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시대는 계속된다..똥고집쟁이들에게 감사를

[록기자의 사심집합소]

김현록 기자 / 입력 : 2014.08.01 10:47 / 조회 : 7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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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 / 사진='인셉션' 자료 사진


재작년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찍던 체코의 세트장에서는 '이 영화가 필름으로 찍는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는 말이 떠돌았다. 얼어붙은 미래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는 그래서 더 처연하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그 예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35mm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촬영한 '설국열차'는 필름으로 작업한 마지막 한국영화가 됐다. 그러나 모든 상영은 디지털로 이뤄졌다. 극장의 디지털 영사기 보급이 100%에 이르며 한국의 영화필름이 영사실에서 물러났기 때문이다. 한국의 영화 필름은 필름은 기록이나 상영이 아니라 보존을 위한 매체로 남았다.

그러나 바다 건너 할리우드를 포함한다면 '설국열차'는 마지막 필름영화의 타이틀을 가져갈 수 없다. 필름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가까스로 종말에서 벗어났다.

지난달 30일 외신에 따르면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은 현재 영화 촬영용 아날로그 필름을 생산하고 있는 유일한 업체인 코닥 사(社)를 위한 긴급 구제책에 합의했다. 코닥 측은 공식 성명을 내고 필름 사업을 계속하겠다고 발표했다. 적어도 필름이 없어서 필름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은 당분간 오지 않게 된 셈이다.

"영화 감독과 주요 스튜디오, 필름만의 독특한 예술적 기록적 가치를 인정하는 다른 이들과의 격렬한 논의 끝에 우리는 필름 생산을 계속하기로 했다. 코닥은 필름의 생명 연장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힘을 보태준 영화 산업의 리더들에게 감사드린다."(제프 클라크, 코닥 CEO)


한국이나 할리우드나 필름 영화가 직면한 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디지털 영사 장비가 보급된 지 5~6년 만에 전국 극장은 100% 디지털화를 완료했다. 미국 역시 지난 2~3년 사이 영사장비의 급속한 디지털화와 함께 필름이 갈 곳을 잃어가고 있다. 디지털 장비가 빠르게 보급되며 코닥의 필름 판매는 10년 만에 96% 감소했다. 그 큰 할리우드에도 아날로그 필름 현상업체는 포토켐 한 곳 정도가 남았을 정도다.

빠르고 편리하고 복사가 쉬우며 변색되지 않는 디지털이란 시대의 흐름은 필연과도 같았다. 그러나 많은 영화 촬영감독들은 디지털 기술이 발전했어도 색이나 음영을 표현하는 풍부한 표현력은 필름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고유의 입자감과 풍성한 색감, 그 기다림의 미학을 사랑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시네마천국'의 흑백 영사기가 주던 감동을 어찌 잊겠나 말이다. 그러나 강고한 경제적 논리와 편리성,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받아들여야 한다는 합리화가 더해지며, 한국의 필름 영화는 작별을 고했다.

올해 2월 아카데미 기술과학상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했던 연설은 그래서 더 울컥했다. 이름난 필름애호가인 그는 필름 작업 기술자들을 지난 100년을 어두운 방에서 살아온 연금술사에 비유하며, 꿈을 극장으로 옮기는 마법의 주인공이었던 필름은 디지털 시대에서도 영원히 영화의 본질이자 표준으로 남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필름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처럼 들렸다.

그 못말리는 천재 감독, 필름을 사랑하는 똥고집쟁이가 바로 할리우드에서 벌어진 필름의 기사회생에 한 몫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개봉을 앞둔 '인터스텔라'를 필름으로 작업하며 끈질기게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압박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필름이 없어지면 영화를 안 찍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J.J. 에이브럼스는 현재 '스타워즈:에피소드VII'를 필름으로 촬영하며 한 몫을 보탰다. 시장논리 따위 먹히지 않는 이 막강한 필름 애호가 집단은 배짱과 실력을 앞세워 거대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압박했고, 결국 메이저 영화사들이 두 손을 들고 만 것이다.

필름의 마법을 믿으며 영화의 꿈을 스크린에 옮겨 온 시네필들은 시대를 거스르고 필름시대의 종언을 막고야 말았다. 한국의 마지막 영화필름 현상소인 서울 필름현상소 매출이 제로를 찍고 있는 시대, 정규직 애니메이터를 고용해 고집스럽게 2D 애니메이션을 설파해 온 지브리가 애니메이션 제작 중단을 선언하는 시대, 그리고 사라져가는 정겨운 구식들과 조용히 작별해야만 할 것 같던 시대. 이 와중에 할리우드에서 들려온 이 시대 역행적 뉴스는 왜 이렇게 먹먹하게 다가오는지. '쨍'한 디지털 화면에 적응해 가며 '영화를 '필름'이라 부르지 않는 날이 언젠가 오겠구나' 하던 허한 마음이 위로받은 것 같다고 할까.

할리우드도 손 못 대는 영화계의 거물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곧 필름이고 필름이 곧 영화라는 믿음으로 시대를 끝내 거스르고야 만 외골수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같다. 그 똥고집쟁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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