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마술, '블루오션 문화콘텐츠'로 키운다".. 마술사 이기석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8.29 17:41 / 조회 : 6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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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의 ‘오 솔레미오(O sole mio)’를 엘비스 프레슬리가 개작하여 부른 노래가 ‘It's Now Or Never’다. ‘바로 지금이다’ 혹은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정도의 의미겠다.

학창시절 시험일정이 공표되면 마음이 바빠진다. 정확히는 마음만 바빠진다. 이리저리 공부스케줄을 짜다보면 뜻밖에도(무의식은 분명히 의도를 했겠지만) ‘아직은’이라는 여유의 빌미를 기필코 찾아내게 된다. 그 여유를 불안하게 즐기다 보면 ‘벼락치기’의 순간이 오고 그 순간에조차 책상의 난삽함이라거나 스탠드위에 쌓인 뽀얀 먼지 따위가 ‘느닷없이’ 신경에 거슬려 먼저 치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맞이하는, 더 이상은 미룰 한 톨 여지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

“제가 그때 그랬어요. 앞으로에 대한 계획조차 사치였고, 지금 이 순간 할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는.. 궁지랄까?”

그는 궁지란 표현을 썼지만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일을 당한 처지’라는 사전적 의미조차 그가 느꼈을 절박함을 설명하기엔 빈약한 느낌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너무 조금씩이라 보이지 않을 뿐이지’ 스스로에게 최면도 걸었으리라. 하루 13시간의 연습, 3~4시간의 수면으로 보낸 몇 년간의 나날.

그 절실함은 차용할 수 있겠으나 ‘벼락치기’란 말을 온전히 갖다 붙이기엔 암울할 정도로 긴 세월은 178cm 20대 중반 청년에게 탈모와 함께 47kg의 가녀린 몸매를 남겼다. 아울러 ‘세계적 마술사’란 수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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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연습으로 뒤틀린 마술사 루카스(이기석)의 손.


마술사 루카스(본명 이기석, 32)의 손가락들은 바깥쪽으로 뒤틀려있다. 각각의 마디마다엔 이젠 고질이 된 건초염이 똬리를 틀고도 있다. 한때 인터넷에서 감동적으로 회자된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처럼, 그가 대수롭지않게 말하는 직업병이다. 그 직업병의 주인공 이기석은 최현우(40), 이은결(37)처럼 국내에서 유명한 마술사는 아니다. 하지만 해외에서의 유명세는 대단하다. 단지 3년마다 열리는 세계마술올림픽 FISM 2012, 2015 매니플레이션 2회 연속 준우승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렉처 DVD란 장르를 개척, 세계의 마술시장을 확장하고 재편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수역 인근 그가 원장으로 있는 쇼디자인매직엔터테인먼트 사무실서 이기석 마술사를 만난 28일은 날이 험상궂었다. 무대 위에서 웃지 않는 마술사, ‘죽음’이란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마술사를 만나기엔 그럴싸한 날이었다. 정작 해맑은 미소를 끊임없이 흘리는 동안(童顔)을 커피 한잔 사이에 두고 마주하기에도 역시 적절한 날이었다.

그는 대단히 영민한 인터뷰이였다. 질문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시차 없이 즉답을 속사포처럼 쏟아놓을 줄 알았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가 마술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청원고등학교(노원구) 1학년 당시 봉사활동에 참여했다가 선배들이 펼치는 어수룩한 마술을 보면서부터였다. 그 선배들을 졸라 몇 가지 어설픈 마술을 배워보았지만 갈증은 심해졌고 용돈을 모아 부모님 몰래 고2때 방학을 이용해 마술학원을 다니게 된다. 고3이 되어서는 학원다닐 여유가 없어 방과후 활동프로그램을 스스로 만들어 동아리 회비를 갹출해 마술사를 초빙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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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 열린 FISM아시아대회 그랑프리를 수상한 마술사 루카스(이기석)./사진제공=쇼디자인ENT


광운대 컴퓨터공학과를 진학해서도 마술에 대한 열정은 계속됐다. 마술회사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청소를 하며 배웠다. 고교시절만해도 스스로 마술을 잘한다 생각했는데 마술회사에서 접한 프로들의 세계는 차원이 틀렸다. 냉정하게 그는 스스로를 평가했다. “사실 마술 재능도 상중하로 따졌을 때 하 정도더라구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난 참 잘하는게 없구나. 공부는 물론이고 운동도 게임도.. 참 이도저도 아닌 인생을 사는 것 같았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마술조차 잘 못하니 제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그리고 마술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더라구요.”

그는 그렇게 자아실현을 위한 일대 결심을 하게 된다. 광운대 2학년이던 2006년 자퇴 후 당시 전국에서 유일했던 동아인제대 마술학과에 입학한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술사의 길. ‘내가 좋아하는 것 조차 제대로 못한다면 뭘 할 수 있겠나’는 심리적 배수진을 친 치열한 시간이 시작됐다.

“참 결혼은 하셨나요?” “예 5년 됐습니다” “이른 나이에 하셨네요?” “심리적으로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던 이유죠.”

스무살에 내린 결단. 스물 다섯까진 죽기살기로 해보자였지만 그 나이에 걸맞는 해찰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다 두 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생기고 교제기간이 길어지며 스스로 생활인으로서의 강박이 생기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아내가 된 두 살 연상의 여자친구는 당시 고려대를 다녔고 예쁜 편였고 집안도 좋았어요. 그냥 좋아서 1년쯤 지내다보니 제 쪽에서 내세울 게 너무 없었죠.” 그러다 보니 죽기살기가 되었고 탈모가 생겼고 몸무게 47kg로 병역을 공익으로 마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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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FISM 시상식서 한국인 수상자들과 함께. 가운데가 루카스(이기석)/사진제공=쇼디자인ENT


2012년 7월 FISM 매니플레이션 준우승은 그에게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부모에게, 여자친구에게,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마침내 자신을 증명해낸 쾌거였다. 비록 부모님은 “이제 할만큼 다해봤으니 공무원시험 준비하는게 어떠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 성과로 그는 그해 9월 플로리다의 지니매직컨밴션에 초청돼 그가 마술쪽에서 아버지라 부르는 매지션 찰리 프라이를 만난다. 찰리 프라이는 그에게 “공연은 잘봤는데 네 공연이 잊혀지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라며 콘텐츠의 중요성을 충고해줬다고.

이미 마술강의 경험은 많았던 이기석에게 찰리 프라이의 조언은 번개같은 영감을 안겨주었고 그는 귀국 즉시 20만원의 예산을 들여 렉처 DVD 50장을 만들었다. 판매루트를 몰랐던 그는 당시 한창 유행을 타던 페이스북에 DVD 트레일러 광고영상을 하나 올렸고 이것이 전세계 마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장당 10만원의 DVD 50장은 순식간에 국내서 소진됐는데 세계 각지의 구매요청을 처리할 방법을 몰라하던 차에 미국의 세계적인 마술샵 펭귄매직으로부터 1000장 구매요청을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의 첫 DVD는 전세계에 5천장 팔려나갔고 이후 3번의 출시가 이어졌으며 매 출시마다 최소 3천세트의 판매량을 보였다. 그는 금년에도 한편을 출시할 예정이다. 첫 DVD 출시에 성공한 이기석은 2013년 1월4일 결혼에도 성공한다.

20만원 예산밖에 없던 그가 트레일러 광고영상까지 만든 과정도 극적이다. “기존 업체들의 단가가 대단하더라구요. 그래서 영상촬영이 가능한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의 한 친구를 수배해 지분을 나눠주기로하고 협조를 구했죠. 그 친구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 마술 렉처 DVD 및 마술도구제작사인 루카스 크래프트(서울 관악구 소재)를 만들어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 그의 성공에는 한국식 광고의 영상미가 가미된 당시의 트레일러 광고가 한몫 톡톡히 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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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권위있는 마술컨벤션 FFFF(4F)초청공연 당시 프랑스 마술사 보리스 와일드와 함께./사진제공=쇼디자인ENT


한국마술계에서 그는 이미 마스터의 레벨에 올라있다. 실제로 2012년 이미 26살 최연소 나이로 동아보건대의 겸임교수를 맡았고 2017년엔 전임교수에 선임됐다. 문하생, 액터를 거쳐 이제는 마스터가 된 그에게 마술얘기를 들어보자.

“마술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장르예요. 상상도 중요하긴한데 실현해낼 수 있는 기술력, 시스템과 프로세스가 담보돼야 되죠. 상식적 논리를 부수려면 그 논리 구조를 이해하고 깰 방법을 만들어내려 애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연출과 비슷하죠. 갈등을 어떻게 증폭해 카타르시스를 언제 줄 것인가.. 실제로 기록영상만을 전달한 뤼미에르 형제와 달리 대중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연출과 편집이란 영화언어를 처음 만든 것도 당대 최고의 프랑스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였어요.”

멜리에스를 거론하며 마술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이기석은 말을 잇는다.

“서양에서의 마술은 무대예술, 공연예술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어요. 턱시도를 입고 극장에서 관람하는 문화가 자리잡았죠. 우리나라에서의 마술은 아직 제대로 대접을 못받고 있습니다. 서커스나 시장에서의 호객행위의 일환이란 인식이 강하죠. 이은결 최현우 선배등이 그런 인식을 바꾸는데 애를 써주셔서 나아지곤 있지만 한국 마술은 해놓은 게 너무 없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또 하나의 블루 오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한국 마술이 세계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이은결의 FISM 준우승 부터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일천한 역사에도 불구, 마술강국의 이미지가 심어지고 있다. “K-POP이 세계 대중문화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듯 마술 역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중요한 문화상품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발전속에 ‘마술사’란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이런 비전을 가지고 그는 후배와 제자들을 교육한다. “학교가 되었든 학원이 되었든 제 강의에서 마술 테크닉이 차지하는 비중은 10%가 안돼요.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가르치고, 연극을 분석하고, 음악공부를 합니다. 저희는 기본적으로 마임을 할 줄 알아야 하며 연극, 뮤지컬, 영화같은 다른 공연물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하고 표현력과 표현기법을 배워와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의 기호와 인식의 변화도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술이 엄연히 예술임을 인식하고 마술사 본인의 내면을 마술이란 장르를 빌어 예술적으로 표현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죠.”

실제로 그는 스스로의 표현력을 제고하기 위해 팝핀, 재즈, 스포츠댄스를 각각 2~3년씩 배우기도 했다. 클래식, 재즈, 뉴에이지의 음악공부도 소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대위에서 웃지 않는 마술사다. 관객의 호응을 끌어내려는 어떤 액션도 배제하는 마술사다. 그의 마술주제는 몇 년째 죽음이다.

“즐거운 마술 중요합니다. 하지만 모든 마술이 그럴 필요는 없죠. 제 개인적으로는 비극이 전해주는 페이소스를 선호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명작이라 생각하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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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사 루카스의 공연 주제는 죽음이다. 검은 상복과 흰 조화는 그의 특징적 소품./사진제공=쇼디자인ENT


그는 검은 상복을 입고 무대에 오른다. 그의 손가락은 하얀 공을 굴린다. 눈물이다. 흰 꽃을 꺼내들기도 한다. 조화다. 또 하얀 카드를 날리기도 한다. 낙화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슬픔을 무대 가득 펼쳐놓는다. 그 슬픔의 순간 객석이 호응을 하냐 아니냐를 신경쓸 겨를은 없다. 그는 그렇게 예술가로서 그의 내면을 표현할 뿐이다.

“처음 ‘왜 마술이 우울하고 슬퍼?’하는 부정적인 의견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FISM은 제가 액트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페이소스에 공감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술은 내면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근데 방송활동을 통 안하시던데?” 가벼운 웃음이 답에 앞선다. “제가 절 잘 아는데 일단 제가 스타성이 없어요. 두 번째 방송 일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해요. 전 강의와 액트짜기, 도구 제작만으로도 벅찹니다.”

그에겐 그가 수상한 여러 무대보다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다고 한다. 2017년 4월 마포아트센터에서 열린 ‘2017 알렉산더 매직 컨벤션’이다. “그날 저희 부모님이 제 공연을 처음으로 와서 보셨거든요. 맨 앞줄에 자리를 드렸는데 저로선 정말 가슴 떨리는 무대였어요. 근데 정작 저희 부모님은 ‘우리 아들 실수안할까’학예회 보시듯 보셨던 모양예요. 제 공연보단 옆에 앉으셨던 남희석씨랑 이문세씨 얘기만 하시더라구요. 하긴 전임교수 된 걸 아시면서도 ‘다른 교수님들께 잘배워라’ 하시는 분들이니..”

남미부터 북유럽까지 전 세계를 돌며 회당 공연료(7분) 300만원대의 특급 마술사 이기석은 마스터이고 교수이지만 아직은 못미더운 아들이기도 했다.

“아 참 예명이 루카스인 이유가 있나요?” “그냥 이기석 철자 따서 정한거예요.”

또한 그의 예명에 어떤 마술적 고려나 논리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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