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미술과 미술 같은 영화

[스크린 뒤에는 뭐가 있을까](6)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입력 : 2017.12.06 10:00 / 조회 : 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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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열정의 랩소디' 스틸컷


네덜란드의 후기인상파 화가 고흐(Vincent van Gogh, 1853 ~ 1890)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로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가 있다. 고흐는 커크 더글러스가, 고흐의 친구였으나 라이벌이 된 고갱은 안소니 퀸이 연기했다. 안소니 퀸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커크 더글러스는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에는 고흐의 작품이 약 200점 등장하는데 모두 사진판을 확대한 것이다.

연전에 한 가전제품 회사의 광고가 고흐를 포함해서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간단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활용한 적이 있다. 광고효과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시도였는데 원작자들이 광고를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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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러빙 빈센트' 스틸컷


얼마 전 국내에서 개봉된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2017)는 고흐의 생애와 그 수수께끼 같은 죽음에 초점을 맞춘 영화인데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최초의 유화 애니메이션 영화다. 고흐 스타일로 115명의 화가가 모두 6만5000 프레임을 유화 캔버스에 그려 제작했다. 이 화가들은 온라인에서 공모에 응한 5000명 중에서 선발했는데 자기 스타일이 없는 평범한 화가들을 뽑았다고 한다. 모두가 고흐의 모사화가 역할을 한 셈이다. 완성된 그림을 필름에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아서 6만5000의 프레임 중 실제 영화에 활용된 것은 약 1000개다. 스토리 전달은 다소 미흡하지만 환상적인 비주얼을 관객들에게 제공한다. 특히 고흐의 팬들에게는 큰 선물이라 할 만하다. 고흐의 모든 그림을 ‘확장판’으로 대형 스크린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영화 제작을 위해 이렇게 남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지만 화가들은 훈련 목적으로 남의 그림을 모사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정말로 남의 그림 스타일을 그대로 익혀서 마치 원작처럼 만들고 원작처럼 판매하는 전문 모사꾼들이 있다. 이 미술품 위조범 모사화가들이 영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미술품 절도, 보험사기도 같이 다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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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스틸컷


피어스 브로스넌과 르네 루소의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The Thomas Crown Affair, 1999)도 그 중 하나다. 이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그림들은 다 모사품이나 복제품이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촬영하려고 했는데 정중히 거절당하고 자체 미술관 세트를 지어서 촬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명화인 모네의 '황혼에 물든 베니스의 산 죠르조 마기오레 성당'(San Giorgio Maggiore at Dusk)도 물론 복제품이다. 원본은 영국 카디프의 웨일즈 국립미술관에 있다.

'인사이드 맨'(Inside Man, 2006)의 거의 끝에 덴젤 워싱턴이 맨해튼은행 은행장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집무실로 쳐들어간다. 그런데 DVD를 잘 보면 황당한 소품 하나가 그 사무실에 놓여 있다.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The Card Players)이다. 보안액자에 담겨 벽에 걸려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젤에 얹혀 있다. 이 그림은 2011년에 최소 2억 5000만 달러에 팔린 것으로 알려져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팔린 그림의 기록을 세웠다. 3억 달러설도 있다.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플러머는 나치 부역 부분만 빼고는 록펠러를 모델로 한 것 같은데 록펠러가 모사품을 사무실에 둘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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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빅 아이즈' 스틸컷


모사가 아닌 '차명화가'를 소재로 한 영화도 있다. 내가 그린 그림이 남의 작품으로 발표되지만 그 덕분에 돈을 많이 벌게 되고 잘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할까? 더구나 그 그림을 내가 그렸다고 하면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남이 그렸다고 해서 잘 팔린 것이라면? 팀 버튼 감독의 '빅 아이즈'(Big Eyes, 2014)다. 과장된 크기로 그린 큰 눈을 가진 아이들을 주로 그리는 여류화가가 주인공이다(할리우드에는 눈이 가장 큰 여배우 엠마 스톤이 이 영화의 모델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실존인물인 미국화가 마가렛 키인(에이미 아담스 분)은 남편인 월터 키인(크리스토프 월츠 분)의 이름으로 평생 그림을 그려 '성공'했지만 결국에는 모든 그림이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세상에 밝힌 후에 남편과 소송을 벌인다. 실제로 키인의 작품들은 매우 높이 평가받는다.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에도 소품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권력이나 돈이 아니라 바로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라는 경제학자 로버트 쉴러의 말을 증명해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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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우먼 인 골드' 스틸컷


미술품 한 점이 주인공인 영화는 헬렌 미렌과 라이언 레이놀즈가 나오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 2015). 한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미국 여성이 2차 대전 때 나치가 강탈해 간 가족의 미술품을 되찾는 이야기다.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1907년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이다. 미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 간 실제 소송사건을(Republic of Austria v. Altmann, 2004) 기초로 했다.

나치는 전쟁 때 유럽 곳곳에서 미술품들을 강탈하거나 파괴했다. 히틀러는 거대한 박물관과 미술관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괴링은 사사롭게 미술품을 약탈, 수집했다. 수괴들이 이랬으니 명령계통 아래로 내려오면서 전 지휘관들이 크고 작게 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모뉴먼츠 맨'(The Monuments Men, 2013)에서는 일단의 역사가와 건축가들이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발생한 나치의 미술품을 포함한 문화재 파괴 책동을 막는다. 조지 클루니와 맷 데이먼, 케이트 블란쳇이다. 오래된 영화들 중에서는 나치가 약탈한 미술품을 수송하는 기차를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탈취하는 이야기인 '대 열차 작전'(The Train, 1964)이 볼 만하다. 로튼 토마토 신선도가 100%다. 실화를 기초로 했다(Train No. 40044). 버트 랭카스터가 레지스탕스다.

미술품들이 등장하는 정도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한 폭의 미술품 같은 영화들이 있다. '마르셀의 여름'(My Father's Glory, 1990)이라는 프랑스 영화도 그 중 하나다. 여러 장면들이 마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영화다. 1900년에서 1914년 사이를 그리고 있어서 고풍도 근사하다. 남 프랑스에서 찍었다. 나의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 1위인 곳이다. 남 프랑스는 무수히 많은 영화의 촬영지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의 '버킷리스트'(The Bucket List, 2007)에도 잠시 나온다. 깐느 영화제가 열리는 깐느와 니스가 바닷가를 따라 펼쳐지고 고르드와 생-폴 같은 그림 같은 마을들이 라벤더 밭 속에서 멋지게 나타난다. 아를에 가면 고흐가 '밤의 카페 테라스'(Cafe Terrace at Night)를 그린 바로 그 카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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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컷


랄프 파인즈와 틸다 스윈튼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도 모든 장면들이 잘 그려진 회화와 같다는 평을 받은 감각적인 스타일과 색채 위주의 영화다. 2015년 아카데미 미술감독상과 의상상을 받았다.

영화가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세월이 지나봐야 알겠지만 미술이 영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기서 거론한 영화들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영화 제작자들과 감독들은 미술의 세계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창의적인 것들은 항상 서로 영향을 미친다. 서로 자극이 되고 서로 배운다. 영화와 미술도 같다. 양자 모두 색채와 빛을 깊이 탐구하는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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