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의 발견, '한공주'의 확신..천우희를 만나다(인터뷰)

김현록 기자 / 입력 : 2014.04.10 13:37 / 조회 : 9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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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천우희 /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구불구불한 삼청동 골목길을 올라서니 곱게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녀가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공주야!"하고 소리 내 부를 뻔했다. 영화의 끝과 시작에서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라 토로하던 단발머리 소녀가 무사히 자라 환하게 웃는 듯,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와 박혔다.


배우 천우희(28). 밀양여중생성폭행사건이 모티프인 영화 '한공주'(감독 이수진)에서 타이틀롤 한공주 역을 맡았다. 과거와 현재가 직조하듯 교차된 가운데 담담하고도 절절한 그녀의 모습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쥐고 흔든다. 최근 개봉한 '우아한 거짓말'에선 동생을 아끼는 고교생 언니로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던 터. '써니'의 본드걸로 존재감을 드러낸 천우희는 '한공주'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부터 2개 상을 수상하며 영화팬 사이에 오르내리던 '한공주'는 각종 해외영화제 대상을 휩쓸며 이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천우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오는 17일 개봉을 기다리는 있다. "무덤덤하려고 애쓰니까 더 긴장된다"고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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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공주'의 천우희 / 사진=스틸컷


이제와 돌이켜 보면 시작부터 쉽지 않은 촬영이었다. 비슷한 피해자를 만나볼까 하던 생각은 애초에 접었다. 대신 시나리오를 읽고 더 읽으며 '나라면 어땠을까'하고 곱씹었다. 모든 영화 감독은 독하더니, 이수진 감독은 사건이 벌어진 과거 장면을 첫 촬영분으로 골랐다.


"감독님이 '저에게나 스태프 모두에게 감정적인 영향이 있을 테니 처음으로 그 신을 찍는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무슨 영화를 찍는지 봐라' 하는 뜻이셨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독하게,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괜찮다고 하고 촬영했어요. 각오했던 일이니까요. 이후 촬영에서도 그런 상황이 있었다는 전제 하에 계속 이겨내려고 했어요. 감독님이 원하신 게 어떤 마음가짐이었는지 아니까요."

사람들에게 쫓겨 체육관에 숨어들어 숨을 내뱉는 장면,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도망쳐야 하나요'라고 되묻는 장면…. 공주에게 녹아들어 카메라 앞에 섰던 천우희에게는 모두 소중한 순간들이다. 가장 어렵게 찍은 장면은 그녀가 까만 흔적처럼 등장하는 맨 마지막 신. 추운 겨울, 몸에 추까지 매달고 산 속에 있는 수조세트에 들어가 숨이 넘어갈 때 까지 찍고 또 찍었다. 8시간을 찍으니 몸이 보라색이 되어가고 저체온증이 왔다. 물에, 추위에 트라우마가 생길만큼 무서웠단다.

"작게 보이고 잠깐 보일 수 있지만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앞으로는 이것보다 더 힘든 게 없을테니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연기를 하며 '내가 왜 이걸 했을까' 그랬어요. 죽음을 맛봤다고 할까. 그 두려움이 확 다가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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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천우희 /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따져 보면 힘든 선택만 했다. '마더'에서는 진구의 여자친구로 정사신을 소화했고, '써니'에서는 본드 부는 문제아였다. 천우희는 촬영을 마친 차기작 '카트'에서도 머리 질끈 묶은 판매원으로 나온다며 "예쁘게 나올 구석이 없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모두 우연이에요. 강렬한 걸 하겠다고 고집한 것도 아니고, 캐릭터보다 시나리오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저보다 어리고 예쁜 친구들이 샤방샤방하게 나오는 걸 보면서 문득,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왜 항상 힘든 길을 갈까' 하는. 20대라는 나이에 할 수 있는 사랑이라거나 감성을 연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가, 한편으로는 '내 업인가' 싶더라고요. 주어진 걸 열심히 하면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리얼리티를 살릴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제가 인지도가 쌓이고 더 좋은 배우가 된다면 기회 또한 많아지리라고 믿어요."

유독 여성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영화에서 교복을 많이 입었다. "지금까지는 교복 입고 셀카도 찍고 하며 '아직까지는 괜찮아. 교복 더 입어도 돼' 하면서 스스로를 안심시켰다"는 천우희는 "올해부터는 안되겠더라"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우아한 거짓말'을 보니 이젠 안 입어야 되겠더라고요.(웃음) 한 쪽으로는 그만 벗어났으면 좋겠다, 다른 모습이고 싶다 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벗어나려고 하지 마'하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잘 어울리는 게 있다면 충분히 잘 해내야겠다는 마음이에요. 너무 많은 교복을 입었지만 만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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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천우희 / 사진=이기범 기자 leekb@


스크린에서의 존재감과는 다르게, 실제 교복 입던 시절엔 눈에 안 띄는 학생이었다. 천우희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모님은 아기 취급을 하셨고 답답한데 소심해서 반항도 못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긴 했지만 공부도 열심히 안 했다. 스스로 '재미없다'고 느끼던 무렵, 여고 연극반에서 꿈을 찾았다.

"연기 한다고 하면 다 그저 연예인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처음 연기한다는 소릴 했을 때 친구들이 다 '네가?', '쟤 연예인 한대, 연예인' 이런 분위기였어요. 예쁘고 독특한 친구들이 많은데 저는 별 존재감이 없었어요. 하지만 무대 체질이기는 했어요. 사람들 앞에 서는 걸 부끄러워하면서도 관객이 있는 무대에 섰을 땐 별로 떨지 않았거든요. 장기자랑에서도 빠지지 않았고요. 연극 무대에서 전에 못 맛봤던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연기자로 접어든 지 올해로 10년. 지난해, 사춘기를 다시 겪듯 가장 고민 많은 한 해를 보냈다는 천우희는 "그러고 나니 모든 게 좀 더 과감해졌다"고 털어놨다. 올 초 처음으로 혼자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일도 그녀에겐 큰 '사건'이었다. 도전하고 싶다다는 결심이 서면 끝까지 해보겠다는 각오도 새로 다졌다.

"벌써 10년이라니.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 부끄러워요. 남들은 1만 시간을 채워 어딘가에 도달한다는데, 나는 10년을 하면서 '그 동안 뭐했지' 싶어요. 꾸준히 했지만 제 성에는 안 차요. 배우라고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내가 죽을 만큼 간절했던가' 하는 반성을 항상 해요. 늘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어려보여서가 아니라 그간 제가 성숙하지 못했기에 10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내가 참 더디고 늦구나 하는 걸 새삼 느껴요. 이제 조금 더 성장했다 할까요. 단단하게 커 가고 싶어요."

김현록 기자 roky@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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