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은 주로 과거의 것을 올바르게 구현하는 것에 쓰이는 표현이지만, 편의상 여기서는 현실의 것을 게임에 제대로 표현했는지에 대한 것까지 포함해서 작성했습니다)
고증과 재미. 이 두 가지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노력해온 역사가 오래 된 장르 중 하나가 바로 항공기 조종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군용이나 민간용으로 비행기를 조종할 파일럿을 양성하기 위해 만든 소프트웨어를 민수용으로 발매한 것이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해도 좋다고 할 정도이니 역사가 오래 될 수밖에 없습니다.
PC게임이 한창 흥하던 90년대는 그야말로 비행 시뮬레이션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과장 좀 보태서) 자고 나면 새로운 게임이 발매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치 공군의 비밀무기’, ‘F117A’, ‘건쉽 2000’, ‘태평양의 에이스들’, ‘코만치’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죠.
고증은 개나 줘버려! 오직 액션이다! 헬기 쪽에서는 아주 유명하죠. ‘코만치’ |
비행 시뮬레이션의 황금기에 각각의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한 비행 시뮬레이션 삼대장을 필자 나름대로 꼽아봤습니다. 바로 레드 바론, 팰콘 3.0, 그리고 플라이트 시뮬레이터입니다. 레드 바론은 역사적인 고증 부분에서, 팰콘 3.0은 최신 기술을 총동원한 현용 전투기 부분, 마지막으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는 민간 여객기를 소재로 하여 최고의 자리까지 도달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죠.
동력 비행기 발전의 여명기인 1914년 터진 제1차 세계대전을 무대로, 지상의 기사도를 하늘에서 한바탕 재현한 유럽 각국의 전설적 파일럿과 비행기들을 소재로 한 ‘레드 바론’은 고증과 재미 사이에서 그 어느 쪽도 소홀히 않은 게임으로 손꼽을 만 합니다. 게임의 제목인 레드 바론(붉은 남작)은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공군 에이스 중 한 명인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1892~1918)의 별명으로, 그는 최초의 공중 전투에서는 경이로운 공식 격추기록 80기를 기록한 전설의 에이스 파일럿이었습니다.
‘3배 빠른 그 분’의 실제 모델 등장이오! |
필자가 아직도 보유중인 게임의 매뉴얼, 장장 306페이지에 달하며 남김없이 한글번역이 되어있습니다! |
78년 첫 현역 배치 이후 2014년 기준으로 전세계 24개국에 총 4,400여대가 아직까지 활동하고 있는(위키백과 기준) 글로벌 히트 전투기인 파이팅 팰콘은 90년대 한창 전투기에 열광하던 소년들이 ‘셋 중에 누가 짱 세냐’로 치고 받고 하던 논쟁에 단골로 등장했던 기억이 납니다(그루만 F-14 톰캣, 제너럴 다이나믹스 F-15 이글이 그 대상이었죠. F-18 호넷도 껴줘야 하려나…).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의 기념비적인 작품. |
이후 마이크로프로즈 브랜드로 98년 출시된 후속작 팰콘 4.0까지, 이 게임의 등장으로 진정한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이 등장했다는 세간의 평가가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게임입니다.
콕핏 내의 각종 계기를 전부 볼 수 있었다는 엄청난 충격이! |
이 게임은 게임으로서의 재미보다는 비행기 조종 쪽의 극단으로 치달은 게임입니다. 각국의 민간 공항의 여객기를 이륙해서 도착 지점의 공항에 무사히 착륙하는 것이 게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이 민항기 파일럿으로서의 경험을 위한 사실감은 그야말로 놀라운 수준이어서, 공항에서의 이착륙 프로세스, 관제탑과의 교신 등등 모든 것은 실제와 같습니다. 그래픽 역시 기본 소프트웨어에 무수히 등장한 각종 애드온 등을 적용하여 제대로 된 버츄얼 콕핏을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야말로 후덜덜(…) |
현재는 고증과 재미 사이에서 보다 더 재미를 추구한 배틀필드 시리즈나 에이스 컴뱃 시리즈 등 소수의 게임으로만 비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틀필드 V’는 전체적으로 고증 면에서 엉망이라는 평이기 때문에 플레이하더라도 뭔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최근 발매된 ‘에이스 컴뱃 7: 스카이 언노운’은 비주얼적인 고증은 최고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액션을 추구하고 있음에도 몇몇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미션이 있다거나 역시나 일부 캠페인에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황당한 미션 등 많은 비행 게임 매니아들의 아쉬움이 묻어나는 반응을 접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게임에서라도 에이스를 꿈꾸길 바라겠죠. 어느 정도 현실화된 것 같습니다(화면은 에이스 컴뱃 7) |
지상에서는 누구나 베스트 드라이버가!
하늘에서 내려와 땅 위에서는 모두가 전문가가 될 수 있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비행 게임에 버금갈 정도로 무수히 많은 자동차 게임이 게이머의 손가락을 한번씩 거쳐갔습니다. ‘아웃런’, ‘릿지 레이서’ 등의 아케이드 및 콘솔 게임 이외에도 PC게임 진영에서도 많은 드라이빙 게임들이 게임의 역사를 장식했습니다. ‘나스카 레이싱’, ‘콜린 맥레이 랠리’, 니드 포 스피드’, ‘번아웃’ 등등…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훌륭한 드라이빙 게임의 대혈투가 2019년 지금도 벌어지고 있죠.
무엇보다 고증 면에서 꼭 언급되어야 할 대표작은 바로 소니 플레이스테이션 진영의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일 겁니다. 구구절절 설명을 필요치 않는 전설의 드라이빙 ‘시뮬레이터’ 게임. 하지만 최근작인 ‘그란투리스모 스포트’에서 살짝 삐끗해, 미래가 약간은 걱정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드라이빙 게임 중에서는 지존임에는 틀림 없는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 |
실제와 흡사한 차량의 거동 구현, 날씨에 따른 트랙 상태의 변화 등등 레이싱 트랙을 달리는 것에 모든 역량을 투입한 ‘포르자 모터스포츠’ 시리즈와는 별개로 ‘차를 타고 달리는 즐거움’에 초점을 맞춘 ‘포르자 호라이즌’ 시리즈는, 극한의 고증에 피곤함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평균 이상의 현실감까지 맛보기를 원하는 게이머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하며 인기작 반열에 올랐습니다.
최신작인 ‘포르자 호라이즌 4’에서는 전작의 호주처럼 실제 현실에 있는 지역을 재현하는 전통을 살려 영국의 현대적이면서도 때론 고풍스런 풍광을 사계절 전체에 걸쳐 구현했습니다. 등장하는 수많은 차량들도 다 실제 자동차 메이커의 라이선스를 획득했고, 모터스포츠와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수준급의 차량 거동을 보여 현실성과 고증을 외면하지 않았죠.
고풍스런 영국의 도심을 클래식 명차로 드리프트할 수 있는 게임이 흔치는 않을 겁니다. |
반면, 재미보다는 고증을 더욱 추구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재미가 잉네? 라는, 그런 드라이빙 게임의 사례가 여기 있습니다. 바로 PC 게이머들 사이에서 몇 년 전부터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 2’가 그 주인공입니다.
2012년 발매되어 스팀 등 온라인 다운로드 플랫폼으로 구입해 즐길 수 있는 이 게임은 거대한 부피의 초중량 화물을 실은 트레일러를 연결한 트럭을 몰고 전 유럽을 횡단하는 트럭 드라이빙 액션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좁은 땅을 가진 우리나라보다는 땅덩어리도 넓고 각 나라들이 육상으로 연결된 유럽의 장점을 잘 포착한 이른바 ‘틈새시장’ 공략 게임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드라이빙 게임의 샛별, 트럭 운전수! |
거대하고 육중한 덩치가 ‘근육 불끈한 사나이의 로망’을 만족시켜 주기도 하고 트럭 자체에 붙어있는 온갖 장식과 기상천외한 디자인의 ‘데칼(일종의 스티커)’과 도색으로 묘한 매력을 풍기는 게 사실입니다. 필자의 관심사 중 하나인 프라모델 분야에서도 트럭 모형이 상당 부분 라인업으로 있고, 실제로 잘 팔리기도 한답니다.
어쨌든, 이 게임은 실제 화물을 운송하는 트럭 드라이버들의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해서 한국의 게임계 외의 분야에서도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전작의 아쉬운 점들을 완벽 보완한 2편에 이르러 벤츠(Benz), 만(MANN), 스카니아(SCANIA) 등 실존 차량과 브랜드의 라이선스를 획득해 현실감이 거의 100%가 된 것은 물론, 운전석 비주얼은 당연히(!) 버추얼 콕핏을 지원합니다.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각 도로를 시시각각 주/야간 및 날씨가 변화하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총 주행거리 수천 킬로에 10시간 이상은 금방 지나가는 마력의 몰입감 때문에 가히 ‘악마의 게임’이라는 평가가 수두룩합니다.
트럭 인테리어가 이렇게 고급지고 안락해 보이다니… 저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몰랐을 것 같네요. |
우리가 누구나 파일럿이 될 수는 없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운전은 할 수 있으니까요.
지상전의 꽃, 전차 게임을 빼놓을 순 없지!
자동차와는 다른 지상의 왕자, 지상전의 꽃 전차를 언급 안 할 수 없죠. 그런데 전차전을 재현하는 게임 중 비행 게임이나 드라이빙 게임처럼 대중에게 매우 유명한 게 몇 없습니다. 그건 아마도 게임으로 구현하기 어려운 실제 전차 문제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전차는 기본적으로 혼자 운용할 수가 없는 차량입니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곤 기본적으로 3명, 그러니까 조종수, 포수, 전차장 정도가 필수라는 거죠. 참고로 대부분의 현용 전차는 조종수와 포수, 탄약수(장전수) 그리고 전차장(통신과 전황 파악, 전차 지휘)의 4명 구성입니다. 여기에 포수와 전차장 등이 탑승하는 포탑 블록은 회전과 포의 상하 이동 등 추가적인 조작 요소도 있죠.
결국 이렇게 되면 보통 혼자 조작하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전차의 조작을 대폭 간소화할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현실의 차량을 실제와 같이 구동시킨다는 부분에서의 고증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PC게임 초기인 1989년 등장한 ‘셔먼 M4’라는 게임에선 화면의 구성에 조종수로 보이는 듯한 조종간과 각종 계기 등이 배열된 게임 화면을 구현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화면에 나타나는 외부 전망은 당연히 조종수의 시야가 될 텐데 이 화면에서 주포 사격도 하는 식으로 게임이 진행됩니다. 흡사 포탑 회전과 포각이 고정된 것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Strv 103 전차, 통칭 S-탱크를 모는 느낌 같다고나 할까요. 게임 타이틀은 분명 ‘셔먼’인데 말이죠.
독일 타이거의 ‘밥’이었지만 전쟁의 실질적인 승리자였던 셔먼 전차를 구현한 셔먼 M4(1989). |
이 게임 즐겨보신 분, 계세요? |
월탱은 특정 시대와 국가를 설정하거나 묶어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게이머의 실력에 맞춰 시대와 기술이 짬뽕(^^;)된 티어를 기준으로 즐기는 방식이므로 이 부분에 있어서의 고증은 포기해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작도 방금 전 설명한, 전차를 게임으로 구현하는데 발생하는 문제 때문에 실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게이머의 실력에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때 종잇장 장갑의 경전차부터 설계도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만들어진 적이 없는 ‘환상의’ 페이퍼-플랜 전차까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전 차량을 게임 내에서 볼 수가 있으며, 전차 자체의 외관과 게임 상에 구현된 모습, 기본 특성 등에 대한 것은 개발사인 워게이밍의 철저한 실차 취재 등을 거친 덕분에 꽤 고증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액션 게임에 적합한 UI를 갖추고 있지만 비주얼은 훌륭합니다. |
한편, 여기 고증적인 면을 극한으로 추구하는 전차 게임이 있어 소개해볼까 합니다. 비록 전차를 몰고 전장을 누비며 육중한 대포로 적 전차를 박살내는 게임 플레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게임’이라는 카테고리로 등록되어 있는 것임은 분명하니까요.
‘탱크 메카닉 시뮬레이터’는 아직 발매일이 공개되지 않은 개발 중인 게임으로, 현재 스팀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유명한 전차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전투가 목적이 아니라! ‘재현’에 목적이 있는 게임입니다.
한술 더 뜨는 것은, 전차의 복원에 더해 전차 박물관의 경영이라는 요소까지 포함시켜 놨다는 것이죠. 경영 시뮬레이션이라고 봐야 할 정도인가 싶습니다. 이 외에도 전차를 발굴(?)하거나 복원, 재생하는 부분도 ‘뭐 이런 것까지’라고 할 정도로 쓸데없이 디테일하다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몽키스패너, 그라인더 등의 공구로 일일이 수작업을! |
보다 많은 게임을 소개하지 못해 아쉽지만, 시뮬레이터로서의 게임의 기능과 엔터테인먼트 제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고자 했던 수많은 게임 개발사의 노력을 살짝 엿볼 수 있었습니다. 더 많은 게임 개발사들의 도전적인 시도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