 작은 국가를 건설했다. 지하철 국가의 일상은 비참하다. 사람들은 햇빛이 없어도 자라는 버섯과 지하철에서 서식하는 쥐 등을 먹고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건 종말 후에도 인류는 똑같은 실수를 범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념에 의한 집단 이기주의 사회다.

예를 들어 구소련의 영광과 공산주의 찬양을 주장하는 ‘붉은라인’, 나치의 인종주의와 전체주의를 표방한 ‘제4제국’, 자본주의식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한자동맹’, 이렇게 세 곳의 세력이 모스크바 지하철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이념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절된 생활을 하게 된다. 마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치한 냉전시대처럼 말이다. 주인공은 이런 지하철 국가들을 통합해 돌연변이들의 위협에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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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2033.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핵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지하철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룬다는 설정
후속작 ‘메트로: 라스트라이트’에선 돌연변이들을 물리친 메트로 국가들 간의 내전을 다뤘다. 생존이라는 절대가치 앞에서도 이들은 이념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를 증오한다. 그리고 종말 전에 인류가 범한 실수를 그대로 따라한다.

주인공은 정치와 이념 때문에 벌어진 이 무의미한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 게임은 시종일관 암울하고 음침한 분위기로 플레이어를 긴장 속에 몰아넣는다. 메트로 국가들이 서로 죽고 죽이며 파멸로 가는 과정에서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집단 이기주의의 폐해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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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후에도 인간은 정치적 이념대립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인다. 전철역이란 작은 공간 속에 인간의 탐욕과 집단이기주의의 폐해를 볼 수 있다
종말 후, 좀비의 딜레마


좀비는 아포칼립스 게임의 흔하디흔한 캐릭터다. 대부분 좀비물은 원인 모를 재앙으로 지구가 좀비세상으로 변하고, 홀로 남겨진 주인공의 사투를 다뤘다.

‘데드 라이징’은 좀비를 다룬 오픈월드 형 게임이다. 주인공은 좀비가 가득한 도시를 시간 내에 탈출해야 한다. 화면 가득한 좀비들을 썰고 다지면서 피범벅을 만드는 게임이기도 하다. 좀비는 처음에는 공포의 대상이 되지만, 진행하다보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의 레벨 업을 위한 학살의 대상쯤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인간들이다. 게임의 보스들은 전부 인간들이다.

사이코패스 죄수,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경찰, 사회적 열등감에 찌들어 불을 지르고 다니는 방화범, 베트남전 참전용사이자 가족들의 죽음을 보고 미쳐버린 할아버지, 이 모든 것을 덮으려는 군인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적으로 등장한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은 좀비보다 더 위험한 존재다(그래선지 보스전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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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이징3. 좀비 때들로 뒤덮힌 세상에서 주인공 홀로 고군분투하는 게임.
게임은 좀비와 인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탐욕, 증오, 원한으로 인해 미쳐버린 인간들은 자기들 끼리 싸운다. 하지만 좀비들은 절대 동족을 공격하는 일이 없다.

인간일 때는 달려들지만, 좀비가 됐을 때는 공격을 멈춘다. 인간은 인간을 죽이지만, 좀비는 좀비를 죽이지 않는다. 좀비는 철저한 집단생활이다. 서로 뭉쳐 있기 때문에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금세 포위당해 죽는다.

먹을 것도 함께 나눠먹는다. 먼저 온 좀비가 시체를 뜯으면 그 뒤에 좀비들이 달려들어 함께 식사를 한다. 혼자 먹으려고 숨겨두지도 않고, 서로 먹자고 싸우지도 않는다.

좀비들의 개체 수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종말의 세상을 살아남는데 인간과 좀비 중 과연 어느 쪽이 경쟁력이 있을까? 어쩌면 좀비야 말로 인간보다 더 경쟁력 있는 생물이 아닐까. 그래도 당신은 좀비를 뿌리치고 인간의 길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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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이징 시리즈 보스, 진정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존재는 좀비가 아닌 탐욕과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 인간들이다
종말 후 지구의 딜레마


“결국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세계적인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은 ‘인간 없는 세상’이라는 저서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가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이렇게 예측했다.

너티독의 명작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는 이 책을 토대로 제작된 게임이다. 그래선지 ‘라스트 오브 어스’의 종말론은 좀 특이하다. 어느 날 인간을 숙주로 자라는 균이 전 세계에 퍼지고, 사람들은 돌연변이가 되어 죽어간다. 이 균은 포자처럼 공기 중에 떠돌면서 오직 인간만 간염 시킨다.

게임 프롤로그는 전염병이 창궐해 망해가는 세상을 그렸다. 주인공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게 된다. 몇 년 후, 급격히 개체수가 줄어든 인류.

게임은 곰팡이로 인한 질병으로 문명이 무너진 이후, 남은 생존자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게임을 하면서 솔직히 놀랐다. 종말 이후의 세상 치고는 너무나 아름답다. 보통 핵전쟁 이후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가 연상되는데, 이 게임은 그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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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의 저서 '인간 없는 세상'. 인간이 사라진 지구가 어떻게 변하는지 예측해 놓았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세계관도 이 책을 기반으로 완성됐다.
종말 이후, 자연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숲으로 뒤덮인 빌딩 사이를 동물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은 성경에서 표현한 천국을 연상시킨다. 종말 이후의 세계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스럽다(개인적으로 PS4 리마스터 판으로 플레이하기를 권한다). 게임은 사계절에 따라 아름다운 자연의 변화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게임은 종말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지구에 살던 수많은 동물 중 유독 ‘인간’만 멸종된 상태에선 어떤 변화가 생길까. 지구에서 인간이란 동물은 어떤 존재일까.

인간은 죽어나가는데, 자연은 생기 왕성해 지는 이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게임 속 아름다운 자연은 답을 내놓는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라고. 종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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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없어질 수록, 자연은 더욱 생기왕성해진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종말 후 인간과 지구의 역설적 상황을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인간과 기계, 새로운 '종말'의 딜레마


게일라 게임스의 ‘호라이즌: 제로 던’도 대표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이다. 인류 문명이 멸망한지 천년 후. 세상은 동물의 모습을 한 거대한 기계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문명이 퇴화되어 버린 인류는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갔다.

인간은 창과 화살만으로 거대한 기계에 맞서 싸워야 한다. 게임의 분위기를 보면 태초의 원시시대를 보는 듯하다. ‘호라이즌’은 새로운 종말의 딜레마를 던지고 있다. 자신들이 창조한 기계에 맞서 창과 화살 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싸우는 인간의 모습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다. 게임 속 종말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딜레마를 펼쳐 보인다.

과연 우리는 어떤 답을 선택할까. 종말 이후의 세상! 감히 상상하기도 싫은 미래지만 게임을 하며 한번 쯤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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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제로 던. 종말 후, 인류는 원시시대로 돌아가고, 인간이 만든 기계가 세상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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