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칼럼]오디오와 인생⑩

이광수 / 입력 : 2013.12.20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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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들어 중동 열풍이 온 나라에 불고 있었다. 특별한 하자가 없고 젊고 건강한 사람이면 누구나 갈 수가 있었다. 나도 D 회사에 이력서를 가지고 찾아가서 제출하고 간단한 면접을 한 뒤 2주 후 교육을 받고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외국에 안가면 안 되냐고 나에게 말했다. 애들 셋 하고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조금씩 벌어서 적게 쓰고 살자면서... 안 갔으면 좋겠다고 거듭 말했다. 나는 아내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했다. 사실 나도 마음 한 구석에는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결혼을 해서 아이들이 셋이나 있고 보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가기로 하긴 했지만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그래서 더욱 아내의 말에 마음이 쏠렸다.


그러고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청계천에 있는 한 다방에서 좀 만나자는 것이다. 나는 무슨 일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사람과 만났다. 그의 말이 내가 만든 앰프를 들어봤는데 자기에게도 앰프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고민에 빠졌다. 외국에 나가는 문제가 정리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그 사람과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면접 볼 때 생각과 아내의 말이 교차해 생각이 난다. 특히 내 특기가 전자, 전기라고 쓴 이력서를 본 면접관이 꼭 가라고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나는 결정을 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스피커는 어느 것을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L65 JBL 스피카를 쓴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211 출력관으로 앰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그 관에 대한 소리와 특징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면서 주문을 했다.


그 사람을 만나고 한 달이 훨씬 지나서 앰프가 만들어졌는데... 211 싱글 스테레오로 만들어진 이 앰프는 넓이가 60cm나 되고, 무게는 30kg이 훨씬 넘는 대형 앰프였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것을 넘겨주었는데, 내가 사용하던 라인부만 있는 프리 앰프도 같이 주었다. 앰프를 만드는 동안 내가 들어가기로 했던 회사에서 두 번이나 통지가 왔다. 나는 간단한 내용을 적어 갈 수 없는 사정과 죄송하다는 내용으로 엽서를 보냈다.

그 후로 나는 이 앰프를 여러 대 만들었다. 그리고 몇 사람들에게 주었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211 앰프는 잘 손대는 사람들이 없어서 내가 만들었던 211 앰프가 몇몇 애호가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내가 이연구소를 하기 전에 만들어진 그 앰프들은 다 어디 숨어 있는지... 누가 내놓으면 하나 구하고 싶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새로운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갖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나씩 하고 있었다. 친구 중에 종로에서 같은 업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한테 같이 장소 좀 물색해 보자고 하면서 찾은 곳이 동인천역 앞에 있는 인현동 길이었다.

그 친구 도움을 받아 실내를 꾸미고 간판도 달고 해서 일주일 만에 내부를 마쳤다. 둘이서 지혜를 짜서 하느라고 했다. 앞에 스피커가 놓여지고, 박스 안에 레코드와 기계들이 자리를 잡고, 테이블과 의자들이 들여지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이렇게 영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딘지 미흡한 데가 조금씩 있어 어설픈 연출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시간이 지나며 손님이 조금씩 늘어나고 사업장은 차차 안정되어갔다. 시작한 지가 꽤 되었다. 이제는 정자와 내 여동생도 기계를 능숙하게 잘 다루고 둘이 선곡도 잘해 분위기에 맞는 음악과 손님이 신청한 레코드를 잘 선별해서 틀어준다. 내 동생과 동갑내기인 구정자는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는 여자로 손님으로 매일 오다가 우리와 친해져 우리 일을 많이 도와 줬던 사람이다. 혹시 이 글을 보면 연락 좀 했으면 좋겠다.

음악실을 했을 때 추억이 있다. 70년대까지는 공산권 나라의 작곡가 음악을 마음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손님 중에 러시아 작곡가 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 음악실에서 몇 사람이 같이 들었다. 밤이면 문을 잠그고 들었다. 나는 쇼스타코비치 곡을 카셋트에 녹음해 놓고 자주 들었다.

취미가 직업이 되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 같다. 내가 전공한 그 일을 놔두고 왜 취미인 것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었나. 음악실이 그렇게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수고와 시간의 대가에는 너무도 못 미친다. 나는 또 다른 구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광수 메타뮤직사운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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