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담배 연기 흐르는 집 없는 여인 여행기

[리뷰] 소공녀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8.03.14 16:48 / 조회 : 1169
image


담뱃값이 올랐다. 가사도우미로 버는 돈 갖고는 월세와 약값, 한잔의 위스키와 담뱃값을 감당할 수 없다.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소공녀'의 미소는 집을 포기한다.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포기. '소공녀'는 그렇게 출발한다.

청소하고 밥하고 설거지하는 일. 미소는 이 일을 좋아한다. 그렇게 돈을 벌어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걸 좋아한다. 한잔의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연인. 비록 난방비도 없어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사랑을 미뤄야 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돈이 없는 건 불편한 일이지, 불행한 일은 아니다.

담뱃값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올랐다. 벌어들이는 돈은 그대로니 뭔가를 포기해야 한다. 미소는 행복을 포기할 수 없기에 집을 포기한다. 대학교 때 같이 밴드를 하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하룻밤씩 신세를 지기로 한다.

쉽지 않다. 담배 물고 술 마시며 노래하던 그때와는 다들 다르다. 누구는 수액 맞아가며 대기업에서 일한다. 누구는 시부모 모시고 같이 산다. 누구는 기껏 아파트 마련했더니 아내가 떠났다. 누구는 아들 결혼이 꿈인 부모와 같이 산다. 누구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 그림 같은 저택에서 산다. 미소가 하룻밤씩 머물 때마다 각자의 아픔이 드러난다. 미소는 계란 한판 들고 이집저집을 오가며 여행을 시작한다.

'소공녀'는 작은 행복과 포기를 이야기하는 여행담이다. 작은 모험담이다. 이 여행에는 외눈박이 거인도, 눈이 백개인 괴물도, 인어도 없다. 그저 각자의 지옥을 품고 사는 쓸쓸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미소는 포기해서 자유를 얻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포기하지 못해 품고 있는 지옥들. 미소는 때로는 청소를 해주고 밥을 해먹이며, 때로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그 지옥들을 여행한다. 마치 성녀 같고, 마치 보살 같다.

'소공녀'는 성장담이 아니다. 여느 여행기와 여느 모험담이 주인공의 성장을 그린다면, '소공녀'는 주인공의 성장을 그리지 않는다. 미소는 이미 포기로 완성된 존재인 까닭이다. 그녀의 여정은 포기하지 않는 삶들을 지켜보는 과정이요, 위로하는 방문이다. 목표나 목적이 없기에 그녀의 여행은 끝이 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포기하는 삶이 밀려나는 걸 덤덤히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소공녀'는 누군가에는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는 쓸쓸함을 안긴다.

전고운 감독은 미소의 여행에 스테레오 타입의 친구들을 준비했다. 이 전형적인 캐릭터들은 자칫 위험하다. 찌질한 남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성 캐릭터들은 선입견에 기댔다. 술집 다니고, 자기 일에 매몰돼 친구를 외면하고, 결혼은 미친 짓이고, 돈 많은 남편에 책 잡힐까 두려운 각각의 여성들. 이 선입견에 기댄 여성 캐릭터들을 구원한 건 각각의 배우들이다. 성녀 혹은 보살 같은 미소라는 캐릭터 덕이다. 이 여성 캐릭터들은 미소를 만나, 비로소 지금을 얻기 위해 포기했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 제목이 '소공녀'인 건, 그래서 아이러니하다. 소설 '소공녀'처럼 한순간 모든 것을 잃었던 귀한 집 소녀가 키다리 아저씨와 돌아온 아빠 덕에 다시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영화 '소공녀'는 남자들 속에서 힘겹게 버텨가는 여자들을, 집 없는 여인이 살피고 듣고 위로한다. 청소와 밥을 해주며.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미소를 연기한 이솜은 좋다. 움직이는 식물 같다.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로 살아가는 식물처럼 그려냈다. 감정을 강요하지도 토해내지도 않는다. 섣불리 위로하지도 구걸하지도 않는다. 늘 똑같은 안재홍보단 강진아 김국희 이성욱 최덕문 김재화 조수향 등 조연들이 훨씬 빛난다. 영화에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온기를, 때로는 쓸쓸함을 불어넣는다.

'소공녀'는 묻는다. 지금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지금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좋은 질문이 좋은 답보다 중요하다는 걸 입증하는 영화다.

3월22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추신. 엔딩 크레딧 이후 늘 차기작을 소개하는 쿠키 영상을 담는 광화문시네마 작품답게 이번에도 재밌을 법한 차기작 쿠키 영상이 등장한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라인
  • 웨이보
  • 프린트
  • 이메일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