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나랏말싸미' 귀한 볼거리와 좋은 화두 ①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9.07.16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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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의 떳떳한 말을 들어주지 못해 내가 부끄럽다. 너희는 너희의 일을 해라. 나는 나의 일을 하겠다." '나랏말싸미'가 던진 화두다.

왕이 기우제를 지낸다. 단비를 내려달라 조선의 천지신명에게 빈다. 조선의 왕 이도(세종대왕)는 "유세차"라면서 한문으로 축문을 읊는 제관에게 "조선의 신령이 그렇게 해서 알아 듣겠냐"며 "우리말로 하라"고 한다. 그리고 비가 온다.


왕은 평생 만든 책들을 빗속에 던져버린다. 백성들을 위해 갖가지 책을 만들었으나 한자를 읽지 못하는 그들에겐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이라며 탄식한다. 우리말을 담는 우리글을 만들려 했으나 아무 진전이 없어 조바심만 난다.

그런 차에 일본에서 한 무리의 스님들이 온다. 팔만대장경 원판을 주겠다고 한 선왕의 약속을 지키라고 주장한다. 어차피 유교의 나라에서 쓸모없는 대장경 원판이니 자신들이 잘 간직하겠다고 말한다. 신하들은 이참에 불교 경전 만들 때 쓰는 나무 쪼가리를 일본에 줘 버리자고 한다. 왕은 "우리의 보물이요, 여전히 불교 믿는 백성들의 보물이요, 우리에게 쓸모없다고 한들 저들에겐 보물이 돼 큰 힘을 발휘하면 후일에 어찌 될지 모른다"며 답을 미룬다.

왕의 비는 큰 스님에게 도움을 청한다. 왕의 비는 자신 때문에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자 불교로 마음에 위로를 받아온 터. 대장경 원판을 지키던 해인사에서 꼴통이라 불리는 신미 스님이 제자들과 찾아와 일본 스님들을 범어(산스크리트어)로 물리친다.


왕은 신미 스님이 어학에 빼어난 능력을 갖고 있단 사실을 알아차린다. 범어에 뿌리내린 다양한 소리 문자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말을 담을 소리문자를 만들어달라"고 손을 내민다. 신미 스님은 고개를 젓는다. 유교 나라 조선에서 개 취급받는 불교의 스님에게 무슨 도움을 받으려 하냐며 오히려 다그친다. 그러다가 신미 스님은 불교를, 불법을, 우리글로 손쉽게 백성에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는 왕의 비 말에, 왕이 내민 손을 잡는다. 그렇게 유교 나라 왕과 불교 스님이 우리글을 만들려는 비밀 작업이 시작된다.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스님인 신미의 도움을 받았다는 이설을 바탕으로 영화적인 상상력을 더해 만든 작품이다. 물과 기름일 수 있는 두 사람을 왕의 비인 소헌왕후가 이끌었다는 설정을 더했다. 그러니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 비화를 다루는 영화이자 관계의 이야기다.

'나랏말싸미'는 고정관념의 전복을 꾀한다. 한국역사의 슈퍼스타이자 초인왕인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상식을 비튼다. 기획하고 지시하고 이끌고 배포한 공은 왕의 것이요, 문자를 만든 공로는 스님의 것이라고 정의한다. 상식의 배반은, 상식의 분노를 이끈다. 당대에 유자들이 한글을 반대하고 분노한 것도 상식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나랏말싸미'가 전하는 이 상식의 배반을 지금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영화의 첫 번째 통과의례가 될 것 같다.

'나랏말싸미'는 정통사극이다. 오늘에 할 말을 과거에 빗대 이야기한다. 옳은 말이 언제나 옳은 방법은 아니다. 떳떳한 말을 하기는 쉬우나 맞는 일을 하기란 어렵다.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의 말을 빌어 오늘에 이야기한다. 공맹의 도를 중화의 글인 한자로 논해야 하는 게 마땅한데 어찌 오랑캐처럼 새로 글을 만들려 하냐는 신하들의 반대에 세종대왕은 "너희들의 떳떳한 말을 들어주지 못해 내가 부끄럽다"면서도 "너희는 너희의 일을 해라. 나는 나의 일을 하겠다"고 말한다.

들을 줄 아는 리더,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을 알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지도자. 중국을 넘는 문화대국이 되고자 하고, 모든 정보를 백성과 나누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는 군주. '나랏말싸미'는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이 가려지진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의 외로움을 도드라지게 그려 그의 위대함을 더 크게 만든다. 이 정통사극의 작법이 '나랏말싸미'의 두 번째 통과의례다.

'나랏말싸미'는 관계의 영화다. 다 끌고 가려다 끝내 속병을 앓는 왕. 그런 왕에게 할 말 다하는 스님. 그런 둘을 어우르고 이끌고 감싸는 소헌왕후. 셋의 관계가 돌고 돌아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영화 속 대사처럼 "주인도 나그네도 없고, 주인 돼 떠나가는 나그네가 있을 뿐"이란 깨달음을 준다. '나랏말싸미'의 세 번째 통과의례다.

'나랏말싸미'는 이 세 가지 통과의례 속에 귀한 볼거리를 담았다. 한국영화 최초로 해인사 장경판전을 담았다. 경복궁 근정전을 담았다. 부석사 무량수전을 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귀한 볼거리를 아는 만큼 감동도 클법하다. 조철현 감독은 '나랏말싸미'에 귀한 볼거리와 한글 창제의 숨은 뜻, 그리고 오늘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

세종대왕을 연기한 송강호는 감정을 마지막까지 꾸욱 눌렀다. 발성도 이전과 다르다. 카랑카랑하지 않으며 동굴음처럼 모았다. 풍채도 불렸다. 그는 그만의, 다른 세종을 만들었다. 신미스님을 맡은 박해일은 꼴통이지만 정통한 스님 같다. 마치 선(禪)의 초입에 들어선 것 같다. 소헌왕후를 연기한 고 전미선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연기로 보여줬다. 왕의 비를 넘어 동지이자 또 다른 지도자이자 보살 같은 모습을 그렸다. 이 배우의 다른 연기를 더 볼 수 없다는 게 진심으로 아쉽다. 신미스님을 도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두 아들 중 안평대군의 면모를 담은 것도 '나랏말싸미'의 발견 중 하나다.

'나랏말싸미'는 정통사극이다. 직선이다. 에두르지 않는다. 감정의 높낮이는 적되 깊이는 깊다. 영화가 던진 화두와 깨달음은 후대에 남길 만하다.

7월 24일 개봉. 전체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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