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릴 스트립

[스크린 뒤에는 뭐가 있을까](5)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입력 : 2017.11.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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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 스트립 /AFPBBNews=뉴스1


"캘리포니아 주의 현행 법률에 따라 메릴 스트립이 여우주연상 후보로 선정되었습니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영화를 봤건 안 봤건 메릴 스트립을 여우주연상 후보로 선정합니다~!"


"메릴 스트립은 여우주연상 후보로 가장 많이 선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장 많이 탈락한 배우입니다~!"

할리우드에서 이론의 여지없이 가장 탁월한 여배우 메릴 스트립(Meryl Streep)은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항상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소개된다. 아카데미상에서만 20회 후보로 선정되었다. 2014년 사회자 엘렌 드제너러스는 "결국 상을 못 받는 해가 더 많았는데 괜히 후보가 되어서 쓸데없이 의상하고 메이크업에 그 동안 돈이 얼마나 들어갔을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스트립은 로버트 드니로의 눈에 띄어 '디어 헌터'(The Deer Hunter, 1978)에 출연했는데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면서 화려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드니로는 스트립의 멘토였다. 특히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에서 드니로가 보여준 연기가 스트립에게는 교범이 되었다. 메릴 스트립은 1979년 작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Kramer v. Kramer)로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았다(오스카를 화장실에 두고 잊어버린 일화가 전해온다). 이는 스트립 최고의 작품인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 1982)으로 이어진다. 당연하지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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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소피의 선택' 스틸컷


'철의 여인'(The Iron Lady, 2011)으로도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나는 역시 '소피의 선택'이다. 스트립의 상징인 다재다능성과 언어 구사 능력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영어와 독일어를 폴란드어 액센트로 구사하고 폴란드어 실력도 선보였다. 어린 딸과 아들 중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지를 즉흥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엄마의 선택. 너무나 소름끼치는 플롯이어서 스트립은 딱 한 번의 테이크로 끝냈다고 한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이런 것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1985년에 스트립은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로 할리우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나는 독일 유학 시절에 독일 친구들의 초대로 본(Bonn)에 있는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맨 앞줄에 앉아서 보았기 때문에 존 배리의 장엄하고도 서정적인 음악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영화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제대로 다시 보았다. 스트립은 실존 인물인 주인공 카렌 블릭슨의 음성 녹음을 장시간 반복해서 듣고 구식이고 귀족적인 말투를 재현해 냈다. '철의 여인'에서 태처 수상의 목소리와 말투를 그대로 재현한 것과 같은 노력이다. 스트립은 이 영화에서의 연기로 할리우드 비평가들에게 당대 최고 수준의 연기력이라고 칭송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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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스틸컷


스트립은 진지한 연기뿐 아니라 코믹 연기에도 뛰어나다. 알렉 볼드윈, 스티브 마틴과 함께 나왔던 '사랑은 너무 복잡해'(It’s Complicated, 2009), 휴 그랜트, 사이몬 헬버그와 함께 나온 '플로렌스'(Florence Foster Jenkins, 2016) 같은 영화들이다. 젊은 세대가 특히 좋아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The Devil Wears Prada, 2006)와 아바 음악의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 '맘마미아'(Mamma Mia! The Movie, 2007)도 스트립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프라다'에서 보여 준 스트립의 연기는 최고 중의 하나로 꼽힌다. 20세기폭스에 출연료를 두 배로 요구해 관철시켰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메릴 스트립은 호텔 여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로스쿨에 지원했었다. 그러나 면접 날 시계 알람 소리에도 잠을 깨지 않아서 결국 로스쿨을 포기했는데 이것을 하늘의 뜻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예일대학교의 드라마스쿨에 진학했다.

하버드대학교는 2010년에 수터(David Souter) 연방대법관을 포함한 아홉 사람과 나란히 뉴 해이븐에 있는 '애매한 학교'(예일대학교를 말한다. 하버드와 예일은 항상 서로를 애교있게 깎아내리는 풍습이 있다)를 졸업한 메릴 스트립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올해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007의 'M' 주디 덴치와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의 목소리 제임스 얼 존스를 포함하면 배우로는 스트립까지 모두 3인이 학위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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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세실 B 데밀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메릴 스트립 /AFPBBNews=뉴스1


스트립은 2017년에 골든글로브 '세실 B 데밀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 수상식에서 스트립은 트럼프행정부 초기에 발생한 온갖 논란거리 중 한 가지를 언급하면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전 미국이 떠들썩해졌다.

"우리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장애가 있는 기자를 조롱하듯이 흉내 낸 일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 기자보다 훨씬 힘이 있고 영예로운 위치에 있어서 그 기자는 그 분과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 일은 영화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분의 지위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은 행동을 해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진 것이나 같습니다. 무례는 무례를 유발합니다(Disrespect invites disrespect).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Violence insights violence). 막강한 지위가 다른 사람을 못살게 구는 데 이용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내 친구 레아 공주(캐리 피셔를 말한다. 스트립은 피셔 딸의 대모이다)가 언젠가 말했듯이 우리 배우들은 상심한 마음을 예술로 승화시켜야 합니다(Take your broken heart, make it into art)."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은 그런 행동을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고 메릴 스트립이 힐러리 클린턴 열혈 지지자임을 지적하면서 '과대평가된 여배우'(overrated actress)라고 폄하했다. 스트립은 2016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클린턴 지지연설을 했었다. 그러자 그 해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사회자 지미 킴멜은 스트립을 '과대평가된 여배우 메릴 스트립'이라고 소개해서 좌중의 폭소와 참석자 전원의 열렬한 기립박수를 이끌어 냈다.

부친이 지어낸 이름인 '메릴'을 지독히도 싫어했다는 메릴 스트립은 영화계에서의 위치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사는 데 성공했다. 배우로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영역에서는 겸손하고 일에는 항상 최선을 다하는 노력형 스타다. 첫 번째 파트너였던 배우 존 카잘을 암으로 잃은 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고통과 상실감'을 안은 채 지금의 배우자인 조각가 돈 커머와 결혼해 네 자녀를 둔 '평범한' 엄마다. 커머는 매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스트립의 옆자리에 앉아 매우 멋쩍어하는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트립의 아우라는 그런 사적인 평범함과 겸손이 최고의 프로정신과 결합되는 데서 발산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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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 스트립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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