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죽비처럼 깨치는 기자정신!.. 이길용

신문박물관 '뽈은 둥글다 - 신문 속 공이야기' 展 속 우리나라 최초 체육기자의 자취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8.03 15:54 / 조회 : 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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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기자.


지난달 17일부터 신문박물관에서 신문 속 스포츠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뽈은 둥글다-신문 속 공이야기’전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사무실 바로 옆 건물인 터라 점심시간 짬을 내 둘러봤다. 전시회 기획자인 주연우 연구원은 신문기사를 통해 스포츠 130여년의 기록을 살펴본다는 전시회 취지를 고려, 공을 일제강점기 시대 표현법처럼 경음을 써 ‘뽈’로 표기했다고 밝힌다. 원래는 경음을 ‘ㅅ’ 과 ‘ㅂ’으로 구성해야 했지만 어린이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뽈’로 결정했음을 덧붙인다.

전시는 일제강점기 시대부터 해방 이후 ‘코리아’란 이름으로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해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활약한 선수들의 결정적인 장면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참관인 각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뽈’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적어보는 ‘내 인생의 뽈’ 코너와 주어진 사진 상황을 보며 예시된 스포츠기사를 참조하여 자신만의 기사를 작성해보는 체험 코너까지 갖추고 있다. 전시는 10월 28일까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연하게도 그를 만났다. 파하(波荷) 이길용(李吉用, 1899-?).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기자. 손기정 일장기 말살사건의 주인공. 한국 스포츠 사를 다루면서 그의 이야기를 빼먹을 순 없는 일이다.

전시에는 그의 유족인 이태영(77) 대한언론인회 감사가 기증한 두 권의 기사 스크랩북이 펼쳐져 있었다. 아울러 1930년 4월 2일부터 16일까지 그가 연재한 ‘조선 야구사’, 1931년 8월 29일부터 9월 16일까지 연재한 ‘갑자원 기행’, 1932년 신동아 9월호와 10월호에 실린 ‘여자정구 10년사’와 그 속편 등 그의 자취들이 근 100년 세월을 건너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체육 기자임과 동시에 사료수집가였고 개별 종목의 진흥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 단편적인 내용만으로도 적어도 한국의 스포츠계가 파하에게 빚진 바가 적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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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은 둥글다'전에 전시된 이길용기자의 기사 스크랩 두권.


마침 이길용 기자의 3남으로 부친의 뒤를 이어 체육 기자직을 대물림한 이태영 감사가 함께 자리했다. 이태영 씨는 1961년 경향신문에 입사 1998년 중앙일보에서 현직을 떠날 때까지 특히 체육기자로 활동하며 1977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7년 대한민국 체육상(공로)을 수상할 정도로 한국 체육계에 기여를 했고 현재 대한체육회 고문, 대한언론인회 감사를 역임하고 있다.

“어떤 아버지이셨나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10살 이전이라 흐릿한데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셨어요. 성격이 대쪽 같으셨는데 다른 한편으론 자식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경험시켜주려고 애쓰셨던 기억이 나요. 바쁘신 와중에도 우리 데리고 외식도 하고 서울 이곳 저곳 구경시켜 주길 좋아하셨죠.”

이태영 씨가 1941년생이고 이길용 기자가 한국전쟁 초기(1950년 7월)에 납북되어 생사불명이 되었음을 감안하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가물가물할 만하다. “집이 사랑채랑 안채로 되어있었는데 사랑채가 아버님 서재 겸 자료실이었어요. 없는 게 없었죠. 커다란 여닫이 식 독일제 책장이 있었고 오디오와 LP 판이며 각종 포스터에 야구 스코어북까지.. 지금도 안타까운 게 그때 그 야구 스코어북이 사라진 거예요. 아주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자리를 함께 한, 근대서지학회 회원이기도한 홍윤표 OSEN 선임기자는 “제가 옛 잡지 신태양에서 주요섭 선생이 파하 선생을 회고한 글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내용이 ‘이길용 기자는 뭐든지 버리지 않고 다 수집했다’는 것이었는데 그 덕에 한국의 체육사가 기틀을 잡을 수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라며 거든다. (주요섭은 1931년부터 신동아 주간으로 근무한 이길용의 직장동료였다.)

이태영 씨는 “많은 자료를 체육회에 기증했었는데 관리가 잘못됐어요. 사진 자료도 사과 박스 3상자 분량이 있었고 스크랩북도 많았는데 동양통신 창고 같은데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라. ‘체육대감’ 만든 김창문 씨 등이 노력해주셔서 절반 남짓이나마 찾아낼 수 있었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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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에 모습을 보인 이길용기자 3남 이태영 대한언론인회 감사.


해방 후 이길용 기자는 대한제국 시기부터 한국의 체육사를 조망한 ‘대한체육사’ 집필을 준비하던 중 납북되었는데, 그가 남긴 사료들은 매일신문사 후배 기자인 김창문 씨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스포츠 기록을 집대성한 ‘체육대감’(1957년)으로 편찬되어 그 가치를 발했다.

체육 부문에서의 혁혁한 공로 이전에 이길용은 열혈 기자였고 애국지사였다.

인천에서 성장하여 1916년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일본 도지샤(同志社) 대학 유학 중 가정형편으로 1918년 중도귀국한 이길용은 철도국에 취직한다. 1920년 대전역 개찰계에 근무하면서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추진된 전국적 만세운동에 참여, 격문 운송을 담당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의 기자 생활은 고하 송진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일부 사료는 송진우와의 만남을 출옥 후로 기술하고 있지만 이태영씨는 “서대문감옥에 수용되셨을 당시 고하와 한방을 썼으며 그에게 감화받아 기자가 될 결심을 하셨다”고 밝혔다. 이길용은 출옥 후인 1921년 송진우가 사장에 취임한 동아일보에 입사, 최초의 체육기자로 활동한다.

그가 체육기자 생활을 시작한 20년대는 3.1 만세 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책을 펼치던 무렵이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선 스포츠가 민족 단결과 국제무대에 어필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겼고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립됐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각종 스포츠를 접했던 이길용에게 체육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운동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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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3일 후속으로 쓴 박스기사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삭제했다. 이 사진은 일제의 검열을 무사히 넘겼다.


그렇다고 그가 스포츠 기사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그는 뛰어난 현장 기자였다.

1923년 8월, 폭풍과 해일이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중북부에서만 1,254명의 사망 및 행불자가 발생하고 가옥 1만 6000 여 호가 침수되는 재해가 발생한다. 특히 인천 굴업도의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는데 마침 민어 철이라 멀리 제주도의 선박까지 굴업도에 몰려들며 피해를 키웠다. 당시 그는 굴업도 특파원으로 8월 15일 인천을 떠나 16일 굴업도에 도착해 현장의 참상을 소상히 알리는 르포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그의 기사에 따르면 당시 굴업도엔 “충청도 서산·보령, 전라도 제주 등 각 지방으로부터 모여든 어선이 약 삼백 척에 어부만 일천 오백 명, 장사하러 모여든 상민까지..” 많은 이들이 조난의 아픔을 겪었다.

“힘밋데까지 위문의 뜻을 표한 사실을 한시가 밧부게 보도하랴 하얏스나 뎐보나 뎐화는 그만두고 인편까지 끈어진 무변대해의 고독한 섬이라 하는 수업시 느짐을 미안히 녁인다”고 서두를 꺼낸 그의 첫 보도는 8월 19일 자 지면에 실렸고 8월 20일 자에도 굴업도 특파원으로서 현지르포기사를 이어 싣는다.

그리고 이틀 뒤인 8월 22일 자 동아일보는 형평사 분사 설립을 둘러싸고 형평운동에 반대하는 농민 군중 일만여 명이 일으킨 김해소요사태를 보도한다. 당시 기사를 전한 특파원 역시 이길용이었다. 그는 흉흉한 김해의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 말미에 (이십일 오후)라 적어 시점을 명확히 했다. 불편한 당시의 교통상황에도 불구하고 굴업도에서 돌아오자마자 김해로 내달려 다시 르포기사를 작성했음을 보여준다.

문제의 일장기 말소사건 당시에도 이길용 기자의 행보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였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금을 딴 것이 1936년 8월 9일. 동아일보는 8월 10일 자로 ‘聖戰의 最高峰 征服-세계의 시청중집리 당당 손기정군 우승’이란 제목으로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보도했다.

그리고 1936년 8월 13일 자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란 제하의 기사에서 1차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을 올렸고 다시 8월 25일 ‘영예의 우리 손군’이란 제하의 사진기사에서 다시 한번 일장기를 말소했다. 이 사진은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의 사진을 동아일보가 복사해 전재한 것이었다. 사실 일장기 말소는 손기정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이길용은 1932년 LA 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와 권태하의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지웠었다. 당시와 13일 말소는 운 좋게 넘어갔지만 25일 자 사진은 일제의 검열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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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5일자 사진기사. 일본 주간지 아사히스포츠의 사진을 복사전재하면서 일장기를 다시 한번 말소했고 이것이 검열에 걸려 이길용은 두번째 옥고를 치른다. 동아일보도 40일 정간됐다.


이 와중에도 이길용은 현장을 누비고 있었다. 손기정의 메달 소식을 전한 다음 날인 8월 11일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수해소식을 전한다. 중부 이남을 강타한 물난리는 특히 영남 일대에 큰 피해를 안겼고 8월 19일 이길용은 구호위문반을 이끌고 삼랑진으로 특파된다.

“삼랑진의 참상은 차마 볼 수 없는 형편으로 본사에서는 각처에서 모여든 구제 의복과 약품을 재지에 나눠 주었다. 그러나 창해일속의 구급책에 불과한 것으로 기한에 우는 재민을 보고 있지 않을 수 없는 참혹한 형편이다..”

당시 동아일보의 활발했던 구호사업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40일 정간을 당하면서 중단된다. 이길용은 두 번째 투옥된다. 당시에 대해 이태영 씨는 “어머니 말씀이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얼마나 고문을 당하셨는지 갈아입을 옷을 전할 때마다 선혈이 흥건한 옷을 되받아오시면서 눈물도 많이 흘리셨다고 하시더군요.”

이 일장기 말살 사건에 대해 이길용은 동아일보 창립 30주년을 맞아 “손기정의 우승으로 그 감격과 환희가 조선 민족의 혼을 되살렸고 조선 민중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는데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공으로 돌리는데 분개해 민족 감정의 발로에서 비롯됐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길용은 창씨개명을 거부하여 다시 세 번째로 투옥되었다가 1945년 8.15 광복 며칠 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다.

이 같은 이길용의 공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며 한국체육기자연맹은 1989년부터는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시상하고 있다.

요즘 사는 게 그렇다. 먹고사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먹고사는 일을 못하면 어떡하나 휘둘리고 먹고사는 일을 그만둔 뒤에는 먹고사는 일을 계속할 수 없을까 싶어 휘둘린다. 거대담론은 사라지고 미시사만 강조된다.

한 전시관에서 만난 선배 이길용. 애국과 애족의 큰 뜻을 품고 대쪽같이 살다간 그의 삶이 정수리를 깨치는 죽비로 다가온다.

“사진첩 자체가 없어요. 다 임진각에 있는 6.25전쟁 납북자 기념관에 기증했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되셨는지를 모르니.. 그래도 임진각 가면 쉽게 뵐 수 있잖아.”

이태영 씨 말처럼 삶에 휘둘려 다시 혼몽해지면 임진각을 찾아 선배의 죽비를 자청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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