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작품마다 긴장과 부담..좋은 배우이고 싶다"(인터뷰)

영화 '내부자들'의 이병헌 인터뷰

김현록 기자 / 입력 : 2015.11.04 07:00 / 조회 : 9044
  • 글자크기조절
image
'내부자들' 배우 이병헌 / 사진제공=쇼박스


오랜만의 인터뷰였다. 이병헌(45)은 "기대된다"는 의미심장한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지난해 이병헌은 두 20대 여성이 동영상을 빌미로 50억원을 요구한 협박 사건에 휘말렸고, 이 과정이 낱낱이 공개되며 배우로서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지난 3월엔 아빠가 됐지만 마음 편히 그 기쁨을 표현하지도 못했다. 그 사이 4번째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제네시스'가 개봉했고 '협녀:칼의 기억'이 관객을 만났지만 그는 간간이 꼭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곳에만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인터뷰에 나섰다. 오는 19일 개봉하는 '내부자들'(감독 우민호)을 위해서다. 소송으로 힘든 시절 따가운 시선을 견디며 촬영한 작품이다. 은밀하게 혹은 대놓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직하고도 속도감 있게 그려낸 정치 드라마에서 그는 정치깡패 안상구 역을 맡았다. 한때 회장님 소리까지 들으며 승승장구했지만, 한순간 배신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뒤 복수의 칼을 가는 인물이다.

3시간 40분에 이르렀던 첫 편집본을 2시간 10분까지 줄이고 줄여 완성된 작품이지만, 영화 속 이병헌은 캐릭터에 완전히 녹아든 모습으로 관객을 쏙 빨아들인다. 표정 하나, 대사 하나로 잘려나간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하는 열연이다. 힘든 시기, 그 무거운 부담을 안고 카메라 앞에 섰을 배우의 무서운 몰입력에 기가 질릴 정도다.

image
'내부자들' 배우 이병헌 / 사진제공=쇼박스


이병헌은 작심한 듯 입을 뗐다. "사실 저로 인해 감독님을 비롯한 많은 스태프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자는 마음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맡은 바 임무에 집중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마음고생이요? 어차피 연기를 한다는 것은 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거기에 붙여서 같이 영화 작업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 롤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어요. (부정적인 시선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방법이란, 그저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빠가 된 소감에 대해서도 그저 짧게 답했다. 그는 "'내가 애가 생기니까 연기가 이렇게 좋아졌구나' 이런 느낌은 모른다"고 잠깐 너스레를 떨었지만 이내 "아빠가 되어 배우로서 달라진 점을 객관적으로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책임감은 이전과 너무나 다르다"며 말을 줄였다.

정석에서 토씨 하나 벗어나지 않았다 싶은 답에 고개가 끄덕여진 건 이미 이병헌의 '내부자들'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1990년대 젊은 깡패 안상구가 조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신문사 논설주간과 인연을 맺고, 거칠 것 없이 잘 나가다 배신과 음모에 휘말리는 과정이 롤러코스터처럼 펼쳐진다. 이병헌은 다채로운 비주얼, 처음 보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곁들여 이전 어느 작품에서도 보지 못한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버림받고 복수에 나선 깡패지만 전작 '달콤한 인생'과도 완전히 다른 모습. 그는 "'달콤한 인생'이 판타지에 가깝다면 이건 현실에 붙어있는 이야기"라며 "촬영할 때도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고 했다.

"'내부자들'에선 다양한 시대와 그 시대에 따른 패션, 헤어스타일, 그 인물이 시대에 따라서 처해지는 상황들이 극과 극이에요. 다양한 감정의 변화와 스타일의 변화는 당연히 염두에 두고 연기를 했죠. 하지만 단 하나 감정적으로 잡아가려 한 게 있어요. 날아가는 새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도 그렇고, 팔목 잘리고 처참한 꼴로 땅으로 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고 깡패는 깡패라는 거죠. 늘 복수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깡패의 캐릭터라 그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상황적으로 변화의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자고 생각했어요."

image
'내부자들' 배우 이병헌 / 사진제공=쇼박스


파격적인 스타일엔 '패션깡패'란 평까지 나왔다. 특히 망가진 안상구가 턱선까지 오는 긴 파마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선보이는 중반부가 독특하다. 밑바닥에 떨어진 안상구의 스타일을 완성하는 헤어스타일은 우민호 감독의 아이디어다. '모든 걸 맞춰주더라도 그것만은 해 달라'며 이병헌을 설득했고, "안 해봤던 거라 재밌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병헌이 옳거니 달려들어 스타일은 완성했다. 영화 '케이프 피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선보였던 스타일을 참고해 따라한 셈이다.

"과거를 몽타주처럼 편집한 신들에선 비주얼 적으로 안상구를 설명하기 위해 각각의 모습이 들어갔어요. 뽀글뽀글한 흑인 같은 머리는 제가 감독님에게 부탁한 거고요. 사우나 장면에서도 원래 대사가 있었지만 어쨌든 편집이 잘 돼서 그런 단면들이 상상을 더 해주죠. 망가진 모습요? 저는 되게 좋아해요. 새롭게 하는 걸. 그 상황에 딱 괜찮게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새가 나오면 반기는 편이에요. 어차피 제 모습을 너무 많이 봐오셨고, 이제는 더 이상 변화를 줄 수 있을 여지가 있을까 싶을 만큼 세월이 흘렀죠. 만약 내가 어떤 캐릭터의 어떤 모습으로 신선함을 느낀다면 그것만큼 좋은 신이 어디 있겠어요."

어디 스타일 뿐이랴. 전라도 사투리 연기도 처음이다. 이병헌은 "기회가 주어지면 기가 막히게 하겠다는 배우가 있을지 모르지만 저는 안 해봤던 거라 은근히 부담스러웠다"며 "사투리가 거슬려 정작 드라마에 몰입을 못 하면 어떻게 하나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굳이 써야 하는 건 아니라는 감독의 말을 듣고서도 고민하던 이병헌은 전라도 출신 연극배우에게 레슨을 받아가며 감을 잡았다. 그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걸쭉한 사투리 연기에 '아껴둔 거냐'는 말까지 나왔다.

오른손을 잃고 의수를 달고 다니는 모습도 색다르다. 특히 망가진 안상구가 옥상에서 홀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한 손에 든 젓가락에 면발을 둘둘 감아가며 먹는 모습이 씁쓸한 감흥을 안긴다. 오른손잡이인 이병헌도 연기하기에 불편했던 신이다. 라면 먹는 신이 많아 젓가락질 연습을 많이 했지만, 무식하게 집는 것도 안상구답다는 느낌이 들어 그리했단다. 감독, 스태프, 배우까지 웃느라 NG가 났고, 나중엔 홀로 웃음을 못 참아 미안함에 웃음을 꾹꾹 참아가며 연기를 펼쳤다.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제일 처량하다고 생각했던 신"이라며 "혼자 소주 한 병에 라면사다 옥상에서 먹는 그 시간이 안상구에겐 그 시절 가장 해피한 순간이라고 생각했다"는 설명이다.

image
'내부자들' 배우 이병헌 / 사진제공=쇼박스


물론 '내부자들'은 이병헌만의 영화가 아니다. 쓰리톱을 이룬 조승우 백윤식을 비롯해 이경영 김홍파 배성우 조재윤 김대명 김병옥 정만식 이엘 등 막강한 배우 군단이 함께했다. 이병헌조차 "내공이 대단하다. 편집본을 보며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그는 "조·단역 할 것 없이 이 영화에서는 다들 내가 이기나 니가 이기나 보자 싸우는 느낌을 받았다"며 "촬영 중간 편집본을 보고 자극받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 중에서도 팽팽하게 맞붙으며 기싸움을 벌인 열혈검사 조승우와의 만남은 특히 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실제로는 10살 아래인 조승우는 이병헌을 내내 "깡패야"라고 부르며 대립각을 세웠고, 이병헌 역시 "이 싸가지"라 맞받으며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실제로 상당 부분이 애드리브다.

"조승우씨야 워낙 흥행작이 많잖아요. 작품을 볼 때마다 저 친구 좋은 배우구나 생각은 했는데, 막상 둘이 호흡을 해 보니 보통 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참 잘하는구나, 좋은 배우구나 했죠. 그래서 사실 너무 많이 놀랐고, 작품 하면서 친구로서도 알게 돼 좋았어요. '깡패야' 이건 대사에도 없는데 계속 쓰는거예요. 그렇게 상대가 애드리브를 하면 저도 호흡을 맏으니까 그 수위에 맞는 애드리브를 보여줘야 되잖아요. 제 대사 늬앙스가 그래서 바뀌고 또 바꿔서 돌아오고 하다보니 세진 역할이 많아요. '내가 안상구라면 이렇게 하겠다'는 느낌으로 대처한 게 많고, 함께한 신 대부분이 그렇게 만들졌어요. 이렇게 애드리브를 많이 한 영화가 있아 싶을 정도예요."

조승우와 '척하면 척' 하는 호흡으로 함께했다면, 안상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인 논설주간으로 등장한 베테랑 백윤식과는 뜻밖의 리액션을 경험했다. "보통 사람들이 내게 이런 감정으로 치겠다는 걸 상상하면서 대본을 읽고 연습하는데 웬만한 것들이 다 상상했던 느낌과 다르게 리액션을 주신다"며 "내가 그걸 어떻게 받고 맞받아쳐야 하는지 당황스러울 때가 있었다"는 게 이병헌의 고백. 그는 "처음에는 '왜 저러시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이게 그 분의 힘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또 다른 나름의 세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image
'내부자들' 배우 이병헌 / 사진제공=쇼박스


'내부자들'의 곳곳에는 이병헌의 아이디어가 가득하다. 모텔 간유리를 사이에 둔 화장실에서 낑낑거리며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유리벽을 세우자'고 먼저 제안했고, 자가용 대신 밴을 몰자는 아이디어도 직접 냈다. 능청스레 차에 기대 누운 안상구가 끼고 있는 목베개는 이병헌이 평소 차 안에서 쓰던 것이다. 그는 "조금 더 쉼표같은 역할로, 능청스럽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한 모습으로 해보면 어떨까 감독님에게 제안했다"며 "그에 대한 책임감으로 더 재밌게 해아겠다 했던 지점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스캔들메이커 이병헌이 아닌 '배우 이병헌'을 진정 다시 받아들이기까지 앞으로 더 시간이 걸릴까. 아마도 직접 스크린을 마주할 관객의 눈에 모든 게 달려있을 것이다. 개봉을 앞둔 부담은 없을까. 이병헌은 그저 "그것은 어떤 작품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라며 "부담감과 긴장감, 압박이 영화를 개봉할 때는 늘 따라다녔다"고 말했다.

'내부자들'의 깡패 안상구는 검사로부터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란 뜻밖의 질문을 받는다. 천박하기 그지없는 안상구가 희미한 웃음을 띠며 답하는 장면은 독특한 감흥을 안긴다. 이병헌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짧은 답이 돌아왔다.

"늘 비슷한 이야기, 똑같은 이야기지요. 좋은 배우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기자 프로필
김현록 | roky@mtstarnews.com 트위터

스타뉴스 영화대중문화 유닛 김현록 팀장입니다.

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