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게임의 호황기였던 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 많은 실력 있는 개발사들이 저마다 개성 넘치는 게임들을 쏟아냈던 장르가 바로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었습니다. 일꾼을 동원해 채취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개념이 있고, 자원으로 건물이나 각종 2차 물자를 생산해 도시나 나라, 문화 등을 발전시키는 게 이 장르의 기본 문법이죠.
여기서 장르가 다시 세부적으로 구분됩니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병력을 생산하고 그 군대로 다른 상대(AI나 아니면 네트워크로 연결된 진짜 사람 플레이어)와 대결해 승리하고 정복하는 파트를 극대화시키면 흔히 RTS라 불리는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병력을 운용해 전투를 벌이는 부분은 전체의 일부분 정도로 떼어 놓아두고, 자원의 채취와 운용, 생산이나 도시와 문화를 단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에 게이머의 모든 역량을 집중하게 하면 비로소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이 됩니다. (이 기사는 대부분 후자에 속하는 게임들에 대한 것입니다) 서두에 얘기한 90년대 중반 PC게임 1차 전성기의 10여 년 동안 우리 앞을 거쳐갔던 게임들은 정말 많죠. 다 다룰 수는 없겠고, 대표적으로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만 보도록 하죠.
대표적인 건설 경영 게임의 원조격은 바로 ‘심시티’. 현대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를 경영하는데 모든 초점을 맞춰 도시경영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을 기르는데 매우 적합하다는 ‘교육용 게임’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대단한 게임 시리즈였습니다. 도시의 동맥이 되는 도로를 비롯한 지하철, 항공 등 교통수단의 설계와 건설 및 관리, 전력과 수도의 공급 등 복잡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고려해야 시대에 남을 메갈로폴리스를 건설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지는 그런 멋진 게임이었습니다.
이런 화면으로도 잘만 밤 샜죠(심시티) |
로마인 이야기를 한창 열독 중일 때 때마침 필자를 환호하게 만든 게임이기도 합니다(시저 III) |
트로피코 시리즈의 최신작인 6편도 곧 등장해 아노 1800을 위협할 것으로 보이네요 |
아노보다도 역사가 더 오래되어 첫 작품이 1994년에 발매된 세틀러는 주민들이 생산하는 물자의 보급선을 중시했다는 게 특이점일 겁니다. 자원을 채취해 창고로 이동하는 주민들이 AI에 의해 조정되는데 이게 게임 진행의 크리티컬 포인트로 작용할 정도였죠.
게르만, 아프리카, 마야 등 여러 종족을 선택할 수 있지만 정작 역사적인 고증과는 동떨어진 것이 세틀러의 특징이라면 특징입니다. 자원을 모아 모아 도시를 발전시키고 병력도 생산하여 상대 종족을 공격해 정복하는 요소도 게임으로서 잘 표현한, 어느 정도 RTS의 요소도 버리지 않은 특색 있는 게임으로 마침 25주년을 맞이해 올해 신작이 등장할 예정이라고 하니 아노 1800과 함께 기대해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서프 시티’라는 제목으로도 잘 알려졌던 아기자기한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세틀러도 이 장르의 명작이었죠(세틀러 온라인) |
네, 압니다 알아요. 소싯적 스타크래프트 류의 RTS 게임을 ‘팠던’ 게이머라면 누구나 이 게임 하면서 정작 하라는 전투는 안하고 뚝딱뚝딱 ‘심시티’만 주구장창 해본 추억은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독특했던 게임이기 때문에 살짝 소개하는 것이랍니다.
선택한 각 문명에서 나무, 돌, 금, 식량이라는 아주 간략한 자원을 채취하면서 마을과 주민을 구성, 발전시키며 문명의 각 상위단계로 진화를 거듭하는 건설 경영의 요소가 역사적인 고증과 함께 절묘한 재미를 줬습니다.
물론 이런 요소 덕분에 자원채취와 건설 등 테크트리 개발과 전투 후 승패 결정까지 10분~15분 내에 결판나는 다른 RTS와 달리 문명 발전에만 20분 넘게 소요되어 정작 게임대회를 하면 한 게임에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경기가 속출했던… 아마 그래서 ‘스타’와는 다른 길을 걸었던 걸지도 모르겠지요.
게이머라면 잊지 못할 추억의 패키지 커버! |
아노 시리즈는 1998년 ‘아노 1602’로 첫 테이프를 끊었고 이후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콘솔 게임기로 발표된 이식작 등을 빼면 총 6편이 발매되었습니다.
아노(Anno)는 라틴어로 해(年)를 의미하며, 시대에 따른 문명의 흐름이나 각 문명의 발전상 등 매우 많은 부분에서 실제 역사의 흐름을 바탕으로 하는 아노 시리즈인 만큼 게임 제목의 1602년이라는 것을 통해 역사의 어떤 부분을 다루었구나 하는 걸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에 최초의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었고, 1503년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파나마에 도착했습니다. 1701년은 프로이센 왕국이 성립된 해였죠. 이렇게 각 게임별로 대항해 시대와 신대륙 개척 등 시대와 문명 발전의 전환기를 컨셉으로 잡고 만들어졌습니다.
아노 시리즈의 기념비적인 1작! |
플레이어는 무조건 어떤 섬으로 이주합니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가 적절히 조합된 캠페인 시나리오와 프리 플레이(샌드박스 모드) 모두 마찬가지로, 게이머는 섬의 곳곳을 찾아보며 어떤 자원을 얻을 수 있는지 살피고 시장과 도로, 집을 건설합니다. 최초의 섬 주민은 농민으로, 농촌에서 얻을 수 있는 기본 자원을 얻으면서 어느 정도 인구수가 채워지면 그때부터 차차 늘어나는 자원과 상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등의 점차 복잡한 경영/관리 방법이 동원됩니다.
섬에 이런 식의 건물 레이아웃이라는 게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나름 좋아보이죠? |
실제 역사의 시대배경과 상황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으니, 그 당시의 문물과 생활상이 게임 플레이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아노 1404에서는 동방/서방으로 나뉘고 주로 이슬람 계열 국가들로 이루어진 동방은 필수적인 무역의 파트너 역할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냉장이나 냉동 등 먹을 것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기술이 없었을 때 동방에서만 나는 다양한 향신료가 반드시 필요해지는 시점이 온다거나 하는 등 말입니다.
동방과의 무역을 주요 컨셉으로 한 아노 1404. 사진은 확장팩인 ‘아노 1404: 베니스’ |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아노 1404) |
아노 시리즈의 7번째 작품이자 인류 역사상 최고 격변의 시기인 18, 19세기를 다루는 아노 1800. 테스트 버전을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어 남들보다 한발 더 빨리 체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1800년이면 18세기의 마지막 해. 이 해에 실제 역사에선 엄청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습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1공화국 통령으로 당선된 해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100년. 인류사에서 가장 극단적인 변혁의 시기, 즉 ‘산업혁명’의 물결이 전 지구를 덮친 세기였습니다. 아노 1800은 이 격동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아노 시리즈가 건설 경영 게임 팬들에게 각인시킨 ‘인류와 문명의 발전을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현실감 있게 다룬다’는 장점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기 선택이 아닐까 싶었고, 체험판의 짧은 플레이만으로도 그런 기분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풍경! |
화면을 디테일하게 확대하면 표현되는 도시의 일상이 매우 자세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아노 시리즈답게, 각 건물에서 열심히 일하는 주민들의 모습이나 주점에서 흥청망청하는 모습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가 있습니다. 발전단계마다 산업화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새끈하게 단장하는 건물들의 디자인 변화도 좋았습니다.
열일하는 주민들 |
도시로 올라가면 이제 주민들은 농민에서 ‘노동자’로 업그레이드되며 먹거리는 돼지고기를 통한 소시지와 빵, 그리고 맥주로 확장됩니다. 비누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이 비누 제조공장은 철제 빔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요. 철제 빔을 만들기 위해서는 석탄과 철의 채광이 필요하고 만일 시작한 섬에 철광산이 없다면(!) 시작하면서 소유하고 있는 범선으로 다른 섬을 탐험, 철을 보유하고 있는 섬 주인에게 큰 돈을 지불하고 조달해야 합니다(테스트 플레이 기간 동안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요^^).
무역은 아노 시리즈의 필수입니다. 잘 정돈된 UI도 눈에 띄네요 |
석탄은 생산하고 있지만 아직 풀지 못한 요소가! |
옥토버 페스티벌에 아직 가보지 못한 필자는 이 장면으로 위안을 받습니다 흑흑… |
최신 소화장비로 화재 진압! |
노동자의 권리 향상은 산업화로 수반되는 가장 큰 숙제였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요 |
물론, 다른 게이머(또는 AI)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항구를 요새로 만들 수 있도록 다양한 방어시설(해안포 등)도 구비되어 있으니 해군력 강화도 게임의 주된 요소로 작용합니다. 테스트 버전에서는 직접 만들어볼 수는 없었지만 예고편 영상을 통해 ‘밀덕 남성의 클래식 로망’인 전노급(pre-dreadnaught class) 전함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국강병으로 연결되는 본격 제철소 가동. 공해는 감수해야만 하는 겁니다 |
자, 이제 검열을 시작하지 |
2019년 새로운 '인싸 게임' 예감, 아노1800
스팀의 전 지구적인 히트로 시작되어 이번 아노 1800을 서비스하게 될 Ubi소프트 자체 플랫폼인 Uplay 등 다양한 PC게임 플랫폼 등장 등… PC게임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걸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이제 수명을 다한 것처럼 생각했던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장르도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는 척 외면만 했던 것 같아 아노 1800를 테스트하면서 반성하게 된 필자였습니다.
올해만 해도 예정되어 있는 세틀러의 신작, 이 아노 1800, 트로피코 6, 그리고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4 (이, 이걸 굳이 넣어야 하나 ^^)까지… 20여 년의 세월 동안 ‘무사히’ 살아남은 도시 건설 게임들의 제2의 전성기를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려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