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2000년. 한화가 1999년도 우승을 하고 야구 팬이었던 아버지는 저를 한화이글스 어린이 회원에 가입시켰습니다.
처음엔 야구 룰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야구장 다니기를 여러 차례. 선수들 이름을 조금씩 알게 될 때였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 초등학교 5학년(올해 30세).
저희 집은 대전 중구 대흥동 현대아파트였습니다. 어느 날 제가 외출할 때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한 선수가 7층에서 타는 겁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사인을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이 선수 왈 '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데 사인을 어떻게 해' 하면서 웃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저랑 같이 7층을 누르고 올라갔습니다. 그 선수 집에 가서 사인도 받고…. '어떻게 나를 알아봤어? 한화 팬이야?' 하시면서 냉장고에 있는 생크림 케이크도 주시고, 사람 얼굴만한 한화 이글스 로고 야구공에다가 사인도 한 후 저에게 주시며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저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때 먹던 생크림 케이크의 청포도와 딸기, 아직도 식감이 생생히 기억이 나요. 저는 그 이후로 이 선수의 유니폼을 아직도 계속 사고 있습니다.
선수 시절의 유니폼, 코치 시절의 유니폼 등. 이 선수에게 그 이후로 아직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나중에 만나면 꼭 말하고 싶어요. 생크림 케이크 잘 먹었다고.
어린 저에게 이 사건은 평생 기억될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본래 프로야구가 출범될 때 취지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자' 라고 알고 있습니다. 진짜 어린이들에게는 사인을 잘 해주면 좋겠습니다. 팬이 없으면 프로도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21일. 이 글이 한 유명 커뮤니티에 '어느 한화 레전드가 어린 팬들에게 한 만행.jpg'라는 제목과 함께 올라왔다.
커뮤니티에 접속한 많은 야구 팬들은 '훈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같은 글 아래에는 이 선수에게 사인을 부탁하자 '목말도 태워주고 잘 생겼다는 말도 해줬다'며 기뻐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그래서 글쓴이는 열정 넘치는 한화 팬이 되었다고.
이미 알고 있는 야구 팬들도 있겠지만, 이 선수는 바로 한화 이글스의 영구 결번 주인공, '살아있는 레전드' 정민철(46) MBC스포츠플러스 야구 해설위원이다.
23일 고척돔에서 해설을 준비하고 있는 정민철 위원 /사진=김우종 기자 |
진위가 궁금해, 23일 오후 해설위원으로 SK-넥센전이 열린 고척돔을 찾은 정민철 위원을 현장서 만났다.
글을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던 정 위원은 글을 다 읽은 뒤 "제가 시간이 오래 돼 정확히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이 아파트(대전 중구 대흥동 현대아파트)에 살았던 건 맞아요. 가물가물하지만 6층인가 7층에 살았던 걸로 기억해요"라고 입을 열었다.
약 18년 전의 일. 그 이후에도 수 많은 팬들을 만났을 정 위원이다. 그는 또렷하게 기억을 못하는 듯했다. 그렇지만 정 위원은 글쓴이가 지목한 그 아파트에 살았다는 게 맞다고 했다. 결국 정황상 이 글의 내용은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
정 위원은 "당시는 요새와 상황이 달라서…. 요즘은 SNS로 팬들과 소통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집으로 찾아오는 팬들이 많았거든요. 그러면 집에 있는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을 내어줄 때도 있었고, 목말도 태워주고 그랬던 것 같아요"라고 회상했다.
정 위원은 "그런데 그때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도 다 그렇게 했어요. 또 요새 후배들과는 팬들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이 많이 달랐고요. 제가 선수로 뛰던 당시에는 SNS나 스마트폰이 없어서…. 저 때는 다 저렇게 했어요"라며 쑥스러워했다.
'자기뿐만 아니라 누구나 저 때는 다 그랬다'는 그에게서 여전히 겸손하고 사람 좋은, '살아있는 한국 야구 전설'의 향기가 났다.
23일 해설 준비를 하고 있는 정민철 위원(오른쪽) |
선수 시절의 정민철 해설위원 모습 /사진=뉴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