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범 감독 "마지막 장면, 관객향한 일종의 폭력"①(인터뷰)

임창수 기자 / 입력 : 2011.03.29 09:07
  • 글자크기조절
image
박정범 감독 ⓒ송지원 기자 g1still@


"형 영화를 못보고 가서 아쉬워요. 언젠가 제 이야기를 장편영화로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형은 분명히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영화 '무산일기'의 주인공 승철의 실제 모델인 고 전승철씨가 박정범 감독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 글의 내용이다.


고생스런 시절을 함께 견뎌낸 탈북자 후배의 응원 섞인 유언은 그 자체로 의지이자 목표가 됐다. 한 감독이 죽은 친구에 대한 의리와 사명감으로 내놓은 고집스런 결과물은 부산국제영화제, 마라케쉬국제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도빌아시안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행진을 이어가며 그 무게와 가치를 입증했다.

"승철이는 2008년 2월 1일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승철이가 세상을 떠나고 '시'의 조감독으로 일할 무렵, 승철이가 남긴 싸이월드 쪽지를 보고 승철이 이야기를 장편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무산일기'의 모티브가 된 단편 '125 전승철'은 승철이가 죽기 이틀 전에 완성했어요. 하지만 승철이가 모르핀에 정신이 없는 상태라 결국 보여주지는 못했죠. 그 친구가 생전에 출연했던 단편이 있는데 영화가 원하는 대로 안 나왔다는 생각 때문에 영화제에도 안냈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미흡해도 완성해서 보여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많이 후회가 되죠."

박정범 감독의 대학후배였던 고 전승철씨는 부당한 현실을 묵묵히 수용하는 극중 승철과는 달리 밝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박 감독이 영화제에서 낙선하고 힘들어할 때면 늘 곁에서 술잔을 함께 기울이며 힘을 복 돋워준 친구였다고. 직접 승철 역을 연기한 박 감독은 해외영화제에 초청받아 상을 받아 연단에 오를 때면 먼저 세상을 떠난 승철씨가 생각난다고 했다.


"승철이는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 했어요. 아무래도 북한에서는 이동에 대한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갈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해외에 나가보는 게 그 친구의 평생 소원이었는데 그때 '영화가 잘되면 해외영화제에도 간다'는 얘길 하곤 했었거든요. 주위 분들이 그러세요.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타고 하면 표정이 밝아야하는데 왜 표정이 그 모양이냐고. 아무래도 승철이가 많이 생각나고 안타깝고 그렇죠."

image
박정범 감독 ⓒ송지원 기자 g1still@


'무산일기' 속 승철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25'로 시작하는 탈북자다. 원치 않는 주홍 글씨 때문에 가는 곳마다 퇴짜를 맞는 그가 남한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단지 붙이는 일 정도가 고작. 봉제공장에서 쫓겨나면서도 미련스레 얻어 마신 커피 찻잔을 씻어내던 그는 기도 모임에서의 고백 이후 살아남기 위한 섬뜩한 변화를 보여준다. 영화 말미 승철이 유일하게 정을 붙이고 키우던 강아지 백구의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아무래도 제 스스로도 애착이 많이 가는 장면이기도 하구요. 백구를 보는 순간 갑자기 승철이와 있었던 일들이 생각이 나서 아무 생각 없이 쳐다봤던 것 같은데 나중에 모니터링을 해보니 퍽 오랜 시간 그러고 있더라구요. 스태프들과 같이 보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느낌이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자, 봐라'하며 관객에게 일종의 폭력을 행사한 거죠. 그 시간이 길어짐으로써 관객들은 필연적으로 승철의 삶을 복기하게 될 테니까요."

탈북자가 남한에서 겪는 부조리를 그렸지만, '무산일기'는 탈북자만을 위한 목소리만을 내지는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팍팍한 세상에 물들어가는 스크린 속 승철의 모습은 아득한 현실에 절망하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으며, 그에게 한없이 가혹한 남한 사회의 모습은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이 마주하는 지긋지긋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보려고 노력하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세상을 고발하고 싶었어요. 여러 가지 결말 가운데서 지금의 결말을 택한 이유도 그런 의도에서 였구요. '서로가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한다면 세상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런 것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 상황까지 온 것이라는 얘기를 한 거예요. 아이러니한건 반발심에 털어놓는 승철의 고백에 관심도 없던 교회 사람들의 태도가 호의적으로 바뀐다는 거예요. 승철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가짜같고 우스웠을까요."

연세대 체육교육과 출신의 박정범 감독은 군복무 시절 기타노 다케시의 '하나비'를 보고 충격을 받아 홀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좋다는 영화와 책을 혼자서 찾아보고 단편을 찍어가며 감독의 꿈을 키운 그는 동국대 영상대학원을 거쳐 '시'의 조감독을 맡으며 이창동 감독이 준 4개월 동안의 휴가 동안 '무산일기'를 완성 시켜냈다. 늘 묵묵하고 진지하게 작업에 몰두해 온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독립 장편 인큐베이팅 펀드의 지원을 받아 현재 '산다'라는 제목의 두 번째 장편 영화를 준비중이다.

"시나리오 초고가 나와서 고치고 있는 중이에요. 겨울이 배경이라 올 겨울까지는 충실하게 준비를 할 생각이구요. 저만이 전달할 수 있는 어떤 것들이 있을 때만 직접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음 영화까지는 그런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세상을 떠난 탈북자 친구의 유언이 낳은 수작. 해외영화제를 휩쓸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무산일기'의 뒷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터치의 영화보다 훨씬 더 영화 같다. 한 신진감독이 친구의 유언 속에 무심한 관객과 세상을 향해 날리는 묵직한 원투 펀치. '무산일기'는 오는 4월 14일 개봉한다.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