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다시 그라운드에 선 김재박, '또다른 김재박'키운다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4.12 09:38 / 조회 : 4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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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꿈나무들을 지도하며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는 김재박 전 감독.


그는 사실 작았다. 힘도 달리는 편이었다. 대신 감각은 있었다. 지고 싶지않다는 근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하드웨어의 부실함은 그를 고등학교때까지 변방에 머무르게 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라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불세출의 유격수’ 가 됐다. 그가 김재박(64)이다.

그는 바닥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다. 아울러 김응룡 감독에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 4회를 달성한(류중일 감독과 동률) 감독이다. ‘야신’ 김성근 감독이 3회, ‘국민감독’ 김인식 감독과 강병철, 김태형 감독이 2회 우승으로 그 뒤를 잇는다. 당연히 명장의 반열에 올라있는 지도자다. 그래서 야구 꿈나무들에게 가장 해줄 얘기가 많은 선배 야구인 중 한명이 김재박 전 감독이다. 그런 그가 2018년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야구 재능기부에 나서고 있다. 류중일-이종범-박진만-강정호 등 최고를 다투는 후배 유격수들의 롤모델이자 계보의 시작. 그를 지난 10일 만났다.

“지난 겨울엔 필리핀에 머물면서 전지훈련 온 학생선수들을 가르쳤어요.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에 야구장 6면이 조성돼 있는데 임채영이라고 경남대랑 삼성에서 포수 생활한 친구가 장기임대해 전훈장으로 활용하고 있죠. 그곳에 머물면서 4개 학교 선수들을 지도해 봤습니다.”

2009년 9월 LG사령탑을 내려와 2010년부터 KBO경기운영위원으로 7년을 보낸 김감독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일은 새삼스럽고도 즐거운 일로 다가왔다. “야구현장을 뜬 것은 아닌데 역시 직접 지도하기는 오랜만이어서인지 제법 들뜨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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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미라클팀을 지도하고있는 김재박 감독.

그때를 시작으로 김재박 감독은 마산 용마고, 양산 물금고, 영남대, 배명고, 독립야구단 연천 미라클 등을 돌며 야구를 향한 젊은 꿈들을 독려하고 있다. “학교를 한번 맡으면 한 3~4일씩 연이어 지도하는 식이죠. 선수들도 열성이지만 감독 코치들도 배우고자하는 열의가 대단해요. 그런 뜨거운 마음들을 마주하다보면 이렇게 그라운드에서 여전히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는 거지 다리 떨릴 때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라운드에서 젊은 열정들과 가슴 떨리게 부대끼는 김재박 감독도 그런 심정인 모양이다.

그에게 야구란 뭘까? “열 살 무렵부터 공갖고 놀면 행복했어요. 대구초등학교 5학년때 야구부에 들어갔고 초등학교때 야구했으니 경북중학교 가서도 당연히 하는 걸로 알았죠. 경북고등학교 가고 싶었지만 실력없다고 거부당했을 때 마침 서울 대광고에 야구부가 생겨 진학했죠.” ‘그럼 실력도 변변찮으면서 야구 유학을 했단 얘긴가?’ 싶었는데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경북중 2학년때 아버지 사업 관계로 서울로 이사를 했어요. 제가 대구 남아 하숙을 했던 거죠. 경북고에 진학했으면 계속 대구서 하숙을 했을텐데 그게 아니어서 본가에 합친거죠.”

대광고를 졸업하면서는 다시 대학진학이 문제가 됐다. 한양대를 가고 싶었지만 다시 경북고때처럼 실력없단 이유로 진학을 거부당했다. 경북고와 한양대에서 두 번씩이나 김재박을 거부한 감독이 서영무 감독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때가 1973년. 마침 영남대가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그는 다시 고향 대구로 내려와 야구를 계속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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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고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는 김재박감독.

고등학교와 대학교, 신생팀 아니고는 그가 뛸 수 있는 팀은 없었던 셈이다. 그런 두차례의 좌절은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졸업당시 키가 163cm. 덩치야 어쩌지 못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약한 체력 보강은 그에게 시급한 문제였다. 마침 그가 영남대 야구부로 진학했을 때 비록 팀은 창단했지만 감독도 부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틈을 이용해 그는 웨이트와 러닝에 올인했다. “당시 야구선수들은 근육 망가진다고 다른 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던 시절였어요. 당구도 치지못하게 하는 판에 웨이트라는건 용납이 안되는 분위기였죠.” 체육학과 동기와 선배들을 통해 체계적인 웨이트 방법을 익히고 체조부의 여자동기와 산을 달리며 기초체력을 쌓았다고 한다.

배성서 초대감독이 그해 여름 부임했을 때 그는 11~12초대의 주력과 강견을 선보일 수 있었고 그의 시위를 인상적으로 지켜본 배감독은 그를 유격수 3번 타순에 기용한다. 신생팀 영남대가 전국 단위의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이 창단 이듬해인 1974년부터. 그동안 안크던 키가 1년에 10cm이상 크며 볼만한 유격수로 성장한 김재박은 추계대학선수권대회에서 타율 0,343을 기록하며 영남대를 3위로 끌어올렸다. 그 활약으로 대학선발에 뽑혀 일본 원정도 다녀온다. 1975년 춘계대회 MVP,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의 주역. 1976년 추계대학선수권대회 우승을 끝으로 영남대를 졸업한 김재박은 1977년 창단한 신생 한국화장품에 입단, 그해 타율 0.439, 13홈런, 37타점, 24도루를 기록하며 신인상, MVP, 3관왕상까지 차지, 무려 ‘7관왕’이란 전무후무한 위업을 달성한다. 말 그대로 오랜 기다림 끝에 만개한 그의 기량은 이후 꽃몽오리 시절보다 더 오랫동안 활짝 핀 채 한국야구를 장식했다.

“해온 게 야구고 할 수 있는 게 야구라서 야구를 계속한 거죠. 야구 외에 다른 길을 생각조차 못했어요. 무슨 거창한 인생계획 속에 야구가 포함됐다기보단 그냥 야구가 생활이었던 거죠.” 김재박에게 야구는 숨쉬기와 같은 ‘당위(當爲)’였다.

“아마 지금 야구를 하고 있는 많은 학생들도 나와 같을 거예요. 그래서 해줄 말이 많아요. 거부당해 봤고 소외당해 봤던 경험, 그리고 이겨내고 환희를 맛봤던 경험이 다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내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잖아요. 그래선지 귓등으로 흘려듣는 친구들은 없는 것 같더라구요.”

그는 교육에서 특히 야구 기본을 강조한다. “기본, 기본들 하는데 사실 기본을 제대로 아는 경우가 드물다”는 그는 정확한 수비의 자세와 스텝, 타격의 메카니즘, 주루플레이의 정석을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그의 지도에 웨이트 트레이닝과 집중력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강조되는 것은 물론이다.

“웨이트는 정말 중요해요. 현대시절 우리 선수들 장수한 친구들이 많아요. 박진만이는 19살에 들어와 20년을 선수로 뛰었잖아요. 웨이트를 해야 부상을 방지할 수 있고 컨디션을 관리할 수 있어요. 또 몸 컨디션이 좋으면 집중력도 향상되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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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영화배우 신성일씨와 골프장에서.

재능기부에 나서며 그는 스스로를 ‘바쁜 백수’라 칭한다. 불세출의 야구선수지만 그는 축구동호인이기도 하다. 조기축구계의 명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며 이회택 전 감독등 축구계 인맥도 넓다. 경북중 시절부터 연을 맺은 원로 영화배우 신성일씨와는 수시로 만나고 챙기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는 당구도 700을 치고 골프도 싱글 수준이다. 두 딸과 아들, 3남매를 모두 출가시킨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바쁜 스케줄이지만 그는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김재박은 그라운드에서야 오롯이 김재박일 수 있기 때문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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