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만남] 30년만에 만난 '1987'년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8.01.15 15:44 / 조회 : 5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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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포스터


개인적인 경험 하나.

대학에 처음 들어가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었다. 녀석은 83학번 3학년이었고 삼수한 난 85학번 새내기였다. 학교앞 막걸리집에서 선배인 친구가 열변을 토했다. 그가 토해내는 말끝마다엔 전두환 정권에 대한 격한 적의가 칼날처럼 벼려져있었다.

부담스러웠다. 암암리에 유언비어로 떠돌던 광주사태의 진상이 친구 입에서 팩트로 확정될 때는 오소소 소름도 돋았다.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 포이에르바하 등 나로선 귓등으로만 들었던 거창한 이름에 기대 한껏 권위를 얻은 친구의 주장에는 거부감도 들었다. 사실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드는 녀석의 태도가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 본질였다.

그래서 한마디 했다. “너 파쇼타도 한다며? 근데 너 말하는게 파쇼같다.” 한마디 더 덧붙였다. “4.19 이끈 그 선배 지금 뭐하고 있냐? 민정당 원내총무 하잖아. 뭐가 바뀌는데?” 친구가 주눅 들지않고 대꾸했다. “지금은 그래도 그때는 이승만 독재 끝장냈다.”

영화 ‘1987’을 선뜻 보지 못하다가 일요일 아침 눈뜬 김에 조조상영을 보았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 개인적으로 심장 저 깊숙이에 죄책감이란 낙인을 스스로 찍어두게 만든 이름들을 다시 만났다. ‘종철아! 잘가그래이..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당시 시위현장마다 내걸린 박종철 열사 아버지 박정기씨의 오열도 다시 만났다. “그런다고 그 날 안와요”하는 김태리(연희 역)를 통해 시니컬을 가장했던 30여년전의 나를 만났고 “나도 그러고(외면하고) 싶은데 마음이 아파서”란 강동원(이한열 역)을 통해 단 한번, 6월 어느날 알지못하는 학생들과 어깨동무하고 충무로까지 나갔던 또 다른 나를 만났다. 청커버 백골단의 질주에 질려 어떻게인지도 모른채 이태원까지 도망갔던 그 단 한번의 경험은 과장된 채로 애비로서의 체면을 세우는데 한몫은 하고있지만 동시에 ‘비겁’이란 스스로의 낙인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그런 부끄러움이 알게 모르게 ‘1987’ 관람을 미루게 했던 듯 싶다. 끝내 스크린으로 마주한 1987년.

참 저열한 시대였다. ‘받들겠습니다’나 외치는 힘없는 주제들이 더 힘없는 이들에게 눈을 부라리던 시대였다. 가족을 인질로 변절을 강요할만큼 공권력은 치사했으며,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란 말로 국민들을 납득시킬 수 있으리라 믿을만큼 양심불량의 정권은 오만하고 뻔뻔했다. 그 브레이크없는 정권의 저열함은 끝내 사람들이 애써 외면했던 가슴속 고결함을 자극했고 불타오르게 했다.

때는 한사람이 만드는게 아니라 모두가 다함께 만드는 것이라 했다. 선배를 보호하고 싶었던 대학생과, 마음이 아파서 ‘민주’를 외칠 수밖에 없었던 대학생의 희생, 너같고 나같은 이들의 그런 희생은 모두에게 이대로는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단 자각을 안겨주었고 기어코 부조리와 불합리를 끝장내자는 결기를 불러일으켰다.

4.19도 그랬고 6월 항쟁도 그랬고 최근의 촛불시위도 그랬다. ‘해도 너무한’ 정권이 트러블 없이 안온하게 살고 싶은 이들을 거리로 불러모았다. 개인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못본 척 못들은 척 살고 싶은 이들을 ‘해도 너무한 바람에’ 양심을 자극하여 눈뜨게 만들고 귀 열게 만들고 끝내 외치게 만들었다.

1987년 6월 항쟁에 나선 넥타이 부대들은 시인 김광규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읊은 바대로 ‘그(4.19)로부터 18년,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월급을 묻고, 물가를 걱정하면서 살기 위해 살던’ 이들이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 하면서,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기는’ 이들이었다.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그런 그들에게 외면못할, 귓전으로 흘릴 수 없는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다.

영화는 그런 넥타이부대까지 참여해 마침내 ‘호헌철폐’를 관철시킨 대규모 시위장면에서 끝났다. ‘그런다고 그 날 안와요’ 라던 김태리의 벅찬 표정에서 말이다.

그 승리가 YS와 DJ의 분열로 인해 어이없게 군사정권의 연장으로 귀결됐을 때의 허탈과 분노는 지금도 생생하다. 6월 항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그 날’이 오지 않았었다. 하지만 당시 국민들은 본 때를 보여줬고 그로인해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큰 폭으로 진전된 것이 사실이다.

8시20분 조조 상영임에도 만석였고 불이 켜진 후에도 많은 이들이 엔딩크레딧을 지켜봤다. 뜻밖에 눈물을 훔치는 젊은층이 많았다. 어쩐지 오래 묵혀두었던 내 부끄러움이 살짝 가벼워진듯한 느낌을 받았다. 부끄러운 일을 다시 한번 부끄러워했기 때문인 듯 싶다. 당시 진짜로 부끄러운 짓을 벌였던 사람들도 그 당시를 많이 부끄러워하고 속죄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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