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유명우 "목숨 걸고 올랐던 링, 돌아온 건..필연!"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4.26 10:50 / 조회 : 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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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링으로 돌아온 왕년의 챔프 유명우씨./부천=김창현 기자


그곳에 서면 허파는 쉼없는 펌핑으로 터질 듯, 한계까지 달아오른다.

그곳에 서면 근섬유는 과도한 부하에 쉼없이 파괴되고 근육은 젖산에 흥건히 젖어들어간다.

그곳은 무자비한 폭력의 땅이고 땀과 피의 영역이다. 시련을 주고 인내를 강요하며 희망의 단서를 찾게 만드는 곳. 링.

그가 스스로 청춘의 15년을 가두었던 공간. 그곳에서 그는 세계를 정복했고 6년을 지배했었다. 그곳으로 그가 다시 돌아왔다.

24일 부천의 버팔로 복싱짐을 찾아 전 WBA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작은 들소’ 유명우(54)를 만났다. 만년 동안을 기대케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 무색하게 세월은 세계를 제패한 챔피언조차 빗겨가지 않았다.

27년만의 만남. 그와의 첫대화는 지난 2월17일 타계한 고(故) 김진길 관장 얘기로부터 시작됐다. 고 김진길관장은 유명우가 한강중학교 1학년이던 1977년부터 사제의 연을 맺어 1993년 그가 은퇴로 링을 떠날때까지 16년간 그를 이끌어준 권투쪽에서의 또다른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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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회원의 펀치를 미트로 받아주고 있는 유명우./부천= 김창현 기자

당시 신림동집에서 용산의 한강중학교로 등하교를 하던 유명우가 언제나 눈길을 주던 곳이 봉천동의 대원체육관이었다. 항상 ‘남자다운 운동’ 권투에 매료돼있던 유명우는 1977년 홍수환의 카라스키야전 4전5기 경기를 보고는 진로를 결정해버리고 만다. 대원체육관 김진길 관장을 만난 첫 마디도 “저 세계챔피언 되려고 왔어요”였다고. 고 김진길 관장은 객기어린 소년의 꿈을 어르고 다독여 마침내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헌액(2013년)되는 세기의 복서로 이끌어주었다.

“은퇴후에 제가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잘 못모신 것이 맘에 많이 걸립니다. 아마 이런 마음의 빚, 평생 갖고 살아야할 것 같아요”라며 고인을 추모한다.

복서 유명우의 이력을 간단히 보자. 82년 프로데뷔, 85년 조이 올리보를 판정으로 꺾고 세계 챔피언 등극, 1991년 18차 방어전서 이오카 히로키에 타이틀 뺏긴후 1992년 설욕하며 타이틀 탈환, 타이틀 탈환후 은퇴. 프로전적 39전 38승 14KO 1패. 1993년 그렇게 그는 전설이 되어 링을 떠났었다.

“링이 지긋지긋하지도 않아요? 왜 다시 돌아왔어요?” “지긋지긋하죠. 지긋지긋은 한데.. 아무래도 권투 아닌 다른 것으로는 갈증을 풀 길이 없네요”

그는 은퇴후 오리고기집 설렁탕집 보쌈집 등 요식업과 예식장사업 등에 손을 댔었고 대단한 성공까진 아니지만 무리없이 운영해 나름 성공한 축에 들었다. 하지만 20여년 바깥 일(?)은 전혀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고 한다.

“일단 제 만족인데 복싱말고 다른 일을 통해선 사는 즐거움이나 기쁨을 못느끼겠더라구요. 주변사람들도 지겹지도 않냐? 예전같지않아서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복싱을 왜하고 있냐고 타박들도 많이 하는데 어떻게 된 게 복싱을 통해서만 인생의 희로애락이 제대로 느껴지니 도리 없죠. 필연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그렇다해도 권투판이 잘돌아가는 상황이라면 안 돌아왔을 수도 있는데 상황이 많이 안좋잖아요. 장정구형이랑 제가 마지막 영화를 누렸죠. 저를 포함한 권투인들이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내 권투판이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된 것 아닌가 싶은 부채의식도 있고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선수들과 호흡하고 어려움을 같이 헤쳐나가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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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버팔로 복싱짐 관장을 맡고있는 아들 유승민씨와 함께./부천= 김창현 기자

그는 현재 한국권투연맹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버팔로 프로모션대표를 맡고있다. 그는 버팔로 프로모션의 이름으로 2012년부터 지금까지 매 4분기마다 한차례씩, 20여회 이상의 대회를 열어 후배복서들이 뛸 무대를 마련해왔다.

“국제대회 같은 경우는 한번 열 때마다 보통 8천만원~8천5백만원 정도가 들어요. 매번 장소섭외 스폰서 섭외에 애를 먹죠. 중계료도 없고 중계가 붙을 경우 오히려 제작지원비를 부담해야합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크게 손해보지는 않아요. 꾸준히 대회를 진행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는 버팔로 프로모션을 차리며 고(故) 최요삼 선수의 친동생 최경호씨를 본부장으로 영입했다. 최경호씨는 형 최요삼의 후원으로 세미프로까지 골프를 했으나 형의 사망이후 골프를 정리하고 형이 하던 권투의 길에 발을 디뎠다. 본인도 직접 압구정등지에 요삼을 의미하는 ‘y3’복싱클럽을 운영하며 버팔로 프로모션일을 성심껏 보고 있다. 특히 영어에 능해 국제 매치메이킹에 톡톡히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버팔로 복싱짐은 베트남 호치민에도 있다. 2014년 대회 참석차 베트남 호치민을 찾았던 유명우 대표는 우연찮게 현지서 자리잡은 권투후배 김상범씨를 만났고 권투에 대한 열정을 잊지못하고 있던 그와 의기투합, 지난해 12월 호치민에 ‘커키(cocky:자만심에 찬, 건방진) 버팔로’ 도장을 개설했다.

이런 주변의 도움이 있지만 3개월에 한번 대회를 연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대회 마치고 정산하자마자 다시 다음 대회를 위해 선수, 장소, 스폰서, 방송 등의 섭외에 나서야 한다. 이날 인터뷰중에만 해도 5월22일 신도림 테크노마트에서 열리는 대회와 관련, 풍산프로모션 이거성 회장등 관계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유명우 대표는 지난 3월 11일 수원캐슬호텔 그랜드 볼룸서 'Battle of rooky' 국제대회를 개최한데 이어 오는 5월 22일엔 ‘휴먼크루즈 배틀 서바이벌’을 역시 국제 대회로 개최한다.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중국 등 5개국 선수들이 출전, 20여게임을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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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처럼 링으로 복귀한 유명우씨. 링은 그에게 필연이었다./부천= 김창현 기자

그렇게 매치메이킹 일만으로도 일년이 바쁘게 흘러간다. 거기에 연맹일도 해야하고 틈틈이 아직도 수원야구장 앞에서 운영하고있는 시골보쌈 가게도 살펴야하며 지난해 6월부터 아들 유승민(30)씨가 꾸려가고 있는 부천 도장까지 챙겨야 한다.

“어떻게 아들까지 복싱을 시키게 됐어요?” “원래 축구를 했어요. 중학교까진 선수로 뛰었는데 잘 안됐고 복싱을 해보고 싶다더라구요. 그래서 한번 해봐라 했죠. 저도 그랬지만 저 스스로 느낄때까진 해봐야죠. 아마추어로 뛰고 프로테스트까지는 마쳤는데 선수로는 안되겠다 싶더군요. 그런데도 복싱을 너무 좋아하는거예요. 그럼 너 선수 한번 키워봐라 했더니 가르치는데는 아주 소질이 있더라구요.”

종목에 상관없이 유명선수가 모두 지도자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천재일 경우 본인한테 당연한걸 범재들이 따라하지 못하는걸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권투로 하나가 된 부자는 틈나는대로 과학적인 트레이닝을 위해 외국사이트를 섭렵, 자료와 영상을 공유하며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자라나는 복서들에게 늘 강조한다. “사각의 링은 전장이다. 전쟁에서 지면 죽는 것이다. 링밖에서 흘린 땀이 링위에서 흘릴 피를 대신한다”고. “링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고 김득구 선배나 후배 최요삼의 경우도 있었잖아요.” 그래서 그는 매번 목숨을 걸고 링에 올랐다고 한다. 링사이드의 사람들이 경기에 환호하고 파이트머니를 가십거리 삼을 때 링위의 그는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는 링에서 거둔 38승의 비결을 “조금 더 참았던 것 뿐”이란 한마디로 정리한다. “저도 맞으면 아파요. 훈련은 힘들고 감량은 죽을 맛이었죠. 근데 그냥 조금 더 참았던 거죠” 그의 ‘조금 더’는 모두가 한계라고 인정할 상황에서의 ‘조금 더’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달 때부터의 조금 더다. 그것이 ‘헝그리 정신’이다.

예전 그가 방어전을 치를때마다 받는 파이트머니면 압구정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다고 했다. 17차 방어전이면 아파트가 17채다. “어린 나이에 번 돈이다보니 새나간 것도 많죠”라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버스기사 일을 그만두기 전까진 차도 사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던 그다. 사업으로 말아먹은 바도 없다. 결국 재정적으론 링에 돌아올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는 링으로 돌아왔다. 그의 링복귀는 옳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잘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또한 비웃을 일도 아니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에디 스크랩(모건 프리먼)은 이렇게 말한다. “권투에 마법이 있다면, 그건 그들이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신장이 파열되고 망막이 상하는걸 참아내며, 그 싸움을 치러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이외엔 볼 수 없는 어떤 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마법이다.”

유명우의 마법은 전적으로 그의 몫이다. 하지만 그의 마법에 기대 꿈을 키워가는 젊음들이 있다. 그의 마법이 갖는 또다른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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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2일 신도림 테크노마트에서 열리는 휴먼크루즈 배틀 서바이벌 국제경기 포스터.

..많이 더운 날이었다. 충무로 대한극장 옆 3층에 자리잡은 동아체육관은 휑했다. 상고머리 작은 복서 한명만이 샌드백을 코앞에 두고 두드리고 있었다.

관장실의 김현치 관장은 줄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샤워까지를 마친 선수가 들어왔다. WBA주니어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유명우였다. 지금은 기억나지않지만 여러 이야기가 오고갔다. 이오카 히로키와의 18차 방어전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유명우가 던진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난다. “이번 경기 해외중계권료는 어떻게 되지요?” 순간 김현치관장의 부채질이 잠시 멈추는 것이 곁눈으로 느껴졌다.

기억에 당시만해도 해외중계권료에 대해 아는 선수들은 많지 않았다. 파이트머니처럼 매니저 얼마, 트레이너 얼마로 정해진 규정도 없었다. 선수에게 최소한 얼마는 준다는 정도의 러프한 규정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 체제 경비 등으로 퉁치는 경우가 많았다. 유명우 본인도 17차 방어전까지를 국내에서만 치른 터였다. 그는 자신의 매니저와 기자를 앞에 두고 해외중계권료에 대해 매조지를 지어두는 야무짐을 보였다. 27년전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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