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람항로', 가벼운 미소녀 뒤에 숨은 무거운 역사의식

이덕규 객원기자 / 입력 : 2018.05.23 12:11 / 조회 : 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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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함선 모에화 슈팅 게임 ‘벽람항로.


3월 26일, 마침내 한국에서도 정식으로 서비스를 개시한 ‘벽람항로’는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세계 각국의 유명 함선들이 ‘모에화’(의인화)해서 등장하는 모바일 슈팅 게임입니다. 그런 만큼 아무래도 우리나라 게이머들에게는 다소 껄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구 일본 제국 해군(일본 해군) 소속의 함선들 역시 다수가 ‘미소녀’로 모에화돼서 등장하죠. 스테이지나 이벤트 등 게임 곳곳에서는 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이 활약한 유명 전투나, 여러 에피소드에서 파생된 다양한 요소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 말했으면 아직 게임을 해보지 않은 게이머들은 괜한 걱정이 들 것입니다. 혹시 이 게임. ‘벽람항로’는 무분별하게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 해군을 미화하고, 소위 ‘우익’ 이라고 말하는 요소들이 가득한 그런 게임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NO”입니다. 물론 일본에 서비스 하는 게임인 만큼 다소 미묘하게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는 부분도 있으며, 이 기사 마지막에서 언급하듯 걱정되는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누가 중국에서 만든 게임 아니랄까봐) 곳곳에 “아니, 일본에서도 서비스하는 게임인데 이렇게까지 해도 돼?” 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일본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역사적 요소들이 많이 있죠.

메인 시나리오에서의 일본은 ‘악역’

게임은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각 국가들이 연합해서 설립한 군사 조직 ‘벽람항로’가 미지의 적 ‘세이렌’에 맞서 싸운다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벽람항로에 소속되어있던 ‘메탈 블러드’(독일에서 모티브를 따온 가상 국가)와 ‘사쿠라 엠파이어’(일본에서 모티브를 따온 가상 국가)가 모종의 이유로 배신을 해서 ‘적색중축’ 이라는 별개의 조직을 형성하고, 세이렌이 아닌 인류. 즉 벽람항로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이죠. 이에 벽람항로 소속인 지휘관(=플레이어)은 적색중축의 공격을 막고 반격에 나서는 내용입니다.

게임의 악의 축으로 나오는 ‘사쿠라 엠파이어’는 명백히 일본을 상징합니다. 플레이어가 물리쳐야 하는 ‘적’으로 설정되어있죠. 게다가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는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군의 행적을 거의 그대로 오마쥬해 구성해 놓았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메인 스테이지 1부터 바로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삼고 있으며, 스테이지 2는 산호해 해전. 그리고 스테이지 3는 미드웨이 해전을 소재로 삼고 있죠. 즉 ‘일본군 패배의 역사’ 그대로 게임 내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됩니다.

일본이 적으로 나오는 만큼 당연하게도(?) 정의의 플레이어 측(=벽람항로)에서는 미국이 주축이 되어 활약합니다. (게임에서는 ‘이글 유니온’ 이라는 가상 국가로 등장) 그리고 실제 태평양 전쟁 초기에 미국의 수호신으로 맹활약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 3자매(네임쉽 요크타운. 2번함 엔터프라이즈. 3번함 호넷)는 거의 주인공 대접을 받을 정도로 시나리오에서 맹활약하죠.

덕분에 일본군 함선 캐릭터들은 메인 시나리오가 진행 될수록 말 그대로 펑펑 터져 나갑니다. 이렇게 신나게 터져 나가는 일본 함선 캐릭터들을 보면 과연 이 게임이 일본에서 장사를 할 생각이 있는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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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 등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 저 깔고 앉아있는게 핵폭탄이라는 설정.


아주 죽이는 ‘핵’이다…

이밖에 벽람항로는 태평양 전쟁 동북아 국가들이 민감해 하는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우선 손꼽을 수 있는 건 바로 일본에 있어서는 금기와도 같은 ‘핵폭탄’

가령 게임에 등장하는 SR 등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의 경우, 캐릭터 일러스트를 보면 무언가 깔고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 깔고 앉아 있는 물체에 다름 아닌 ‘핵폭탄’ 마크가 찍혀 있습니다. 이는 실제 인디애나폴리스 함선이 2차 세계대전 때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핵폭탄인 ‘리틀보이’와 ‘팻맨’의 부품을 운송한 일화에서 따온 것이죠.

참고로 이 인디애나폴리스 캐릭터는 게임 접속 이틀차에 누구에게나 배포하는 함선이며, 성능도 준수해서 초반부에 추천되는 캐릭터입니다. 게임 개발사는 이런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캐릭터에 일본이라면 그야말로 ‘치를 떨만한’ 요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현해 놓은 ‘패기’를 보인 것이죠.

핵 뿐만 아니라 게임은 ‘캐릭터’ 쪽을 살펴봐도 일본 입장에서는 다소 껄끄럽다고 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가령 이 게임에서 ‘보석’(현금재화)을 구매하면 누구에게나 공짜로 주는 미국 렉싱턴급 항공모함 ‘새러토가’의 전투시 대사를 보면 "엊그제는 류조, 어제는 치토세, 오늘은 너희들이네?" 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는 실제 1942년 있었던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 새러토가가 일본군 항공모함 류조를 격침시키고, 수상기모함 치토세에 큰 피해를 준 일화에서 따온 것이죠. 당연히 일부 민감한(?) 일본 게이머들 입장에서는 심히 불편해할 수 있는 요소지만, 지금도 새러토가의 이 대사는 중국, 일본, 한국 서버 모두 동일하게 적용 되어있죠.

일본에서 잘 나가는 게임의 어쩔 수 없는 한계

이렇듯 벽람항로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더불어 일본의 함선에서 따온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하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일본 만세’와는 한 2억km 정도 동떨어진 면모를 보여줍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면모를 보고 있자면 당장 일본에서 이 게임의 규탄시위가 왜 벌어지지 않는 것인지 (한국인 입장에서는) 신기할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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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지난해 11월 진행된 이벤트를 통해 추가된 일본 전함 미카사. 문제는 미카사가 주역으로 등장한 이 이벤트의 내용을 보면 정신력이니 근성이니부터 시작해 심각하게 우익적 색채가 강했다는 것. 이 이벤트가 수정 없이 그대로 한국에서 똑같이 열린다면 지옥문 오픈 확정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과는 다르게, 최근 들어서 벽람항로는 일본에서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했기 때문인지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 문제나, 일본 쪽에서 껄끄럽거나 예민하게 여겨질 만한 소재들을 최대한 피하고 있습니다.

가령 게임의 메인 시나리오는 분명 초반부에는 ‘일본을 공격한다’ 급으로 신명 나게 일본 함선을 두들겨 패는 내용인데. 중반 이후 어느 순간부터는 시나리오가 갑자기 사라지죠. 그러니까 메인 시나리오라고 해서 분명 태평양 전쟁의 주요 해전을 배경으로 하는 챕터가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기는 하는데, 그 챕터를 플레이해보면 시나리오가 없거나 혹은 대충 배경만 설명되고 넘어간다는 식이죠. 이 때문에 한국인 입장에서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국의 대역전을 사실상 확정 지은 필리핀 해전.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레이테 만 해전 등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보고 싶겠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벽람항로에서는 이에 대한 기약이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메인 시나리오와 별개로 비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이벤트의 경우에는 최근 들어 노골적인 ‘일본 만세’ 요소가 담긴 이벤트들이 개최된 바가 있기 때문에. 과연 이러한 이벤트들은 한국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벌써부터 걱정이네요. 아무래도 2차 대전 동북아 역사를 소재로 한 내용에선 일본보다 한국이나 중국 쪽이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죠..

물론 벽람항로는 한국에서는 이제 막 오픈한 게임입니다. 그리고 개발사에서는 한국에 맞는 서비스와 현지화를 공헌한 상태죠. 그 예로 ‘한산도’, ‘명량’, ‘노량’ 등 한국 서버 이름을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키신 이순신 장군의 유명 해전에서 따왔습니다. 한국 유저들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제작진의 깨알 같은 배려죠. 그런 만큼 지금 당장은 걱정보다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기대하며, 게임의 행보를 주목해보는 것이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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