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안시성' 제작자가 철저히 밝힌 영화 속 고증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8.09.22 11:00 / 조회 : 1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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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을 공동제작한 스튜디오앤뉴 장경익 대표가 영화 고증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사진제공=NEW


몰랐던 영화 속 뒷이야기를 풀어 드립니다

'안시성'은 당태종 이세민이 이끈 당나라 대군의 침략에 맞선 고구려 안시성의 전투를 그린 영화다. 기록이 적은 고구려 사극을 만들기 위해 김광식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은 숱한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고증 논란이 없는 사극은 없는 법이지만, 그럼에도 만드는 이들은 최대한 노력을 기울였을 터. '안시성'으로 첫 제작에 나선 스튜디오앤뉴 장경익 대표와 '안시성' 고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안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어떤 사료들을 참고했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중국쪽 구당서, 신당서 등과 여러 야사, 경극 등을 참고했다. 정사에는 양만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전하기론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양만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알려졌단 소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선조가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의 영웅이 누구냐고 묻자 을지문덕과 안시성주가 있다고 답하는 대목이 있다.

양만춘이란 이름 석자는 중국 소설에서 처음 등장해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으로 알려졌다.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양만춘에 대해 상세히 전했는데 당시 암울한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목적성이 분명했던 것 같다.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이 쿠테타 이후 각 성주들을 소집했을 때 응하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연개소문과 사이가 안 좋았을 것이라 판단했다. 안시성 전투 기록은 한국 기록과 중국 기록이 흩어져 있는데 당나라 군대가 토산을 쌓자 안시성주가 결사대를 조직해 삼일밤낮을 싸워 무찔렀다는 게 있다. 그 기록을 영화의 전체 뼈대로 참조했다. 사서에는 당태종이 안시성주가 잘 싸웠다며 후퇴하면서 100필의 비단을 줬다는 게 있는데, 야사에는 당태종이 성에서 날아온 활에 눈을 맞아서 후퇴했다는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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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고구려 개마무사를 구현해 낸 장면.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주필산 전투는 어떻게 고민했나.

▶사실 주필산 전투는 고립된 안시성을 구하려는 전투였다. 실제로 답사를 해보니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곳과 16km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전투에 대해선 구당서와 신당서 기록이 각각 다르다. 고구려 군대를 이끌던 두 장수 고연수, 고혜진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것도 있고, 철저히 싸우다 궤멸당해 3만여명이 포로가 됐다는 것도 있다.

일단 영화에선 그런 점을 고려해 비주얼적으로 고구려 개마무사를 보여주려 했다. 고구려 벽화에서 디자인을 참고했다. 개마무사는 찰갑(쇠와 쇠를 잇는 형태로 만든 갑옷)기병이다. 당시 고구려 군대의 10% 가량으로 추정된다. 고대에 기병은 귀족 계급이었다. 갑주와 무기를 자기들이 마련해야 했는데 그런 경제력을 갖춘 건 귀족이었으니깐. 영화 속에선 개마무사의 강력한 돌진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주혁으로 대표되는 태학에 다니는 장수들은 일종의 경기병이다. 고구려 벽화에 있는 그림을 참조해 디자인했다. 학도병 개념으로 포함 시켰기에 무장이 상대적으로 개마무사와 다르다.

-중기병과 보병의 충돌은 고증을 잘 살렸던데. 기병을 보병이 끌어내리는 데 쓰던 갈고리 모양의 창인 '과'를 그대로 담았던데.

▶고증하면서 가장 신경썼던 게 무기였다. 한국전통 무예연구소 최형국 소장님께 자문을 구했다. 개마무사는 찰갑기병이라 활을 쏴도 튕겨나가는 모습을 담고, 그런 찰갑기병을 보병이 과를 써서 끌어내리는 모습을 실제처럼 담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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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당태종 이세민과 당나라 군대가 도열한 모습.


-보병이 기병을 방진으로 막아낸 뒤 뒤에서 다른 기병이 협공을 하는 것처럼 표현했는데.

▶고대전쟁사를 참고했다. 돌진하는 찰갑기병을 막을 때 보병이 사각형 형태의 방진으로 기세를 꺾고 뒤에서 찔러오는 방식을 담으려 했다. 그 전투를 통해 당태종 이세민의 능력을 보여주려 했다. 중국쪽 기록에는 이세민을 병법의 신처럼 묘사한다. 수백여 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처럼 전해진다. 그런 능력을 보여줘야 그에 맞선 안시성 전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안시성은 어떻게 고증했나. 현재도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곳이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데.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영성자 산성에 답사를 다녀왔다. 찾기도 힘들 뿐더러 그냥 방치해 놨더라.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데, 자기네 역사라면 잘 꾸며 놨을텐데 그냥 아무 조치도 안해놨더라. 안시성은 확실히 자기네(중국) 역사가 아니구나 싶더라. 중국이 진 전쟁이니깐.

직접 봤더니 왜 안시성으로 추정되는지 알 수 있었다. 앞에 토산이 무너진 흔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보기엔 뒷산이 너무 작았다. 저 정도 작은 산이면 당나라 군대가 산쪽으로 침입해 올 수도 있겠다 싶더다. 그래서 영화 속 안시성 모습은 환도산성을 답사해 많이 참조했다. 환도산성을 안시성이라 불렀던 기록도 있기도 하고. 환도산성은 뒷산이 높고 옆으로 기울어져 산과 어울어져 있다. 그런 이미지를 참고했다.

-고구려성은 성문 앞에 또 다른 성문을 둬서 성문이 깨져도 또 다른 성문이 있는 이중구조인 옹성이였는데. 영화에선 성문 돌파와 관련해 다르게 묘사했는데.

▶그렇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만들면 성의 디자인이 잘 안 맞아떨어져서 포기했다.

-당시 고구려는 많은 적들이 침입하면 성 밖의 사람들을 성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모든 식량을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썼다. 그런 걸 고려해서 안시성의 백성들이 몇 명이었을지도 설정했는지.

▶맞다. 청야전술을 써서 백성들을 성에 불러들이고 3개월 여 동안 싸웠다면 식량도 어느 정도 비축했을지를 고려했다. 산성의 규모를 고려할 때 5000명이 적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당나라 군대 20만 대 안시성 5000명으로 설정했다.

-당나라 군대를 20만명으로 설정한 건 어떤 걸 고려한 것인가. 30만 대군이다, 40만 대군이다, 여러 설이 있는데.

▶그렇긴 하지만 중국쪽 기록은 워낙 허풍이 세다. 역사학계에선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도 100만 대군이라고 했지만 당시 중국 인구를 고려하면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정하더라. 영화에선 그런 점들을 고려해서 20만명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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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성루의 모습.


-성의 높이는 몇 미터로 설정했나. 역사학계에선 고구려성들의 높이를 고려해서 20m 이상으로 추정하던데. 고구려 산성은 벽돌로 쌓기 마련인 중국성과 달리 흙 위에 돌을 겹쳐서 쌓아서 형태가 다르기도 하고.

▶일단 영화속에선 성 높이는 12m로 설정했다. 영화 찍기에 현실적으로 20m는 너무 높다. 다만 흙에 돌로 쌓은 건 고증을 해서 영화 속에 대사로 담았다.

-성의 높이가 12m니 공성탑도 비슷한 높이로 제작했나.

▶그렇다. 성보다 약간 더 높아야 해서 14m로 만들었다. 성을 공략하는 사다리차인 운제와 돌을 던지는 투석기, 성문을 부수는 충차 등은 다 일대일 사이즈로 제작했다. 투석기는 당시 사람이 실제로 잡아당겨서 던졌다. 그런 부분까지 재현하려 했다. 다만 운제는 기록을 보면 사다리를 접을 수 있게 돼 있는데 그것까지는 구현할 수 없어서 앞으로 뻗친 형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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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고구려 도끼 부대를 형상화한 모습.


-맥궁을 비롯해 칼, 도끼, 창 등 무기류는 어떻게 구현했나.

▶최 소장님의 자문을 구했다. 고구려 벽화를 보면 군대의 편재를 확인할 수 있다. 창 부대, 활 부대, 도끼 부대, 환도 부대, 기마 부대. '안시성'에선 각 부대의 편재를 그대로 담고 부대장들의 캐럭터를 반영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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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쇠뇌 부대를 이끄는 여군의 모습.


-운제를 쓰러뜨린 거대한 활인 노포와 쇠뇌 부대 설정은 어떻게 했나. 특히 쇠뇌 부대를 여자 부대로 설정했던데. 안시성주에 여동생(설현)이 있고 여자부대를 이끌었다는 건 연개소문 여동생이 여자부대를 이끌었다는 설에서 착안했나.

▶일단 노포의 활용은 고대 전쟁사를 참고했다. 안시성주 여동생 백화 캐릭터는 연개소문 여동생 연수정에게서 착안한 게 맞다. 정사에는 연개소문 남동생 기록은 있지만 여동생 이야기는 없다. 중국 경극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켰을 때 여동생이 여자부대를 이끌고 도열한 신하들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경극에는 연수정이 수군을 이끌고 당태종 보급선을 불태웠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 부분에서 착안해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무기인 쇠뇌부대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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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양만춘 역을 맡은 조인성이 입고 있는 갑옷.


-조인성(양만춘)이 입은 갑옷이 중국쪽 갑옷처럼 보이는데다 판갑옷(몸에 맞도록 몇개의 판을 덧댄 뒤 고정한 갑옷) 같던데. 당시 고구려 갑옷은 주로 찰갑옷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고증을 참고할 만한 고구려 장수의 갑옷 디자인이 거의 없더라. 그래서 안시성이 접경 지역인 만큼 여러 형태의 문물이 섞일 수 있다는 설정으로 갔다. 그리고 신라의 갑옷은 판갑옷 위주로 알려졌지만 최근 찰갑옷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구려도 상황에 따라 달라졌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양만춘 갑옷 디자인은 지키는 갑옷과 죽이는 갑옷 사이에서 고민했다. 죽이는 갑옷은 더 야수성이 드러나고 활동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서 영화적인 상상력을 더해 디자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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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승전을 기원하는 신녀의 모습.


-요동성에서 주몽신을 섬기는 신녀가 창과 방패를 들고 승리를 기원했다는 기록이 있긴 한데. 영화 속에선 활을 신물로 썼는데. 또 영화처럼 흑요석 화살이 일반 화살보다 더 멀리 나간다고 판단했나.

▶아무래도 주몽이니깐 활이 아닐까 싶었다. 흑요석을 사실대로 구현하려면 더 매끈하게 만들어야 했다. 영화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더 거칠게 구현했다. 흑요석이 매끈하니 공기저항이 덜해 더 멀리 날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안시성의 성 내 모습은 어떻게 구현했나. 정말 고증이 없었을텐데.

▶기록이 정말 없어서 경기도 구리의 고구려 마을에서 찍었다.

-토굴을 뚫고 그걸 무너뜨려서 위의 구조물을 붕괴시키는 건 주로 공성전에서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인데.

▶그렇다. 그걸 역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민중이 같이 싸웠다는 것도 보여주고 싶었고. 당시 토산에 양만춘과 결사대가 어떻게 올라갈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그런 방식을 아울러서 고민했다.

-토산에서 삼일밤낮을 싸우는 걸 영화에서 구현했는데. 고구려 부대가 던지는 불타는 수레바퀴는 공성무기 중 하나인데.

▶토산에 공성무기로 당나라 군대가 준비해놓은 걸 뺏어서 썼다고 하는 건 너무 억지스러울 것 같았다. 영화 속에선 편집됐는데 안시성 사람들이 한쪽에선 계속 무기를 만들어서 나르는 장면이 있었다.

-연개소문이 고구려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다는 건 정사에는 전혀 없는 내용인데.

▶그렇다. 대신 중국 경극에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에 쫓겨서 죽을 뻔하는 걸 설인귀가 구해졌다는 내용이 있다. 당시 퇴각하는 군대가 편하게 갈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중국에서 자신들의 패전이니 그런 내용을 뺐는데 구전을 통해서 경극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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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고구려 오자도를 형상화한 모습.


-남주혁(사물)이 연개소문에게 받은 단검에는 어떤 문양을 새겼나.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오자도라는 칼을 구현해서 구름 문양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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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안시성'에서 양만춘을 상징하는 깃발.


-안시성주 깃발에는 어떤 문양을 새겼나.

▶양만춘을 상징하는 양과인 염소의 문양을 그려넣었다. 안시성 마을 자체가 농경사회가 아니라 가축 중에서 양을 길렀다는 설정이고 그 문양을 상징으로 삼았다. 양만춘의 방에도 자세히 보면 양 문양이 있다.

-조인성이 영화 초반 남주혁을 끌고 들어오는 길옆에 돌무덤이 있던데.

▶고구려 당시 석총을 구현하려 했다. 환도산성에 가니 주위에 돌무덤이 많더라. 돌무덤일 수도 있고, 적이 오면 던지는 돌탑일 수도 있다. 그런 걸 담고 싶었다.

-'안시성' 개봉 즈음에 고증 논란이 있었다. 특히 투구를 안 쓴 걸로 이야기가 많았다. 투구만 아는 것일 수도 있고, 투구를 안 쓰는 것만 보였을 수도 있고. 영화적 허용과 고증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사극의 고증은 역사학자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공자가 아니면 많이 아는 사람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고 만다. '안시성'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정확히 전할 수도 없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서 고구려 역사가 재조명됐으면 하는 바람은 영화 만든 사람으로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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