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불운아' 이동국 4전5기

남형석 기자 / 입력 : 2009.08.04 11:45 / 조회 : 6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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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대표팀에 재승선한 이동국.


이동국(30.전북)이 대표팀에 재승선 했다. 그의 나이 만 서른. 30대 나이에 ‘재승선’이란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불과 1,2년 전 해외진출 실패와 음주파동을 겪은 선수에게 태극마크를 달 기회가 다시 왔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이동국의 A매치 통산 기록은 71경기 22골. 3경기당 1골 정도면 스트라이커로서 준수한 활약이다. 그러나 그와 대표팀과의 관계는 드러난 수치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굴곡이 잦다.

‘잔혹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그는 대표팀에서 숱한 실패를 겪어 왔다. 19세 나이에 국가대표에 발탁돼 지금까지, 그는 크게 보면 네 번의 국가대표 승선과 탈락을 경험했다. 이는 세계 어느 대표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리고 그는 30세가 된 지금, '4전 5기'의 기회를 마지막으로 부여받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 대표팀 감독인 차범근의 파격 발탁으로 이동국은 19살 나이에 꿈의 무대를 밟았다. 그는 한국이 5대0으로 참패를 맛본 조별 예선 2차전 네덜란드전에서 시원한 중거리 슛을 날리며 충격에 빠진 한국 축구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그는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 MVP, 득점왕을 차지하며 ‘이동국 신드롬’을 일으킨다. 2000년 아시안컵에서 6골로 득점왕을 차지할 때까지 그는 대표팀 내에서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입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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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월드컵 당시 네덜란드를 상대로 중거리슛을 시도하는 이동국.


탄탄대로일 것만 같던 그의 축구인생, 그러나 시련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는 2001년 독일 분데스리가 명문클럽 베르더 브레멘으로 임대 이적을 결심한다. 당시 언론과 축구팬의 관심은 지금 박지성에게 쏠리는 스포트라이트 못지않았다.

그러나 팀을 옮긴 후 그는 극심한 부진에 빠지기 시작했다. 6개월 동안 단 8경기 출전에 1어시스트. 지난 2년간 국가대표와 올림픽대표, 청소년 대표를 오가며 쉴 새 없이 뛴 탓에 컨디션이 극도로 저하돼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여기저기서 ‘게으르다’, ‘노력을 안 한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였다.

6개월 만에 그는 친정팀 포항으로 돌아왔지만, 좀처럼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는 월드컵을 불과 1년도 채 안 남겨둔 상황이었다. 게다가 우리나라 첫 외국인 대표팀감독인 히딩크의 부임도 그에겐 악재였다. 히딩크는 컨디션이 좋던 시절의 이동국을 알지 못했고, 지칠 대로 지친 이동국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물론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이동국은 황선홍, 안정환, 최용수 등에 밀려 2002년 월드컵 대표팀에 최종 탈락하고 말았다.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동국 본인도 “월드컵을 한 경기도 안 봤다”고 고백할 정도로 그의 심적 고통은 심했다.

월드컵이 끝난 직후 그는 2002부산아시안게임에서 당시 박항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부터 다시 기회를 얻었다. 그에겐 개인적으로 군 문제가 걸린 중요한 대회였다. 이동국은 4경기 연속 골을 기록하며 분전했으나, 대표팀은 4강 이란전에서 승부차기 패배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는 이듬해 상무에 입대했고, 사람들은 그를 ‘시대의 불운아’로 여기기 시작했다.

세 번째 기회는 2004년 6월 본프레레호 출범 이후 찾아왔다. 본프레레 감독 아래 이동국은 황태자로 거듭났다. 대표팀 16경기 10골, 아시안컵에서 6골로 득점왕. 그는 본프레레 감독 사임 후 아드보카드 감독 체제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의 2006년 월드컵 출전은 당연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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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과 그의 부인 이수진씨.<사진출처 = 이수진씨 미니홈피>


그러나 이번엔 부상이 문제였다. 이동국은 독일월드컵 최종 엔트리 확정을 한 달여 앞둔 2006년 4월5일 프로축구 K리그 경기도중 오른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최소 6개월 이상 결장해야 하는 큰 부상이었다. 그는 결국 2006년 월드컵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대표팀에서 하차해야 했다.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오랜 재활 훈련 끝에 복귀한 이동국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 팀인 미들스보로로부터 영입제의가 온 것이다. 2007년 1월 미들스보로에 입단한 그는 다시 대표팀에서도 중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대표팀 감독인 핌베어벡은 이동국을 원톱으로 놓은 4-3-3 전술을 사용했고, 이동국은 붙박이 주전으로 2007년 아시안컵에 참가했다.

그러나 네 번째 시련도 머지않아 그를 찾아왔다. 아시안컵 4강 탈락에 이은 소속팀에서의 극심한 부진. 사실 소속팀에서 출전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게 큰 문제였지만, 이미 몇 차례 실패를 경험한 이동국에게 한국 축구팬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2007아시안컵에서의 음주파동이었다. 이운재, 김상식, 우성룡 등과 함께 대회 도중 음주파티를 벌인 게 화근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1년 동안 대표팀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젠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역시 게으른 천재였을 뿐’이라는 차가운 시선만이 그에게 돌아갔다. 그의 대표팀 재발탁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두 번째 해외진출 실패와 음주파동 이후 1년 여, 그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화끈하게 부활했다. K리그 정규리그 2009시즌에서 16경기 14골. 경기당 득점이 0.9골에 이른다. 처음에는 그의 부활에 냉소를 보냈던 언론과 팬도 그의 활약이 두 달 이상 이어지자 ‘대표팀에서의 마지막 기회를 주자’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난 3일, 허정무 감독은 그에게 ‘마자막 승부’를 걸어볼 기회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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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나이로 서른 한 살. 다른 해외 스타플레이어들이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할 나이에 그는 다섯 번째 기회를 얻었다. ‘서른 즈음에’ 찾아온 기회 앞에 그는 비장하다.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겠다”고 그는 다짐을 밝혔다. “같은 팀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라며 성숙한 모습도 보였다.

너무 일찍 스타가 된 바람에 그는 이미 ‘한물간’ 선수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보면 그는 분명 올해 그의 축구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2002월드컵 직후 황선홍 현 부산 감독은 “내 뒤를 이을 후계자는 이동국”이라고 공언했다. 황선홍 감독 역시 숱한 비난에 시달리다 선수 생활 막바지에 한국을 월드컵 4강으로 이끌며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런 그가 후계자로 여긴 이동국 역시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표팀의 기둥으로 다시 우뚝 설 수 있을지, 모든 축구팬들의 관심은 지금 이동국 이름 석 자에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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