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마약왕' 송강호로 응축된 유신의 지독한 은유 ①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8.12.1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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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군림하는 자다. 남들 위에 서는 자다. 마약으로 남들 위에 서서 군림하고 싶었던 남자. 박정희 유신의 지독한 은유. '마약왕'이다.


1972년. 금쪼까리 만지다가 금 밀수에 뛰어든 남자 이두삼. 남 밑에서 이러구러 돈을 좀 만진다.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마누라, 시집 보내야 할 세 여동생까지, 그가 건사할 몫이 만만찮다.

휘몰아친 유신의 시작. 이두삼(송강호)은 밀수업자 꼬리로 잘려나가 중정(중앙정보부) 사람들에게 죽도록 매를 맞는다. 그렇게 감옥 갔다가 마누라 잘 만난 덕에 풀려났다. 이두삼은 집으로 돌아오긴커녕 철부지 사촌동생 꼬셔 필로폰 밀수업에 손을 데려 한다. 대만에서 원료 받아 한국에서 만들어 일본에 팔면 애국하는 게 아니냐며.

어찌어찌 선수들을 모아 일본으로 필로폰을 팔아넘겼다. 고생한 데 비해 손에 쥐어지는 건 영 마뜩잖다. 역시 동업보단, 남 밑에서 보단, 남 위에서 일해야 큰 돈을 만지는 법. 이두삼은 일본에서 목숨 걸고 야쿠자 조직 판로를 뚫는다.


그렇게 돈을 긁어모은다. 제법 부산 유지 소리 들을 만큼 벌었지만 아직 멀었다. 이두삼은 정재계에 남다른 인맥을 갖고 있는 김정아(배두나)를 통해 중정에 끈을 댄다. 돈을 먹인다. 중정 도움으로 이름도 자랑스런 '메이드 인 코리아'란 브랜드로 필로폰을 일본에 갖다 팔 만큼 성장한다. 돈으로 쌓은 거대한 왕국. 오줌 먹이던 조폭도, 굽실거렸던 경찰도, 눈 아래에 둔다. 각하에게 직접 표창받은 자랑스런 수출역군.

하지만 끈질기게 그를 추격하는 검사가 있다. 감히 검사 따위가 라고 싶지만 시대가 점점 불안해지며 이두삼의 발밑도 불안해진다. 부마항쟁이 벌어지고 유신의 끝이 점점 다가온다. 그렇게 이두삼의 왕국도 몰락의 길로 내달린다.

'마약왕'은 박정희 유신의 지독한 은유다. 1972년 유신의 시작에 맞춰 출발해 1980년 유신의 끝을 지나 문을 닫는다. 수출로 돈 벌어와야 애국한다던 시절. 여공들이 흘린 피땀을 가로채 배를 두들기던 시절. 만인 위에 군림했던 한 사람이 있던 시절. 밑바닥에서 단숨에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초고속 성장의 시절. 마약범은 살고 빨갱이는 죽던 시절. 이두삼이 각하처럼 만주 출신이란 건, 분명한 상징이다.

'마약왕'은 빠르다. 마약왕의 탄생과 성장, 왕국의 건설과 몰락까지 쉼 없이 달린다. 영화 속 8년의 시간을, 2시간 20분에 응축했다. 초고속이다. 영화와 닮았다. 수많은 사건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불꽃 같은 전개다. 감정이 채 이입될 틈조차 없다. 그럼에도 이두삼의 감정을 붙드는 건 기시감과 송강호의 공이다.

'마약왕'은 기시감의 영화다. 어디서 본 듯하다. 전형적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시대를 응축하기 위해선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익숙하고 전형적이어야 설명이 없어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수많은 군상들이 튀어나온다. 전형적이다. 전형적이기에 캐릭터의 구축 없이 납득할 수 있다. 이 수많은 군상들을 이성민, 이희준, 윤제문, 조우진, 조정석 등 익숙한 배우들이 맡은 건 그래서 주효했다. 이 배우들이 했기에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살아 숨 쉴 수 있었다.

'마약왕'은 온전히 송강호의 영화다. 이두삼을 맡은 송강호의 영화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은 있으나 퇴장은 없다. 각설탕 녹듯 사라진다. 벌려놓은 이야기가 휘몰아치는 미친 바람 속에 말려들면서 캐릭터들도 사라진다. 미친 바람만 남는다. 그 미친 바람이 이두삼이요, 송강호다. 송강호는 미친 시대를 한 사람의 몸에 담아냈다. 스스로 미친 바람이 됐다. 마지막 그의 머리 위로 흐르는 슈베르트의 '마왕'과 도제니티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은, 그래서 송강호의 또 다른 대사다.

여성 캐릭터들의 묘사는 아쉽다. 우민호 감독의 전작 '내부자들'처럼 '마약왕' 속 여성 캐릭터들은 도구로서 기능한다. 김정아 역의 배두나도 기능적 역할은 피할 수 없다. 이두삼 아내 성숙경 역의 김소진만 짧은 분량에도 기능 그 이상을 만들어 냈다.

'마약왕'은 한 시대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했던 시대. 그리하여 지금은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시대가 됐냐고 묻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꼬리만 붙잡히는 결말. 그래서 '마약왕'은 지금에 의미가 있다.

12월 19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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