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칼럼]오디오와 인생⑨

이광수 / 입력 : 2013.12.13 08:54
  • 글자크기조절
image


훈련소에서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병과 훈련을 받는 후반기 교육에서 나는 보병 병과로 배정되어 교육을 받았다. 전반기 때 훈련을 받은 영향일까,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1000인치 사격할 때처럼 오고가며 받는 고된 훈련도 없었다. 교육이 끝나고 자동소총 사격시험을 보는 날이 돌아왔다. 조교의 지시에 따라 조를 이뤄 사격장에 들어서서 사격 시험을 쳤다. 전 중대 사격이 다 끝이 났다. 다른 훈련병들은 모두 이곳을 떠났는데, 나는 하루를 기다렸다가 2주간의 교육을 더 받아야 했다. 사격 점수가 모자라서 유급을 당한 것이다. 다음 기수 훈련병들과 내무반 생활을 할 때 내가 유급 당했다는 것을 알고 고문관이라 놀려대고 왕따를 시키며 나를 힘들게 했다.

2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사격 시험이 다시 돌아왔다. 조교의 지시에 따라 먼저와 같이 총을 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도 점수가 안 나와 또 떨어졌다. 내가 유급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조교가 또 떨어졌냐는 듯 민망하게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마음속으로 나도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서있는 동안 조교는 내 총 탄창에 실탄을 넣고 타겟을 향해 시험 사격을 하였다. 그런데 확인을 해 보니 조교는 나보다 점수가 더 안 나왔다. 나중에 총을 검사한 결과 총열 끝에 있는 가늠쇠가 놀아 총을 쏠 때마다 움직여 조준이 안 되었던 것이었다.


교관과 조교들이 잠시 모여 의논하더니 나에게 와서 다른 훈련병의 총을 가지고 다시 사격을 하라고 해서 나는 혼자만 사격장에서 사격을 했다. 이 일 때문에 훈련병들은 추운 교육장에서 30분이나 넘도록 기다려 있어야 했고 그날 저녁식사는 30분이나 늦게 먹게 되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 훈련을 마치고 내가 보병 제30사단에 도착할 때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몽우리져 있었고 논에서는 농부들이 흙을 갈아엎는 쟁기질이 한창일 때였다. 나는 사단 본부중대 3소대에서 초병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근무하게 된 부서는 정훈부였는데 정훈참모님과 보좌관 그리고 사병 3명 모두 5명이 근무하는 조촐한 사무실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제대 할 때까지 근무를 했는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분야와 함께 일과를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었다. 간간이 내가 좋아하는 음악도 들을 수 있어서 더욱


다행스러웠다. 정훈부 안에는 조그만 방송실이 있는데, 이곳은 새벽 4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각종 신호나팔 방송과 함께 공지사항 등을 알리고 정오부터 1시까지는 KBS 제1방송을 내 보내는 조그만 방송실이다.

장비로는 AM 튜너가 내장된 6CA7 푸쉬풀(push pull) 앰프와 릴 녹음기 3대 그리고 16mm 벨(bell) 영사기 2대 등이 있었는데, 주 방송용 앰프인 6CA7 앰프가 자주 고장이 나서 많은 불편을 겪어 왔다고 했다. 이 앰프는 무척 오래된 앰프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는 그림이 오른쪽 상단에 붙어 있는 낡아질 대로 낡아진 기계였다.

나는 이 기계의 노후된 부품들을 다 걷어내고 새 부품으로 모두 교체해서 새 것과 같은 성능을 가진 앰프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 사무실에서는 나와 같은 특기를 가진 사병을 받으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잘 되지를 않았고 이번에 새로 받은 이등병(본인)도 병과가 보병이어서 애초부터 기술 쪽에는 기대도 안 했다고 보좌관이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도 작대기가 3개인 상병 계급을 달게 되었다. 참모님께서는 전역을 하시게 되었고 보좌관은 진급해서 다른 부대로 가셨다. 새 참모님과 보좌관님이 부임 하시고... 밑으로도 신참이 들어오고... 또 선임 고참병은 제대하여 떠나고...서로 얼굴을 익히기도 전에 우리 정훈부에 큰 사건이 터졌다. 11시45분에 일과 끝 신호를 내 보내고 12시 KBS 정오 뉴스 방송을 틀어놓고 식사를 하러 갔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내무반 동기들이 주번 사령실에서 나를 긴급히 찾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다. 사단 내에 이북 방송이 확성기를 통해 퍼져 나가고 있었다. 틀림없이 KBS 제1 방송에 사이클을 고정해서 모니터로 방송 확인까지 했는데...(북한은 710Kc/s 바로 밑에서 방해 전파를 남한을 향해 쏘고 있으며 710 위 근처에서는 북한 방송을 내 보내서 주파수를 잘못 맞추면 KBS와 북한 방송이 섞여 나오도록 교묘하게 KBS 방송을 방해하는 전략을 쓰고 있음)

나는 영창 또는 전출대기 등 여러 가지 경우를 열어 놓고 참모님께 기계를 점검해 원인을 찾아보겠노라고 말씀 드리고 허락을 받아 기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튜너부의 국부발진 회로와 IFT회로를 중점적으로 점검했다. 그리고 나는 고장 난 곳을 발견했다. 국부 발진회로(osc)와 연계된 바리콘이 병렬로 붙어있는 트리머 콘덴서가 불량이 되어 있었다. 이 트리머 때문에 주파수가 틀어져서 이북의 대남 방송이 흘러 나왔던 것이다.

나는 참모님께 사실을 말씀 드리고 처분대로 따르겠다고 말씀 드렸다. 며칠이 지나서 나는 사단 사령부 부관실에 가서 시말서를 쓰고서 이 사건에 대하여 종결을 받을 수가 있었다. 이 일 후 나는 병영에서 말수가 적어졌으며 모든 업무에 더 신중해지고 외출도 가급적 자제했다. 그리고 사단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하던 올겐 반주도 그만 두었다.

정훈부 사무실에는 할 일들이 많이 있다. 시간 맞춰 방송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고 시내 나가서 정훈 신문 수령해오는 일, 차트 작성해서 교육자료 만들어야 하고 육군본부와 미 문화원에 가서 필름 수령해서 사단과 예하 부대 장병들에게 영화 상영 해 주는 일 등 인원 5명이 항상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중대에서는 내무 생활과 함께 각종교육, 사역, 취침 전 받는 점호까지 조금도 쉴 틈과 여유 없이 매일의 일과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는 김신조가 넘어 왔던 때여서 교육과 경계가 더 강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33개월의 시간이 지나갔고 나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를 하게 되었다.

나는 군을 떠나면서 훈련병 시절 조교들에게 받았던 도전을 회상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훈련병들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를 유지하고 훈련시키며 교육하고 낙오자는 부축하여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게 같이 구령하며 같이 뛰어주고, 자기가 맡은 훈련병들을 책임을 다하여 열심히 교육시켜 훈련소를 내 보내는 조교들...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나는 훈련을 받는 동안 조교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그 추운 겨울 고된 훈련을 이겨 낼 수가 있었으며 마음에 계속 도전을 받으며 훈련을 마쳤다. 사실 나는 같이 교육을 받은 훈련생들보다 평균 나이가 여섯 살이나 더 많았다. 그럼에도 오리걸음이나 완전군장 하고 뛰는 구보나 어떤 교육을 받던지 뒤지지 않았는데, 이는 조교들이 나에게 준 영향이 매우 컸었다. 그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또 생각나는 것은...내가 유급을 당하지 않았으면 어느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을까? 이제 군 생활을 마감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게 기쁘지 않은 건 왜일까 ?

/이광수 메타뮤직사운드 대표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