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구단주를 꿈꾸는'김병지, "월드컵 16강 꿈도 간절하다면.."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6.15 17:15 / 조회 : 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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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는 24시즌을 프로선수로 뛰며 통산 최다인 706경기에 출전, 역시 통산최다인 229경기 무실점의 대기록을 남긴 축구레전드다./구리= 홍봉진기자

“축구역사를 보면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낸 결과들이 많다.”

러시아 월드컵 전망을 묻는 질문에 전 국가대표 골키퍼 김병지는 먼저 전제를 깔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이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 등이 그런 예다. 월드컵 16강은 아시아팀이 호언장담할 수 있는 성적이 아니다. 도전 은 어려움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한국의 16강 진출을 난망했다. “우리도 그렇지만 스웨덴, 독일, 멕시코 모두 각자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들 계획 속 1승의 상대는 우리나라일 것이다. 우리가 그런 약체임은 분명하다. 우리도 우리 승수계획에 독일을 넣지는 않을 것 아닌가. 스웨덴이나 멕시코를 상대로 승부를 걸텐데 그 도전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간절한 꿈과 도전은 이루어진다”며 희망을 더한다.

아직 팀 내 경쟁이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골키퍼 부문에 대해 “김승규는 경험이 많다. 볼리비아와의 평가전 후반에 나온 김진현은 솔직히 제3의 골키퍼 느낌이다. 조현우의 컨디션이 관건으로 보인다. 김승규는 경험과 신장 면에서 메리트가 있지만 크로스나 공중볼의 방어지역이 조현우보다 오히려 좁다. 나와서 막아야 할 때 안 나오는 부분이 자주 보여 아쉽다. 또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평가전 3실점 중 2골은 각이 없는 곳에서 먹은 골이 됐는데 발로 막아내야 할 공조차 손을 사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골키퍼는 복서처럼 양손을 몸 앞쪽에 두고 상황을 컨트롤 해야 되는데 팔을 밑으로 늘어뜨리는 습관이 있어 핸드볼 키퍼처럼 몸으로 막아내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조현우는 위기관리능력 면에서 좀 더 낫다. 내가 골키퍼코치라면 조현우에 좀 더 공을 쏟을 것 같다.”고 평했다.

그는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송종국과 함께 팟캐스트 형식의 ‘날 것 중계’를 계획하고 있다. 이미 PD 등과의 미팅을 마쳤고 중계화면을 쓸 수 있는지, 쓰게 되면 화면 크기는 어느 정도여야 되는지, 목소리만 들어가는 건지 등 세부적인 법리 검토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라고 밝힌다. ‘날 것 중계’라고 밝힌 것처럼 점잖음을 떨쳐버리고 브라운관 앞의 시청자처럼 ‘정신 나간 플레이’ ‘미친~’ 등 속마음 그대로를 내비치는 해설이 될 것이라고 전한다. “물론 어느 방송사던 해설 요청이 들어오면 없던 일이 되겠죠”란 사족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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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아직까지 오른다리가 완전치는 않다고./구리= 홍봉진 기자

지난 12일 구리 장자못 공원에서 만난 김병지는 걸음이 불편했다. 지난해 11월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른 다리 마비증상이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참 공교로운게 필드A(AFC A)자격증 따고 얼마 안돼서 당한 교통사고예요. 이미 골키퍼 LV3 자격증도 따둔 상태라 국내 어느 팀이라도 갈 수 있는 상황였는데 다쳐버린 거죠”

지난해 11월 19일 김병지는 축구경기 응원을 가던 중 옆 차선서 끼어들던 차량에 받혀 허리디스크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했다. 손가락 두마디 정도의 뼈가 신경에 박혀 신경 일부에서 괴사가 진행된, 예후가 극히 나쁜 상황였다고. 수술 직후엔 ‘6개월 후에도 다리 감각이 살아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경고를 받을 만큼 중차대한 부상였다.

지금도 도로에 나가면 옆 차가 끼어들지 않을까 움찔움찔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가끔씩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과 치료도 받고는 있지만 몸은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회복 되고 있는 중이다. 그의 긍정과 낙관의 인생관이 회복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고 자가진단한다.

그가 돌발 질문을 던진다. “지금 제 꿈이 뭔지 아세요?” “글쎄요.. 골키퍼 출신 프로 첫 감독?” “아니요. 그건 과정이고 제 돈으로 팀 운영하는 구단주입니다.”

그는 인생을 낙관하는데 퍽이나 익숙해 보인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니 이해가 간다.

그는 어려서부터 빨랐다. 그래서 밀양초 시절 육상부에 들었다. 그리고 역시 빠르다는 이유로 축구부로 차출된다. 5학년 때 골키퍼가 부상으로 제외되는 바람에 그 포지션을 맡았고 경남대회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탄다. 당시 지역 축구계는 쓸만한 골키퍼가 나왔다고 흥분한다. 그 인상 깊은 활약 탓에 밀양중 진학해서도 골키퍼가 그의 포지션으로 굳어졌다. 중학교까진 사실 축구의 매력을 크게 못느꼈다. 하라니까 하는 정도였는데 마산공고로 진학한 후 축구가 길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고1 당시 163cm의 작은 키 때문에 축구부서 내쳐진다. 1년 반 남짓의 일반 공고생 생활. 이 기간 중 그는 전기용접과 선반(밀링포함) 기능사 자격증을 따낸다. 그리고 같은 기간 중 무려 20cm나 성장한다.

“공부하면서도 축구가 내 길이란 생각은 변함없었어요. ‘키 크면 축구 해야지’란 생각밖에 없었죠. 바람대로 키가 컸고 그는 고3 때 축구팀을 찾아 부산 소년의 집(현 알로이시오전자기계고등학교)으로 전학 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고교시절 이력이 없는 그를 불러주는 팀은 없었다. 할 수 없이 금성산전 직장팀에 들어갔다. 당시 마산엔 금성, 삼성, 효성, 일화, 기아 등 직장팀이 몇십 개씩 있었고 마산시장배, 협회장배 등 직장팀 대회도 활발했다. 그의 활약 덕에 금성산전 팀은 챔피언도 먹고 선전했다. 그는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개인 운동을 열심히 했다. 축구팀 동료들조차 '프로팀 가려고 운동한다'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가 봐도 현실적이진 않았지만 그냥 무조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물론 아무 근거는 없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황당하긴 하죠.”

그런 그를 주목하던 체육부대 출신의 직장선배들이 상무 감독에게 그를 추천, 테스트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홍성렬 상사님이 감독님이셨는데 예정 없던 테스트 기회를 주셨죠. 저와 친구 둘이 응했는데 저만 됐어요.”

1990년 1월 체육부대에 입대하고서야 그는 축구다운 축구를 접하게 된다. 상무는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같은 날고 긴다는 대학팀들과의 연습경기를 수시로 가졌다. 소년의 집 시절 지역 영남대와의 연습경기를 0-5, 0-7 등으로 져왔던 김병지는 대학 강호들과의 연습경기에 한껏 주눅 든 채 골문을 지켰다고 한다. “근데 우리가 계속 이기는 거예요. 사실 고참들은 대학서도 날리던 선수들였으니 밀릴 이유가 하등 없었죠.” 그제서야 그는 그런 대단한 선수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서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된다.

그럼에도 선수 이력이 일천한 탓에 그는 연습생신분으로 울산현대에 입단한다. 첫해 연봉 960만원, 월 80만원. 뭐 떼고 뭐 떼고 실수령액 54만원 남짓. 그는 첫 월급을 받으며 ‘2억 모으기’의 포부를 밝혔고 또다시 주변의 비아냥을 받는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연봉 덕에 그의 목표는 어렵지 않게 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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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지는 프로 첫 골키퍼출신 감독뿐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축구단 구단주가 되길 소망하고 있다./구리= 홍봉진 기자

“아마도 지금 제가 구단주 꿈을 꾸는 게 당시 2억 모으기 보다 현실성이 있을 걸요.” 고교 시절 2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하리라는 꿈을 이뤘고 직장팀에서 꾸었던 프로의 꿈도 달성했다. 월 80만원 받는 연습생 시절 2억 모으기 꿈도 실현시켰다. 주변에선 모두가 뜬구름 잡는 몽상으로 치부했지만 그는 현실로 만들어냈다.

그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한치 흔들림 없이 믿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비근한 예가 프로 24년간 꾸준히 유지된 78.5kg 그의 몸무게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그래서 최고의 경기력을 보장하는 체중임을 이미 상무 시절 체득했고 그는 그 체중 유지에 올인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체중계에부터 올라서고 체중을 보면 그날의 운동량, 식사량 등이 머릿속에 대뜸 그려진다.

몸무게 하나? 아니다. 그는 선수생활 24년간 저녁 8시 이후 약속을 잡아본 적이 없다. 당연히 술 담배도 안한다. 고졸 신입사원이던 금성산전 시절 잦은 회식에도 굳건히 술잔을 거부했다. 은퇴하면 즐겨보리라 마음먹고 모아만 둔 술 컬렉션이 100병을 훌쩍 넘기지만 아직도 딴 병은 없다고 한다. 체중유지를 위해 그는 삶의 상당 부분을 희생해온 것이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고 헤쳐나가기 뻑뻑한 나날들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 꿈을 위해 그는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내온 것이다.

백수가 되어버린 그는 요즘 (사)한국축구국가대표 회장으로서 북한 어린이 축구공보내기 운동, 월드컵 온라인 응원전 등을 펼치고 있고, ‘팀2002’ 회장으로 활동하며 안성에 풋살구장 기부, 지방학교순회 재능기부에 나서고 있으며 가수 김경호, 방송인 윤정수, 야구선수 박명환, 송종국 등 친한 지인들끼리 모여 리사이클센터와 손잡고 다문화가정 세탁기 전달 등 사회공헌활동도 펼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구리, 별내, 남양주, 의정부, 수원에 유소년 대상의 김병지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투자금요? 밝힐 순 없고 꽤 들어갔어요. 다행히 운영비는 나오는 정도입니다. 제가 은근 내실주의자거든요.”

‘축구단 구단주 되려면 그 정도 벌어선 안될 것 같은데..’ 하니 그는 ‘창의성’을 강조한다. “유튜브 채널도 만들었고 1인 미디어도 만들려고 해요. 5~10년 안에 승부를 볼 생각입니다. 구체적인 방침은 지금 공개하기 그렇고 어쨌든 창의적으로 돈 좀 벌어볼 생각입니다” 한다. 어려서부터 엉뚱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 '제법 창의적'이라 자부하는 그가 ‘골 넣는 골키퍼’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그래서 그는 축구인생을 회고하며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울산 현대 시절인 1998년 포항 스틸러스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 1-1 상황서 헤딩슛으로 결승점을 올리며 골키퍼 최초의 필드골을 작성한 사건을 꼽는다. 또 가장 아쉬웠던 시간으로 영광의 2002년 월드컵의 현장에서 벤치만 덥혔던 때를 꼽는다.

그의 가족 얘기도 들었다. 1993년 소개팅으로 만나 1997년 12월 28일 결혼한 부인 김수연(45) 씨는 김병지의 트레이드 마크인 ‘꽁지머리’의 입안자다. 이에 대해 그는 “무명으로 출발하다 보니 인지도가 형편없었어요. 프로라면 유명세가 필요하잖아요. 스포츠 3사 신문밖에 마땅한 홍보수단도 없던 판에 승부를 걸어보자 했죠. 집사람이 염색과 꽁지머리 콘셉트를 잡아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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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인사아트홀서 섬유미술 개인전을 연 부인 김소연씨.

축구선수 김병지에 올인 했던 아내 김수연 씨는 이제는 본인 작업에 올인 하고 있다고 한다. 섬유미술 전공으로 홍익대 석사까지를 마친 김수연 씨는 양평 서종면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에 여념이 없다고. 지난 4월 인사아트홀서 개인전도 열었고 현재 중국, 스위스, 부산 등에서의 전시회를 잇달아 계획하고 있어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김병지는 “은퇴하면 외조하겠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업실도 마련해주고 했지만 집사람이 내조한 것에 비하면 손색이 많다”고 자책한다.

우리나이 스무살인 큰아들 태백은 일본 야마나시 대학교에서 축구를 하고 있으며 ‘날아라 슛돌이’에 출연하기도 했던 둘째 산은 축구를 포기하고 서울실용음악고등학교로 진학, 음악공부를 하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 태산은 아빠처럼 골키퍼로 축구를 하고 있지만 정작 재능은 엄마 닮아 미술 쪽인 것 같다고 한다.

특히 막내 태산은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학교폭력에 연루돼 김병지의 은퇴를 재촉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해 말하며 김병지의 눈자위에는 시큰하게 슬픈 빛이 내려앉는다.

“상대 아이 어머니가 포털에 올린 게시글로 우리 가족은 전형적인 갑질 가족이 되어버렸죠. 그걸 기화로 종편방송까지 가세해서 저희 가족을 난도질했죠. 1심에서 우리 아이에게 600만원, 저와 집사람에게 각각 200만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는데 저희가 항소했습니다. 저희가 요구하는 건 이 사건이 오해에서 비롯됐다면 명백히 오해라는 사실을 밝히라는 거죠. 제가 반박 기자회견까지 했는데 상대방은 무고나 명예훼손 등의 맞대응을 전혀 안 하고 있어요. 끝까지 파헤치겠다 벼르던 종편도 슬그머니 발을 뺐구요. 그게 뭘 의미하겠어요? 둘째가 축구를 포기한 것도 그 사건 때문이고 태산이도 아직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김병지는 당시 60만 클릭, 1만 댓글에 담긴 대중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적의 앞에서 넝마가 되어버린 기분이었음을 토로한다. 스스로도 “777번째 경기가 내 은퇴경기가 될 것” 이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706경기 만에 은퇴를 맞게 된다. “우리 가족에 가해진 그 엄청난 폭력의 부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이 소송은 끝까지 갈 겁니다”고 의지를 밝힌다.

제 3자가 보기에 김병지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오히려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는 역경을 순경처럼 넘어서 왔다. 꿈을 꾸었고 꿈을 이뤘다. 24시즌을 거치며 통산 최다 706경기 출장, 통산 최다 229경기 무실점, K리그 최고령(45년 5개월 15일) 출장의 대기록을 남긴 넘버원 골키퍼는 그렇게 만들어 졌다. 그는 구단주라는 또 하나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낙관한다. 그런 선배 김병지의 기운이 러시아의 대표팀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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