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한용덕 "한화는 하나"..'용덕매직'의 시작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4.19 10:06 / 조회 : 3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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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덕 한화이글스 감독./삼정호텔=이기범 기자


“한화가 왜 이리 잘하죠?”

18일 이른 오후 삼정호텔 커피숍에서 한용덕(53) 감독을 만나자마자 물색없이 튀어나온 질문이다. “하하하, 선수들이 많이 고팠나보죠.” 자칫 기분 나쁠 수 있는 질문을 한감독은 유쾌하게 웃어넘긴다.

4연승후 1패, 다시 17일 두산전까지 3연승중인 한화는 11승 8패 승률 0.579로 단독 3위에 올라있었다.(한화는 18일 경기서 두산에 4-5로 패해 18일 현재 승률은 0.550이다.) 감독입장에선 당연히 기분좋을 일이다. 하지만 40여분 인터뷰를 하며 한용덕 감독은 원래 ‘유쾌한 캐릭터’라는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즐거운 야구를 추구한다. 마무리캠프와 오키나와 전훈장서 그는 저녁훈련을 자율로 돌렸다. 단체 그라운드 훈련은 하루 4시간에서 4시간 30분 정도에 불과했다. 기본적으로 그는 “야구는 상대적으로 정적인 운동이고 생각할 시간이 중요한 운동이다.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기 것을 찾아가야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는 선수들에게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주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효율을 높이자면 선수들 모두 야구를 즐겁게 대하도록 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프로에서 17시즌을 치른 본인의 경험을 통해 확립한 야구관이라고 한다. 한감독은 선수단이 생각보다 빠르게 의식을 바꿔줘 심적으로 편하게 시즌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밝힌다.

전날(17일) 경기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선발 윤규진의 교체타이밍에 대한 질문. 5이닝을 잘막은 윤규진은 6회 들어 선두타자 류지혁과 정진호에게 연속안타를 맞았고 후속 최주환에 볼넷을 허용, 무사만루상황에서 박상원으로 교체됐다. '구위가 떨어질 시점였고 연속안타를 허용했다면 바로 교체했어야 하지 않나?' 라는 질문에 한감독은 “선발이라면 기본 6이닝을 막아줘야 된다. 90개 가까이 던지며 규진이도 힘이 떨어진게 보였지만 그 고비를 넘어서길 기대했다. 한 게임만 본다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갈 때 선발이 5이닝만 막고 내려가서는 안된다. 교체타이밍을 늦게 가져간 이유다.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조금 더 참는 부분이 있다” 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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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아웃의 한용덕 감독./사진= 뉴스1

박주홍, 박상원, 서균 등 불펜의 새로운 얼굴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팀을 맡으며 가장 우려된 부분이 노쇠화였다. 특히 기존 불펜투수들이 너무 지쳐있었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젊은 친구들로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우리팀 미래를 생각하면 특히 젊은 투수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게 경험이다. 짧게 짧게 끊어 기용하는 이유다. 한타자 두타자를 상대할 때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길 확률이 높다. 그렇게 자신감을 쌓으며 투구를 늘려가는 게 중요하다. 어제 (박)상원이가 1.2이닝 막아줬는데 반갑기도 하지만 내가 좀 급한가싶은 반성도 든다”고 말한다.

외국인 투수 샘슨과 휠러에 대해선 “내가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해서 발탁한 선수들이다. 로테이션을 계속 돌린다. 직접 대화를 나누기엔 감독자리가 바쁘다. 하지만 담당 코치등과는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잘해줄 걸로 믿는다”며 여전한 신뢰를 보냈다.

올시즌 누굴 제일 기대하냐는 질문에 “누구하나 집어서 말할순 없다. 모든 선수들에게 똑같이 기대하고 있다. 모두가 잘해야 팀이 성적을 낸다. 모든 선수들을 자식처럼 동생처럼 대하고 있다”고 답한다. 한감독은 이어 “나는 ‘우리’ ‘같이’란 말을 좋아한다. ‘내가 감독이 되면’이란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부터 ‘단합된 야구’를 지향점으로 삼았다. 한두명의 스타에 연연하지 않고 그라운드에 선 나인(9명)들이 같은 숨을 쉬는 야구를 하고 싶었다. 시즌초 4연패할 때(3월29일 NC전~4월1일 SK전) 오히려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부연하면서 “‘한화는 하나다’ ‘하나된 한화’ 어감 좋지 않아요?”하고 되묻는다.

이와 관련 그의 옛날을 되돌아봤다. 그는 17시즌 2080이닝(통산3위) 120승(통산 10위) 16완봉승(통산7위) 1291삼진(통산5위)를 기록한 레전드급 투수였다. 패전도 118패(최다4위)를 기록하고 있다. 타이틀을 따낸 적은 한번도 없어 ‘무관의 투수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118패'와 '무관'이란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그는 이글스 마운드의 ‘마당쇠’였다. 팀 사정에 따라 선발,계투, 마무리를 마다않고 던졌다.

“힘들지 않았나요?” “전 팀이 우리 집이고 야구가 집안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집에 먼지 쌓이면 쓸고 닦고 하잖아요. 그래서 깨끗해진 것 보면 즐겁고.. 집일하면서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없잖아요. 이글스 떠나서 두산가서도 낯설지 않았던 게 금방 내집 같아지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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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덕 감독은 '우리' '같이' '하나'란 말을 좋아한다.

“야구가 그렇게 좋았나요?”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죠”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의 부모님은 대전이 고향이다. 아버지의 직장일로 대구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때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천동초등학교를 다닌다. 당시 교감선생님이 대전지역 야구의 대부격인 사람으로 한용덕이 3학년때 야구부를 창단했는데 당시로선 체구가 큰 편였던 한용덕이 눈에 띈다. 마침 큰아버지도 다른 학교 교감으로 재직중이어서 두 사람 사이에 의견교환이 있었고 큰아버지의 적극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다. ‘야구의 야’자도 몰랐던 한용덕의 야구인생 시작이다.

충남중학교 시절 유격수로 팀을 두차례 우승시켰고 그 덕에 천안북일고로 스카우트 된다. 1학년때 당시 김영덕 감독의 관사 당번병 역할을 하면서 눈도장을 찍었지만 고1 지나고 나서도 키가 162cm에 머물러 경기에는 많이 나가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무릎이 아파 병원을 가보니 오스굿씨병이란 진단을 받고 고2 말엽 6주간 깁스를 하게 된다. 이동안 키가 많이 크게되지만 뚜렷한 성적을 올리지 못한채 부산 동아대에 얹혀가듯 진학한다. 대학 진학후에도 무릎통증은 계속되고 다시 관절염 진단을 받는다. 결국 설 명절 때 대전 집을 다녀간 다음날 그는 자퇴를 하고 짐싸서 대전으로 복귀한다.

“부모님 반응은요?” “기함하셨죠. 명절 잘쇠고 내려가 다음날 짐싸 올라왔으니.. 하지만 어려서부터 제 결정을 존중해주셔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위로 누나, 아래로 남동생 둘, 3남1녀의 장남 대우를 받은 모양이다. 그렇게 한용덕의 야구 1기는 속절없이 끝났다.

“그냥 하라고 해서 했던 야구였고 미래설계를 하기엔 어렸고..야구한다고 못 놀았던 분풀이하듯 많이 놀았죠. 방황도 하고. 돈떨어지면 공사판 잡부일 해서 또 놀고.. 전화기 만드는 회사에도 두달 다녀보고.. 근데 퇴근하고 나면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고민이 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렇다고 답도 없고.. 그래서 군대부터 해결하자 했죠. 3년은 고민 안해도 될 것 같았는데 무릎이 그 모양인지라 보충역 판정받아 방위 14개월로 땡쳤죠.”

소집해제후 그는 무릎 관절경 수술을 받았고 특별한 과정없이 그저 걸어다니는 정도로 재활에 성공한다. 청춘의 고민은 많고 시간은 무료하고.. 우연히 찾은 야구장에서 프로 투수들이 공 던지는 걸 보니 영 신통치 않았다고 한다. “내가 던져도 저만큼은 던지겠다”싶어 생각해보니 할 수 있고 잘하는게 야구인데 야구를 다시 해보자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고..

이후 나름 수줍은 성격탓에 동네 후배 하나 엮어 야구장 배회를 시작한다. 빙그레 이글스엔 조용호 김상국등 아는 선배들이 많아 혹시 마주치면 빌미 삼아 줄을 잡아볼 궁리로. 하지만 정작 훈련하는 야구장안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구장밖만 맴돌다 돌아오자 동행 후배가 분노했고 “말 못하면 형 안봐!”하는 후배 채근에 그라운드에 들어섰단다. 그리고 마침 당시 매니저 일을 보던 아는 형의 눈에 띄어 배팅볼투수가 된다. 장종훈에 이은 또 하나의 연습생 신화의 시작이다.

“그제서야 알았어요. 3년의 공백후에야.. 내가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구나. 숨이 턱에 차도, 팔다리가 파들파들 떨려도 웃음이 떠나지 않는거예요” 이후 선수부터 감독에 이르기까지 한용덕에게 야구는 ‘즐거운 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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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감독대행시절 데뷔전 첫승을 따낼 당시의 한용덕감독

그는 술을 좋아하고 스스로 다혈질이라고 말한다. 젊어서는 두가지가 어우러져 사고도 제법 쳤다고 한다. 대학교 자퇴같은 에피소드를 보면 확실히 그런 편인 모양이다.

그런 그가 대수롭지 않게 설렁설렁 얘기하는 지난 일들. 옛날얘기라서 그럴 것이다. 20대의 그는 비장했을 것이다. 운명에 베였다 생각했을 것이고 인생이 쓰디쓰다 느껴 술이 달았을 것이다. 그 나이때 꿈없는 밥벌이란 것이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그렇더라도 야구에 대한 희망 역시 위험한 덫일 수 있었다. 천금같은 청춘을 낭비하고도 배팅볼 투수에서 마감할 수도 있었다. 그런 위험한 도전 끝에 지금의 한용덕 감독이 있다.

“굴곡이 많았잖아요. 나이 먹는다는게 결국은 경험치인데 나이값만큼의 경험은 했다고 생각해요. 시야도 넓어지고 이해의 폭도 제법 넓어졌다 생각합니다.”

다혈질의 그가 짓는 너그러운 표정이 마냥 위장만은 아닌 것이 결국 그런 경험치 덕일 것이다. 그가 보낸 20대, 30대를 지금 보내는 선수들에게 그는 자신이 향유했던 ‘야구의 즐거움’을 전해주고 싶어한다. ‘용덕 매직’은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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