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김의 MLB산책] 캐시 감독의 파격 '선발 제도' 고정관념 뒤흔들까

댄 김 재미 저널리스트 / 입력 : 2018.05.22 13:46 / 조회 : 4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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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캐시 감독 /AFPBBNews=뉴스1


영어 표현에 "Think outside the box."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박스 밖에서 생각하라"가 되는데 이 말의 의미는 한 마디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즉 무슨 일을 할 때 기존 관념이라는 이미 짜인 틀(Box)에 얽매이지 말고 언제라도 그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난 주말 탬파베이 레이스의 케빈 캐시 감독이 말 그대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리는 파격적인 선발투수 운용을 선보여 화제가 되고 있다. 캐시 감독은 LA 에인절스와의 원정 4연전 시리즈에서 지난 20일과 21일(한국 시간) 3차전과 4차전에 모두 오른손 불펜투수인 서지오 로모(35)를 선발로 등판시켰다.

한 선수가 이틀 연속으로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것 자체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일 인데다(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1이닝 이상을 던진 투수가 다음 날 또 선발 등판한 것은 1980년 이후 3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로모는 이전까지 빅리그 커리어 첫 588경기가 모두 구원등판이었고 단 한 번도 선발 경험이 없는 100% 불펜 전문투수였기에 그가 선발투수로,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등판했다는 사실은 메이저리그 관계자들과 팬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했다.

로모는 20일 경기에서 1회말 에인절스 타자 3명을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 2회부터 원래 진짜 선발투수였던 루키 좌완투수 라이언 야브로에게 마운드를 넘겼고 야브로가 다음 6⅓이닝을 4안타 1실점으로 막은 탬파베이는 이 경기를 5-3으로 승리, 6연승 행진을 이어갔다.

이에 고무된 캐시 감독은 21일 경기에도 다시 로모를 선발로 내세웠는데 로모는 이번에도 2회 2사까지 볼넷 2개만 내주고 삼진 3개를 잡아내며 무실점으로 성공적인 등판을 마친 뒤 마운드를 내려왔다.

하지만 탬파베이는 오타니 쇼헤이가 선발로 등판한 에인절스에 2-5로 패해 파격적인 실험은 일단 1승1패로 끝났다.

그렇다면 캐시 감독은 어떻게 이런 파격적인 구상을 들고 나온 것이었을까. 사실 이런 구상의 발단은 탬파베이의 선발투수 부족 사태를 돌파하려는 궁여지책에서 시작됐다.

현재 탬파베이의 선발 로테이션을 살펴보면 크리스 아처, 블레이크 스넬, 제이콥 파리아 3명의 고정멤버가 있지만 나머지 두 자리는 물음표로 남아있다. 지난 오프시즌 알렉스 콥과 제이크 오도리지가 프리에이전트로 떠나갔고 이들을 대체할 것으로 생각했던 호세 데 레온과 브렌트 허니웰은 토미 존 수술을 받아 전열에서 이탈했다. 이미 토미 존 수술 경력이 있는 또 다른 선발요원 네이선 에볼디는 팔꿈치 뼛조각 제거수술을 받고 아직도 이번 시즌에 등판하지 못했으며 또 다른 대체요원 요니 치리노스는 오른팔 부상으로 부상자명단에 올라있다.

애초에 시즌 시작부터 선발투수가 부족했던 탬파베이는 시즌 초반 경기가 없는 오프데이를 활용해 4선발로 로테이션을 돌렸다. 그리고 5일 연속 경기가 있는 경우엔 5번째 경기를 '불펜 데이'로 지정, 불펜투수들이 이어던지기로 한 경기를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불펜 데이' 경기에 선발로 나선 투수는 길어야 2~3이닝을 던지고 내려온 뒤 나머지 경기를 나머지 불펜투수들이 어어 던져 경기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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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지오 로모 /AFPBBNews=뉴스1


여기까지는 사실상 필요에 의한 이뤄진 구상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캐시 감독은 진짜로 기존의 고정관념 틀을 완전히 뛰어넘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얻게 됐다. 투타 매치업 상황에 따라 아예 불펜투수를 먼저 선발로 등판시켜 1~2이닝을 던지게 한 뒤 진짜 선발투수를 마운드에 올릴 수도 있다는 구상이 그것이다. 경기 막판 타자와의 매치업을 고려해 불펜을 가동하는 것을 아예 경기 시작부터 적용해 선발 매치업을 감안해 불펜투수를 먼저 기용한다는 것이다.

에인절스전은 그런 실험을 하기에 딱 조건이 좋았다. 20일 에인절스 라인업을 보면 오타니가 지명타자에서 빠지면서 8번타자 콜 캘훈을 제외한 나머지 8명이 모두 오른손 타자였고 특히 잭 코자트-마이크 트라웃-저스틴 업튼으로 이어지는 1~3번은 노련함과 파워를 겸비한 뛰어난 오른손 거포들이었다.

캐시 감독은 이날 선발순서인 루키 왼손투수 야브로가 이들을 상대로 초반부터 고전할 여지가 있는 것과 초반을 잘 넘기더라도 타순이 3번째로 돌았을 때 이들에게 구질이 노출돼 공략당하는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오른손투수인 로모에게 1이닝을 맡겨 야브로가 이들 3명을 건너뛰게 하고 방안을 고안했다. 한 경기에서 타순이 3번 이상 돌면 선발투수들의 피안타율과 피출루율이 모두 훌쩍 점프하는 것을 감안, 야브로가 이들 3명을 만날 기회를 한 번이라도 줄이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절 월드시리즈 3회 우승을 경험한 베테랑 오른손투수 로모가 에인절스의 오른손타자 3명을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고 들어가자 마운드를 넘겨받은 야브로는 2회부터 8회 1사까지 올 시즌 가장 많은 23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에인절스 강타선을 단 4안타 1점으로 꽁꽁 묶어 탬파베이의 승리를 견인했다.

캐시 감독은 "선발투수가 타순을 두 번 이상 돌고 나면 훨씬 고전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면서 "에인절스의 1~3번 타자를 불펜이 맡아준다면 선발투수는 사실상 1~3번 타자를 7~9번 타자처럼 생각할 수 있다. 또 에인절스 타자들 입장에선 먼저 오른손 투수를 상대한 뒤 바로 왼손투수를 만나게 해 적응이 쉽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탬파베이가 1회초 4점을 선취하지 않았더라면 로모를 1이닝 더 던지게 할 생각도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로모는 1이닝만 던지고 내려갔고 이날의 실험이 대성공으로 끝나자 캐시 감독은 21일 경기에서 로모를 내보내 '2연타석 홈런'을 노렸다. 하지만 두 번째 경기는 탬파베이 타선이 오타니에게 꽁꽁 묶이면서 반타작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이날은 로모에 이어 마운드에 오른 매트 앤드리스가 비자책점 2점을 내줬고 사실상 선발투수였던 앤서니 밴다는 마지막 3.1이닝을 책임졌다.

이런 캐시 감독의 작전은 상당히 파격적이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여러 측면에서 앞뒤가 맞고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팀의 믿을만한 불펜투수를 아직 0-0인 상황에서 경기에 내보내 4, 5선발급 투수가 초반에 무너져 경기를 그르칠 가능성을 낮출 수도 있다. 1회가 아니라 2회나 3회에 등판하는 '선발투수'는 선발이 아니기에 등판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도 다소 덜 여지도 있다.

그 외에도 사실상의 선발투수가 상대팀의 상위타선을 상대하는 횟수를 줄이고 상대팀의 선발투수 분석에도 혼선을 가져오는 등 여러 가지 이점을 생각해 낼 수 있다. 21일 경기처럼 사실상의 선발투수가 마지막에 등판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아예 불펜 데이로 돌릴 수도 있는 등 변신의 여지도 있다.

물론 휴스턴 애스트로스처럼 선발로테이션이 탄탄한 팀들에겐 이런 방책은 굳이 필요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다지 효과적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탬파베이처럼 선발 로테이션 자리를 다 채우기가 버거운 팀 입장에선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린 이번 투수 운용법이 새로운 혁명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번 캐시 감독의 파격적인 실험이 당장 오랜 세월에 걸쳐 깊게 뿌리를 내린 선발 로테이션 제도를 당장 뒤흔들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앞으로 이런 실험이 더 잦아지고 그 결과에 대한 데이터 분석이 이뤄진다면 메이저리그에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변화의 물결이 몰아칠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뿌리 깊게 고착된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뒤엎는 새로운 시도인 만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과연 이런 새로운 실험이 야구에서 어떤 미래를 불러올지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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