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도마의 신'서 '도마공주 아빠'까지..빵·우유, 여홍철·여서정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9.10 06:10 / 조회 : 6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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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금메달 따는 순간 해설하던 아빠 여홍철은 눈물을 훔쳤다./사진제공=KBS


“(이)정후 금메달 축하합니다.” “(여)서정이 금메달도 축하한다.”

아시안게임 체조 여자 도마 금메달리스트 여서정(16, 경기체고)의 아버지 여홍철(47)은 최근 이종범(48)과 나눈 전화통화를 소개한다. 두사람 모두 한때 자신들의 이름 석자가 그대로 명함인 스타였으나 이제는 여서정의 아버지이고 이정후의 아버지인 것이 자연스럽다.

경희대수원캠퍼스에서 만난 여홍철 교수(2016년 정교수가 되었다)는 아직도 딸 서정이 거둔 성과를 얘기하며 상기된 얼굴을 보인다. 여홍철 본인만해도 올림픽 은메달 하나.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인데 대를 이어 딸 여서정(16) 조차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열여섯 어린 서정이고 보면 앞으로 몇 개의 메달을 대한민국에 안겨줄지 자못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엔 빵과 우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방과후 수업하잖아요. 전 야구를 하고싶었는데 야구부가 해체됐죠. 체육관을 지나치며 체조하는 모습을 보니 호기심이 동하더라구요. 이소룡 성룡 같은 무협영화 팬였거든요.”

그렇게 체조와 연을 맺었지만 전문적으로 체조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여홍철의 재능은 곧바로 광주학강초등학교 체조팀 코치의 눈에 쏙 들어오고 만다. “코치님이 대학도 장학생으로 갈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 먼 얘기가 귀에 들어오기나 하나요? 근데 체조하면 매일 빵이랑 우유를 준다시잖아요.” 그렇게 여홍철은 정식으로 체조에 입문한다.

“부모님이 선선히 승낙하셨나요?” ”제가 삼형제중 둘째거든요.“

장남도 아니고 막내도 아니다. 여자형제라도 있었으면 입지가 조금은 달라졌을텐데 아무런 타이틀 없는 둘째아들은 그 시절 부모님들의 안중에선 살짝 빗겨서 있을만 했다. 서로 싸울 때도 “넌 왜 형한테 대들어” “넌 형이 돼서 동생이나 괴롭히고”식의 타박이 그 어중간한 둘째의 몫이기 십상인 시절였다.

결국 빵과 우유가 ‘도마의 신’ 여홍철을 만들었고 ‘도마공주’ 여서정을 만들었다면 지나친 궤변일까? 우연이 필연을 이끌어내는 운명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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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우유'에 유혹당해 체조에 입문한 초등학교 시절의 여홍철.


여홍철은 전남체육중학교(현 광주체육중학교)로 진학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조대부중 최기동감독과 회동하고 오신 아버지의 명으로 조대부중으로 진학한다. 여홍철 평생의 은사 최기동 감독과의 인연의 시작이다. “지금은 광주체육고등학교에 계신데 정말 좋은 스승이셨어요. 체조와 관련해선 엄청 엄하신데 그 외엔 정말 아버지처럼 돌봐주셨죠. 남들 여관에서 하는 합숙도 꼭 당신 집에서 시키셨고요.”

최기동 감독은 여홍철뿐 아니라 여서정까지도 가르치며 대를 이어 연을 맺게 된다.

이종범과의 친분엔 ‘야구방망이’가 매개가 된다.

여홍철이 진학한 조대부중은 체조를 할만한 체육시설이 갖춰지지않아 서림초등학교 체육관을 사용했다. 그리고 당시 서림초등학교 야구부는 무등중학교 야구부와 주말마다 연습경기를 가졌다. 체벌을 위해 야구방망이를 빌려오라는 당시 최기동감독의 명을 받고 찾아가 만난 이가 무등중의 이종범이다. 반납도 이종범에게 했고 그 이후로도 아는 얼굴 이종범을 찾아 방망이를 빌리고 반납하면서 친해졌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지만 각자의 분야에 매진하느라 공백이 길어졌고 서로의 이름을 전해들으며 만나기를 고대하던 두사람은 다시 또 우연히 재회한다. 1996년 여홍철이 광주 군부대로 친구 면회를 가던 날 방위복무후 퇴근하던 이종범을 만나게 된 것. 그제서야 삐삐 번호를 교환하고 지금껏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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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의 신' 무등을 탄 이 아이는 자라서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가 된다.


“서정이는 어떻게 체조를 시작하게 됐나요?”“집사람이 2009~2010년 대표팀 코치로 있었어요. 자연스레 태릉 출입이 잦았죠. 선수들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커서인지 시키는 것 곧잘하고 자기도 하고싶다고 하더라구요” 여서정의 어머니, 여홍철의 처 역시 체조 국가대표 출신으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동메달리스트 김채은(45, 김윤지에서 3년전 개명)씨다. 두사람은 태릉선수촌에서 만나 5년 교제 끝에 1999년 결혼했다.

“말리지 않았나요?”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왜 안말렸겠어요. 특히 여자같은 경우 고등학교 대학교때가 최전성기인데 그때 먹고싶은 걸 못먹는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서정이가 주관이 뚜렷해요.” 초등학교 2학년 아홉 살배기 여서정의 고집을 배겨내지 못했다. 자고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그래도 국가대표 메달리스트 부모를 둔 덕에 서정이가 운동하기엔 편했겠어요?”란 질문에 “글쎄요”란 신통찮은 반응이 돌아온다. 미루어 짐작이 간다. 그 분야의 스타 부모를 둔 아이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어떨지. 당사자나 그 부모는 많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다싶다.

확실히 서정의 뒷바라지는 만만치 않았다. “그때 집이 경기도 광주였어요. 서정이는 수유동 유현초등학교로 보냈는데 등하교가 너무 힘들잖아요. 마침 강릉 아이가 한명 있었는데 그 어머님이 올라오셔서 뒷바라지를 하고 계셨죠. 그래서 그분께서 돌봐주셨는데 주말을 집에서 보내고 바래다 주려면 그렇게 울어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결국 수유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근데 이번엔 제 출퇴근이 문제였죠. 수원 경희대까지 2시간반씩 걸려요. 그때 최기동 감독님께서 당신이 한번 가르쳐보시련다고 하셨죠. 그래서 광주 최감독님댁에 서정이를 맡겼습니다.”

최감독에게 제자의 딸 서정은 손녀와 매한가지였다. 2주에 한번꼴로 광주를 찾아 서정을 만나고 오곤 하던 여홍철부부는 심각한 고민을 하게된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큰 아이들이 버릇 없어지기 십상이잖아요. 감독님이 서정이를 너무 오냐오냐 하시는 거예요. 제일 어르신이 그러시니 다른 감독 코치들도 손을 못대고. 아이가 자꾸 버릇없어지더라구요.” 예의 범절만큼은 타협없는 여홍철 부부다. “인성은 평생가는 거잖아요”

여서정은 4학년 소년체전을 광주대표로 뛴후 다시 신갈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여홍철도 부랴부랴 용인으로 이사하고. 전학생 여서정은 처음엔 환영받지 못했다고 한다. 여홍철의 딸이 오면 우리 아이가 배제되지 않을까하는 학부모들의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5학년때 소년체전 3등. 6학년때 소년체전 학교 첫 우승을 안겨주면서 잡음은 가셨지만 중학교 진학을 두고 다시 갈등이 생긴다. “서정이가 처음으로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고 했던 때예요. 너 진짜 하기 싫으면 그만둬도 괜찮다니까 3일만 시간을 달래요. 그 3일 운동 안하고 친구들이랑 놀고 하더니 다시 하겠다고 하더군요.” 여홍철은 나이를 웃자란 딸 여서정의 어른스러움을 미소로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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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아내 김채은씨, 서정, 여홍철, 하연.


“큰 딸 연주는 운동 안하나요?” “아, 엄마 개명할 때 같이 하연으로 개명했습니다. 그냥 이름만으로는 괜찮은데 성까지 붙이면 ‘ㅇ’이 거푸 들어가서요. 지금 그냥 체육교사를 꿈꾸는 평범한 고3 수험생예요”한다.

사실 큰 딸 여하연(18)도 중학교 1학년때까지 공부하다 운동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처음엔 펜싱을 시켜보고 다음에 컬링을 시켜보았는데 컬링에 소질을 보였다고. 밸런스가 특히 뛰어나 여자컬링부가 있던 서울체육중학교로 보내려했지만 컬링부가 없어지는 바람에 무산됐다고 한다.

여홍철은 체육계에선 흔치않은 성공케이스로 꼽힌다. 선수로서는 올림픽 은메달과 아시안게임 금메달 2개를 따냈고 은퇴후엔 만나이 32세에 경희대 스포츠지도학과 부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45세에 정교수가 되었다. 딸 여서정도 16세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낸 체조 꿈나무다. 당연히 걸맞는 노력도 있었다. “박사과정 3년동안 귀가시간이 항상 새벽 2~3시였어요. 아이들을 못보니 주말엔 전화기 꺼놓고 아이들과 놀아주는데 시간을 보냈죠.” 서울대 경희대 원광대 연세대등을 떠돌며 강사생활도 했다.

“강단에 처음 섰을 때 어땠어요?” “많이 떨렸죠. 배워만 봐왔지.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제가 상대하는 학생들이 저같은 엘리트체육인이 아닌 일반 학생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서죠.“

선수생활도 해봤고 학부모 노릇도 하고 있고 이젠 교수로 제자를 키우고 있는데 특별히 제자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게 있는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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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서정의 금메달외에도 여홍철교수의 제자들이 키워낼 또다른 체조꿈나무들이 기대된다.


“가끔씩 마주하는 후배 지도자들을 보면 타성에 젖은 모습들이 많이 보여요. 가령 백핸드 연습을 한번 하면 될걸 4번씩 시키거나 하죠. 이유를 물어보면 폐활량을 키우고 지구력을 키워주기 위해서라는데 아이들이 힘이 든 상태에서 백핸드를 하다보면 자세가 흐트러지기 마련입니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바로잡기가 참 힘들어요. 그리고 체조는 기본적으로 순발력이 90%를 차지하는 종목입니다. 고등학생들 마라톤 풀코스 안뛰게 하잖아요.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지구력이 90%이상인 마라톤도 그런데 순발력 종목을 그렇게 해선 안되죠. 근데 그게 저희때 배운 방식예요. 당시엔 구 소련도 그렇게 가르쳤고 그게 맞다고들 생각했죠. 배운대로 가르치는 거죠. 동유럽이나 미국의 훈련과정 유튜브에서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시대따라 교수법은 바뀌는게 마땅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목적으로 대해야지 수단으로 취급하면 안됩니다. 저같은 경우 초등학교때 박흥규 선생님, 중학교때 최기동 선생님 등 선생님 복이 많았어요. 저뿐아니라 제자들도 그분들 같은 지도자로 키우고 싶습니다.”

빵과 우유를 매개로 시작된 여홍철의 체조인생은 진행형이다. 선수로서의 뒤안길은 지도자의 길로 이어졌고 체조선수 여서정 아버지의 길로 이어졌다.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 그리고 딸 서정이 나래가 다 자라 둥지를 떠나면 그들은 또다른 자신들만의 둥지에서 또 누군가를 보듬을 것이다. ‘도마의 신’ 여홍철의 체조인생은 그렇게 오래도록 반추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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