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사석원, 그리움을 그리는 남자, 희망을 말하다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5.30 10:30 / 조회 : 5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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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사석원./가나아트센터= 홍봉진 기자


어차피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닭이며 병아리며 강아지며 토끼며 염소며와 도대체 무슨 의견을 교환할 것인가. 그저 빤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쓰다듬는 손길에서 전해져오는 온기만으로도 너무 충분했다. 그래서 석원은 포천 외가가 좋았고 군용트럭을 얻어타고서야 만날 수 있었던 그 오지의 동물들이 좋았다.

서울에서, 어머니의 양장점은 그의 놀이터였다. 라사라패션학원에서 배운 솜씨로 차린 킹스타양장점은 제법 분주했다. 석원은 그 한귀퉁이를 뒹글거리며 달력의 그림들을 베끼고 또 베꼈다. 일곱 살까지 말문이 트이지 않은 병약한 아이의 일상엔 개구쟁이 친구들과의 한판 난장 대신 그렇게 동물과 그림이 진즉 자리했다.

6월10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칭 ‘동물화가’ 사석원(58)의 전시전 제목은 ‘희망낙서’다. ‘청춘에게 묻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출범- 어떻게 살것인가’, ‘희망낙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지웠다’, ‘신세계-오, 황홀한 무지개여’의 3가지 주제의 연작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고릴라를 주연으로 내세운 ‘출범’시리즈는 이 시대의 가장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험난한 바다위를 가족을 품에 안고 외줄타며 건너는 모습부터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희생하는 모습까지를 세밀하고 또렷하게 그려냈다. 폭력같은 현실을 감당해내는 가장들의 실제가 생생하게 엿뵌다.

이어진 희망낙서 연작에서 작가는 지우는 작업을 수행했다. 정교하게 그림을 그려놓고는 뭉개고 지우는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 설명하지만 굳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도 과거는 세월따라 흐릿해져가는게 당연하다. 꽃에 파묻힌 당나귀처럼 달큰한 연정에 수줍어했던 청춘, 코뿔소처럼 고집스러웠으며 황금코끼리처럼 귀했었을 청춘. 이소룡같은 무협고수를 꿈꾸다가 성난 황소와 호랑이의 달밤 난투처럼 복받치는 혈기를 거침없이 분출해내기도 했었을 청춘은, 비내리는 흑백영화처럼 캔버스 가득한 노이즈속에서 뭉개져간다. 다만 그 와중에도 또렷함을 잃지않는 동물들의 눈동자가 그 청춘의 기억, 그 열정과 무모함과 아름다움을 잊지않으려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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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누드 작품앞에서/가나아트센터= 홍봉진기자


이어진 신세계 시리즈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까지 이어질 기억, 혹은 예견으로 보인다. 뭉개진 기억 혹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단지 하나, 여체의 누드만 늘씬하고도 기름진 아랫배까지 기형적으로 확연하다. 흐릿해진 청춘의 기억속에서도 외려 선명했고 앞으로도 결코 늙지않을 정욕, 퇴색하지않을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갈구가 느껴진다.

28일 가나아트센터에서 마주한 사석원 화백은 조용하고 온순했다. 자칭 ‘한량’을 표방하는 이답지않게 한량 특유의 분방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읊어주는 인생사를 들었다.

오해가 있었다. 사전조사차 확인한 그의 글에서 그는 광화문 스탠드바에서 마티니를 홀짝이던 고등학생였고 만 23살에 전국미술대전 금상(1983), 만 24살에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1984)을 받았던 천재다. 동양화를 전공했음에도 불현듯 파리 유학을 떠나기도 했던 이였다. 당연히 돈 많은 집 귀한 아들로 성장해 화가 이력조차 편하게 꾸려온 인물처럼 느껴졌었다.

“처음엔 괜찮았어요. 할아버지께서 제약회사에 약품을 납품하셨거든요.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고시를 오래도록 준비하고 계셨고요. 그리고 당연하게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죠.”

그는 동국대 입학후 홀로 아현동 굴레방다리밑 술집촌이나 장안평 뚝방 등지에서 화실을 운영하며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다행히 당시 고액 장학금였던 5.16장학금을 받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상금(당시 800만원 였다고) 등이 있어 간신히 유학을 떠날 수 있었을 뿐이었다. 2년만의 귀국도 집에 빚이 너무 많았기 때문였고 그 빚가림을 위해 그는 과외의 길로 뛰어들어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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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에 빗대 험난한 세파를 헤쳐나가는 이 시대의 가장을 그리고있는 '출범'연작 앞에서./가나아트센터=홍봉진 기자


전술한대로 그는 또한 7살 될 때까지 말을 못했다. 병약하게 태어나 조부에게 흔했던 약재들을 과용한 탓으로 이유를 추정한다. 초등학교까지는 또래들과 어울리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잦은 이사로 광희-인왕-고은-면목초등학교를 전전한 전학이력도 한몫했다.

면목중학교로 진학하고서야 그는 제법 활개를 펼친 모양이다. 생활 영어로 유명한 오성식씨등의 절친들도 생겼다.“초등학교 말미에 할머니가 탁구장을 운영하셨어요. 탁구장에서 놀다보니 실력도 쌓였고 혼자 오신 분들 맞상대도 해드렸죠. 그러다 면목중학교에 진학했더니 마침 탁구진흥학교더라구요” 그렇게 그는 탁구선수로 중학시절을 보냈다. 아예 선수로 진로를 잡을 궁리도 했었나보다. “근데 중3때 갑자기 눈이 안좋아졌어요. 그래서 탁구를 접었는데 그때 아버님이 너 어렸을 때 그림에 소질 있었으니 그림 그리면 어떠냐고 권하시더군요.”

대광고등학교로의 진학. 1학년 때인 1976년 8월1일 광화문 서울미술학원 등록. 8월2일부터 석고데생을 배웠고 8월14일부터 사군자등 동양화를 배웠단다. 그는 40년전의 일을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한번도 후회한 적 없던 화가 인생의 출발선였기 때문인 모양이다. 1979년 대입 첫해 서울대 봤다 떨어졌다. 후기는 지원도 안했다. 이듬해 다시 떨어졌다. 군대문제로 입학은 해야했다. 후기인 홍익대는 동양화가 없어 동국대에 진학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돌연 프랑스 유학을 떠난 것은 색에 대한 궁금증 때문였다. 당시만해도 동양화는 제한적인 색만을 써야했고 석원은 색에 대한 갈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파리 8대학 유학시절 그는 색도 색이지만 아프리카 미술의 큐비즘에 담긴 조형성과 야성적 에너지를 접하고 일대 충격을 받는다. “놀라운 과장과 강조, 일반적인 미술에선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 전해주는 원시적 생명력 등이 쇼킹했다”는 그는 “지금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민화에도 그런 힘이 있어요. 오래전부터 원색의 대비법과 여러방향에서 본 다시점을 한화면에 담는 큐비즘이 차용되고 있었죠.” 그렇게 아프리카 미술과 민화는 사석원 화풍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앞서 밝힌 대로 가정형편 탓에 2년만에 귀국한 석원은 집안 빚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얼추 빚이 가려진 이후엔 생계였던 과외에 매몰된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낀다. ‘그림으로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싶은 찰나 프랑스시절 현지서 전시회를 열었던 가나화랑이 떠오르고 그는 포트폴리오 들고 당시 인사동에 있던 가나화랑 이호재대표를 찾아간다. 이 대표는 사진으로는 알 수 없으니 원화를 가져올 것을 요구했고 논현동 화실서 인사동 갈 용달비는 있지만 돌아올 용달비가 없었던 석원은 퇴짜맞으면 인사동에 버리고온다는 배짱으로 원화들을 싣고간다. 다행히 작품들은 이 대표가 사주었고 석원은 가나화랑과 전속계약을 맺게 된다. 1988년 3월의 일이다. 그는 이후 30년째 가나화랑 전속작가다.

“부모님 다음으로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분이 바로 이회장님입니다”는 그는 가나화랑과의 인연 이후 해보고 싶던 작업, 그를 특정짓는, 캔버스에 물감을 듬뿍 짜넣고 그려내는 화법을 맘껏 구사한다. 물감값 대기에 엄두를 못내던 작업이었다. 이제는 사석원화법으로 자리잡은 그 방식은 서양화를 배운적 없는 그가 ‘팔레트를 사용할 줄 몰라서’란 사소한 이유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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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기 위해 지웠다'는 부제를 단 '희망낙서' 연작중 소. 화면 가득한 노이즈효과는 흐릿해져가는 청춘의 기억을 표상한다./가나아트센터= 홍봉진 기자


묘비명에 ‘잘 놀다 간다’라고 쓰고 싶은 그는 ‘한량’을 꿈꾼다. 언제나 ‘꿈꾸는 소년’같았던 아버지의 피내림도 있었고 고등학생 시절 풍류를 알려준 서울미술학원 은사 김원배 선생의 가르침도 있었다. 그는 그림 그리며 놀고 술마시며 놀고 훌쩍 여행길에 올라 놀고 또 글을 쓰면서도 논다. 1990년 즈음에 아는 기자의 권유로 칼럼을 쓰면서 글을 시작한 그는 ‘당나귀는 괜히 힘이 셉니다’ ‘꽃을 씹는 당나귀’ ‘명랑 뻔뻔한 오사카 유람기’ ‘황홀한 쿠바’ ‘막걸리 연가; ’사석원의 서울연가‘등 책도 많이 냈다. 당연히 글솜씨도 예사롭지않다. 다만 컴퓨터를 못다뤄 아직도 200자 원고지에 글을 쓴다.

하지만 그는 본인 말로 천생 ‘환쟁이’다. “20대때 국전 수상의 영광을 안았고 아직도 화가로 생활한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이고 감사한 일이다. 다만 제 그림이 보답을 못하고 있다. 내 작업은 모방과 모방의 연속이다. 아직도 진실한 창조를 꿈꾼다. 이제 얼추 됐겠지 싶어 전시회를 열지만 매번 열자마자 개선할게 눈에 띈다. 그 조급함에 전시회를 마치자마자 다시 작업에 들어간다”는 그는 “60이후에도 그려보고 싶은 것들을 순차적으로 그려내는게 목표다. 아프다거나 사고가 나서 그림을 못그린다면 그 점이 가장 안타까울 것 같다.”고 두려움을 밝힌다.

그의 두려움을 접하니 그를 알겠다. 그는 그리움을 그리는 화가다. 어린 시절 눈맞추고 온기 나눈 동물들이 전해준 위로가 그리워 그는 동물을 그린다. 이번 전시에서도 지나 버린 청춘이 그리워 청춘을 그렸고 순간순간 흘러가버리는 지금이 그리워 지금을 그렸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그는 그림을 그리워한다. 그립고 그리워서 남은 평생 붓을 놓지 못하리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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