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52시간 근무 도입..韓영화계 위기냐 기회냐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8.04.09 11:00 / 조회 : 1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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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한국영화 동반성장 이행협약 선포식에 영화인들이 참석해 논의를 하고 있는 모습. 2018년 7월부터 영화계 주52시간 근무가 도입되면서 다시 한 번 동반성장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할 전망이다/사진=머니투데이 스타뉴스


주 52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2월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영화계가 뒤숭숭하다. 한쪽에선 위기라는 목소리가 큰 반면 한쪽에선 근로환경 개선이라는 반응이 많다.


반응이 어떻든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되는 7월부터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산업이 바뀌는 건 분명하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통과돼 7월부터 영화계는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된다. 그간 영화계와 방송계는 업무적 특수성으로 근로기준법상 특례업종(방송업, 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으로 분류됐다. 7월 법이 시행되면 주말 근무를 포함해도 최대 68시간만 가능하며, 유예 기간이 끝나는 내년 7월부터는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주 52시간 근무만 허용된다.

영화계는 이 같은 상황을 앞두고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이다. 밤샘 촬영과 생방송 체제로 진행되는 지금도 방송계는 A팀, B팀으로 나눠 촬영이 진행되는데도 52시간 근무가 적용되면 제작비가 30%가량 상승될 것으로 보고있다. 영화계에서도 근로기준법 개정안 적용으로 A팀, B팀으로 나눠 진행할 경우 적게는 30%에서 많게는 70% 가량 제작비가 상승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PGK(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관계자는 "근로 환경이 개선되는 건 시대적인 방향이다. 그렇지만 법이 너무 앞서 갔다"고 토로했다. 개도 기간이나 산업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일괄적으로 적용되면 산업에 위기가 닥칠 수 밖에 없다는 것. 이 관계자는 "현재 기준으로 주 52시간 근무를 적용해 시뮬레이션 해 본 결과 많게는 70% 가량 제작비가 늘어난다"며 "제작 자체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은 당장 10억 미만 저예산, 독립영화들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간 영화 표준계약서는 독립영화들의 열악한 제작 환경을 고려해 10억원 미만 영화들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적용되면 주 52시간 근무를 독립영화들도 똑같이 적용받게 된다. 평균적으로 하루 8시간 근무를 적용하면, 스태프를 구하기 힘든 독립영화계는 촬영기간과 제작비용이 크게 증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제작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한국영화의 풀뿌리인 독립영화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상업영화도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되면 A팀, B팀으로 나눠서 촬영을 진행하거나 촬영 기간 자체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제작비 상승은 불가피하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산업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우선 프리 프로덕션 과정이 길어질 수 밖에 없다. 최대한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 찍을 수 있는 장면을 사전에 정교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촬영기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처럼 현장에서 감독이 즉흥적으로 촬영장면을 바꾸거나 마음에 드는 장면을 찍기 위해 수십번 다시 촬영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할리우드처럼 정해진 장면 이상을 촬영할 경우 다른 장면 촬영을 못하게 된다. 그럴 경우 감독 권한이 막강했던 현재 상황에서 프로듀서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찍을 수 있는 컷의 결정을 프로듀서와 제작자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사전 작업을 확실하게 해서 원하는 컷만을 찍어야 한다. 한국영화의 장점으로 여겨졌던 감독의 현장 즉흥성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되면 한국영화의 질적인 하락도 예상된다. 현장에서 내놓는 아이디어나 상황 변경이 사실상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태프에게 무료로 제공되던 밥차와 숙소 등도 더 이상 제공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현재 표준계약서가 적용되면서 영화 막내 스태프가 월250만원 이상 수입이 보장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돼 인건비가 추가로 상승하면, 법에 적용받지 않은 혜택을 줄여서라도 제작비를 줄일 공산이 크다.

반면 주 52시간 근무로 근로 환경이 개선되면 영화 스태프, 특히 촬영 조명 스태프가 안정적인 직업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프리랜서로 불규칙한 작업 환경에 머무는 게 아니라 수입과 근무 환경이 안정적이게 된다. 열악한 환경을 감내하며 영화감독 데뷔, 촬영감독, 조명감독을 목표로 삼지 않아도 전문 직업인으로서 프로듀서, 촬영 세컨드, 조명 세컨드 등이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표준계약서 적용을 받지 않는 미술, 의상, CG, 음악 등 다른 영화산업 종사자들도 주 52시간 적용으로 임금 상승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화산업 종사자들 평균 임금이 더욱 상승할 전망이다.

문제는 주 52시간이 적용되면서 단기적으로 투자 환경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표준계약서 도입으로 현재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는 50억원을 넘어섰다. 주 52시간 근무가 도입되면 평균제작비가 70억원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럴 경우 다양한 중저예산 영화는 더 이상 투자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흥행이 보장된 감독과 배우들, 흥행 가능성이 큰 장르영화들에 투자가 집중될 공산이 크다. 한 투자사 관계자는 "아직 얼마나 제작비가 상승될 지는 불명확하다"면서 "분명한 건 중급 예산 영화라는 현재 개념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과 현재 메이저 투자사들 내부 변화가 맞물리면서 당장 7월 이후 제작에 들어가는 영화 자체가 적어진 것도 위기감을 부채질한다.

한국 최대 투자배급사인 CJ E&M은 지난해 저조한 흥행성적을 이유로 올 초 대규모 문책성 인사가 단행됐다. 이번 인사를 놓고 영화계에선 CJ E&M이 영화 투자를 줄이고 자체 제작에 중점을 두려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방송쪽 인력이 영화 투자 인력으로 배치되고, 투자 인력은 자회사인 JK픽쳐스 파견 등 제작 인력으로 변경됐기 때문.

지난해 최대 실적을 거둔 쇼박스도 내부 사정으로 대표가 바뀌면서 한동안 투자 결정이 위축됐다. 롯데시네마는 롯데쇼핑에서 롯데컬처웍스로 6월부터 독립하지만 영화 투자보다는 극장 사업 해외 진출과 OTT(Over The Top: 인터넷 망을 이용한 영상 콘텐츠 서비스) 등 신규 플랫폼 사업 오픈 등에 더 중점을 둔 변화를 꾀하고 있다.

투자사들의 내부 변화로 투자 환경이 위축된 가운데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이란 변화가 가세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명 감독, 제작자들이 2016년, 2017년에 영화들을 쏟아낸 뒤 차기작 준비에 들어가는 기간과 맞물리면서 내년 라인업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악재다. 올해 한국영화 기대작들은 상반기에 몰려있다. 영화계에선 올해 한국영화 점유율이 50%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도 하고 있다.

내부와 외부 환경이 단기적으로 영화산업을 위축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

물론 올해는 신규 투자사들이 영화산업에 뛰어들어 변화도 예상된다. 셀트리온과 화이브라더스 등이 영화 투자 배급사업 진출을 고려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영화산업이 일대 전환점을 맞고 있다.

영진위 정책연구원 도동준 팀장은 "영화계 내부에서 주 52시간 근무 도입으로 긍정과 우려 목소리가 모두 나오고 있다"며 "제작비 상승으로 인한 우려와 잘못된 관행이 이번 기회에 개선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영진위에서도 어떤 변화가 이뤄질지 지켜보며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영화계에선 아직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놓고 공청회나 대책 마련을 공론화하지는 못하고 있다. 프로듀서조합 따로, 제작가협회 따로, 독립영화계 따로, 산업노조 따로, 각각의 입장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영화제작가협회에서 최근 이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긴 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거나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과연 주 52시간 근무 도입이 한국영화와 한국영화산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 위기를 맞게 될지, 기회가 될지, 중대한 기로에 선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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