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야구인' 김소식, "아듀, 구덕야구장!..그동안 고마웠소!"

[김재동의 만남]

부산=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2.27 13:00 / 조회 : 7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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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를 마친 구덕야구장을 돌아보고 옛추억에 울컥해진 김소식 위원.


1962년 김소식의 부산고가 라이벌 경남고를 꺾고 화랑대기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포크레인도 부수지 못하는 사실이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3월28일 해태타이거즈와의 개막전서 롯데가 14-2로 승리한 것도 흙무덤에 덮일 수 없는 사실이다.

1984년 전기리그 1위팀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최다기록인 12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완투승을 거둔 사실도 잔디와 나무의 뿌리가 촘촘이 얽맬지라도 숨겨지지 않을 사실이다. 당시 최동원은 대구구장 1차전 완봉승, 구덕구장 3차전 완투승을 거둔후 잠실야구장서 치러진 5, 6, 7차전에 모두 등판, ‘시리즈 4승(1패)’이란 경이적인 철완을 선보이며 롯데를 우승으로 이끌었었다.

그렇게 ‘구덕야구장’이라 이름붙었던 이 그라운드에서의 모든 그 때는 아름다웠다.

구덕야구장은 공식적으로 1973년 8월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있으니 44년만에 철거된 셈이다. 하지만 김소식 위원의 회고에서도 그렇듯 이미 그 이전부터 그 자리에 존재했다. 김응용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장도 “73년이란 것은 아마 보수 개축한 것일 것이고 일제시대부터 있었다. 나도 개성중시절 그곳에서 야구했다”고 밝혔다. 부산시야구협회조차 “언제부터 구덕야구장이 시작됐는지에 대해선 사료가 없다”면서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에서 지난 1928년 야구경기를 하고있는 사진은 보유하고 있음을 밝혔다. 홍순일 편저 ‘한국야구사’연표에 따르면 1918년 5월5일 준공된 대정공원이 그 시작이고 1918년 6월9일 열린 부산야구대회가 첫 야구대회로 기록돼있다. 그에 따르면 구덕야구장은 100년간 그 자리에서 부산야구를 키워온 셈이다.

젊은 꿈과 열정, 환호와 절망이 공식적으로 44년간, 대정공원시절부터 따져 근 1백여년의 시간 속에 쟁여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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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에서 제외된채 남겨진 매표소와 출입구 모습. 부산시는 구덕야구장 기념관 용도로 사용할 것을 검토중이다.


철거가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26일 김소식(75) 전 야구해설위원과 구덕야구장을 찾았다. 썰렁하게 매표소만 남은 야구장 부지는 휑했다. 다가올 6월이면 잔디와 나무와 체육시설들로 꽃단장한채 시민생활체육공원으로 거듭날 터이지만 철거공사가 마무리된 2월26일의 구덕야구장 공사현장은 맑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전했다.

이제는 노년이 된 김소식위원으로선 휑해진 그 자리를 지켜보기가 많이 서러운가 보다. 늙어간다는 것, 피폐해진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아무 잘못도 없는데 세상의 천덕꾸러기로 물러나 결국 사라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억울함과 무상함을 부추긴다.

예전 3루쪽 스탠드가 있었던 방향을 망연히 바라보던 김소식 위원의 얼굴에 ‘울컥’ 감정의 요동이 떠오른다. “저기에 계셨어. 3루쪽 스탠드 끝에 두분이 하얀 모시옷을 입고 계셨어. 우리 부모님이 야구하는 막내아들 모습을 저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켜보신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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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야구장 철거현장서 라이벌 경남고출신의 후배 지인을 만나 담소중인 김소식위원. 철거를 마친 야구장 자리가 휑하다.


위로 형 둘이 럭비를 했었고 그 뒤가 별로 좋지않았던 터라 부산중 시절 반에서 5등권에 들었던 막내 김소식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부모님. 야구를 하겠다는 선언에 아버지는 혁대로 종아리를 내리치기까지 하셨다. 그렇게 야구를 반대한 부모님들의 짐짓 외면은 부산고 3학년 시절까지 이어졌고 “막내가 나와요”란 주변의 채근에 처음으로 못이기는척 구덕야구장을 찾은 두분이었다. 혹시 아들에게 누가될 새라 정갈하게 다려진 모시옷을 차려입으시고 정성 가득한 도시락도 찬합에 준비해오셨다고 한다.

“경기중에 가끔 부모님쪽을 쳐다보는데 볼때마다 연신 두리번거리시기만 하는 거라. 아들을 찾는 거였어. 투수라는게 뭐하는 건지도 모르셨으니 똑같은 유니폼에, 똑같은 모자에, 똑같이 까만 애들 틈에서 우리 막내 어딨나 하셨던 거지. 그때 느낌이 그랬어. 반갑고 안심되고 그런거. 당신들이 반대하는 야구를 하고있지만 여전히 날 사랑하시는구나하는 안도감 같은거”

경기가 2-1 승리로 끝난후 관중석의 부산고 응원단이 ‘나이스 피처 김소식!’을 연호하고 선수들에 무등태워져 그라운드를 돌 때에야 두분은 확실히 당신들의 막내아들을 확인하고 미소지으셨다고 한다.

부모님 생각에 눈자위가 붉어진 김소식위원에게 동행한 부산시 이상길 체육진흥과장이 묻는다. “위원님 야구하실때도 저 아파트 있었나요?” 길건너편 대신문화아파트다. “아니요. 우리때 저자리에는 전차종점이 있었어요.” “아 그렇구나. 저희때 야구경기 한번 열리면 저 아파트 복도가 사람들로 아주 빼곡했어요.” 구덕야구장에 관한 또다른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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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야구장을 마주한 아파트 모습. 경기가 열릴때면 아파트 복도가 빼곡하도록 관전열기가 높았다고.


현장을 벗어나 길로 나선 김소식 위원이 저만치 길건너편 한 지점을 가리킨다. ‘00슈퍼’란 상호께를 가리키는 김위원. “저 자리에 중국집이 있었어. 그때가 1962년 청룡기 지역예선때였지. 경기장 익히려고 구덕야구장서 연습 가볍게 하고 다음날이 경기날이라 그 중국집에서 식사하면서 장비를 맡겨놨단 말이지. 경기 마친후 식사도 거기서 하기로 예약하고. 근데 다음날 장비찾으러 가보니 초상이 난거라. 그집 안주인이 밤새 돌아가신건데 참 민망하지만 할 수 없이 장비를 챙겨나왔지. 근데 감독님 얼굴이 싱글벙글야. 요번대회 우리 일낼거 같다면서... 그게 뭔고하니 원래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 미신이 있었어. 상사(喪事)를 목격하면 성적이 좋다는. 그래서 어떤 선수는 경기앞두고 신문 부음란 훑어서 현장까지 찾아가기도하고 했다니까.”

그 덕인지 그전까지 4전4패의 부산고는 그 경기부터 이기기 시작해 청룡기 우승을 차지하고 화랑기 우승까지 차지했다.

50년도 훌쩍 넘은 추억들은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새록새록 김소식 위원의 얼굴을 홍조로 물들인다.

‘부산고 에이스’ 김소식뿐일까. 어우홍 성기영 김응용 박영길 강병철 허구연 김용희 최동원 윤학길 박동희 박정태 염종석 추신수 이대호 등 부산이 배출한 무수한 야구 스타들이 꿈을 키우던 곳인데..

철거된 것은 구장이 아니라 아름다웠던 시절의 꿈과 추억인듯해 안타까움이 가슴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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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야구장비를 맡겼던 중국집이 있었던 자리를 가리키는 김소식위원.


철거를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상길 과장은 말한다. “지역주민들의 민원이 많았다. 시설 노후화에 따른 위험과 슬럼화, 그리고 야구경기로 인한 소음과 소란등에 오랜 시간 시달려온 분들의 우려가 컸다. 6차례의 공청회도 거쳤다. 야구장 재건축의 안도 있었지만 결국 철거후 생활체육공원안으로 결정됐다.”

부산시는 그렇다고 이번 철거를 계기로 구덕야구장을 망각속에 던져놓지는 않을 모양이다. 체육공원내 구덕야구장을 기리는 표지석을 건립하고 철거되지않은 매표소와 출입구를 살려 관련 사진들을 게시하는 작은 기념관을 만드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인간에 생로병사가 있고 우주조차 성주괴공(成住壞空)으로 생성과 소멸의 변화를 피할 수 없다. 다른 방안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구덕야구장은 뒤안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쓸모 다했으니 가차없이 지워버리자는 정없는 단호함보다는 구덕야구장이 키워온 부산야구의 정신적 인프라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뒤따를 때다.

김소식위원은 잠시 묵상하고 말한다. “‘그동안 고마웠소’했지. 꿈꾸게 해줘서, 꿈키우게 해줘서..정말 고마운 일이지.” 구덕야구장 빈터를 돌아보는 노야구인의 시선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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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덕 도심형 생활체육공원 조감도./사진제공= 부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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