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영봉 명인 "평창올림픽, 민족의 혼(魂) 장승도 축복할 것"

[김재동의 만남}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7.12.18 06:00 / 조회 : 7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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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횡계 평창 동계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옆 한국문화존에 이번 대회 성공개최를 기원하는 목영봉 명인의 장승 7기와 솟대가 세워졌다./사진제공= 목영봉명인


평창동계올림픽 D-56일인 지난 15일 횡계에 위치한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옆 한국문화존에선 의미있는 작업이 진행됐다. 제 23회 평창 동계올림픽 및 패럴림픽의 무사 성공개최를 기원하는 7점의 장승과 23점의 솟대가 세워진 것이다. 이날 세워진 장승과 솟대들은 향토조각 명인 목영봉 선생(69)의 작품들이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간절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혼불’을 쓴 고(故) 최명희 작가는 원고를 쓰는 작업에 대해 위와 같이 말했다. 그는 그 글의 뒤편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기도 했다. “..어쩌면 장승은 제 온 몸을 붓대로 세우고, 생애를 다하여 땅속으로 땅속으로 한모금 새암을 파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운 마을, 깊이 쓸어안아 함께 울어 흐르는 그 먼 바다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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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달 목영봉 명인. /파주= 임성균 기자


지난 13일 파주 문산읍을 찾아 월당 목영봉 명인을 만나고 나서 최명희 작가의 말이 오버랩된 것은 그가 장승, 솟대 등 40년 향토조각을 통해 한국예총으로부터 ‘명인’이란 명함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제 눈으로 본 그의 작품들에서 최명희 작가가 말한 ‘어리석고 간절한’, 그리고 ‘생애를 다하여 파나간’ 혼(魂)의 흔적을 아슴프레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의 영원한 주제 장승과 솟대가 민초들의 마음을 깊이 쓸어안고 함께 울어주던 바로 그 장승이고 솟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연일 계속된 강추위로 얼어붙은 임진강을 완상하며 당도한 전시관 앞마당에는 약 5m에 이르는 육중한 몸체를 자랑하는 장승들과 솟대들이 얌전히 누워있었다.

“혹시 누워있는 장승 본 적 있어요?” 명인의 장난스런 질문에 되짚어보지만 기억 속의 장승들은 언제나 서 있기만 했던 것 같다. “누운 장승 보는것도 운이 좋은 거예요”

누워있는 육중한 덩치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었지만 표정들만큼은 같은 게 하나 없이 다양했다. 그 다양한 얼굴들 사이사이론 눈꽃과 무궁화와 치우천왕상등이 어우러져 있다.

“얼굴이 몇 개나 되나요?”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명인은 나무 하나 하나마다 빼곡히 얼굴을 새겨놓았다. “바닥 쪽의 문양은 어떻게 새기셨어요?” “한쪽 면을 새기고나면 크레인 불러 뒤집어서 다른 면을 새기고 했죠. 평창 조직위의 제의를 받고 9월부터 3개월간 주야로 하루 12시간씩 망치와 전통 끌로만 만들었어요. 망치질만 수백만번 한 것 같아요”한다.

망치질 수백만번이라.. “몸은 괜찮으세요?” 당연히 뒤를 잇는 질문에 “40년을 해온 일인데요” 라고 심상히 말한다. “노하우도 있어요. 가령 나무망치를 쓰는 것도 쇠망치보다 탄력있고 몸에 가해질 충격을 줄여주기 때문이죠. 힘이 들때면 나무망치를 높이 치켜들어 중력을 이용해 내려치기도 하고요”라고도 덧붙인다. 하지만 장승들과 솟대들에 새겨진 수백만번 망치질의 흔적은 그 정도 노하우가 가소롭게 느껴지는 ‘혼신의 힘’을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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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횡계에 서기 전 파주의 작업현장에 누워있는 장승들과 솟대들을 목영봉명인이 설명하고 있다. /파주= 임성균기자


그날 명인이 밝힌 평창 장승과 솟대의 내역을 기술하자면 우선 장승 목재는 밤나무다. 가장 큰 것은 몇 백 년 된 것도 있다. 어렵사리 밤나무를 구한 이유는 방아축이나 절구공이처럼 단단한 연장이나 철도 침목으로 쓸만큼 목재가 단단하고 방부제 역할을 하는 타닌 성분이 많아서 잘 썩지않고 오래가기 때문이다. 200년을 넘겨도 안썩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같은 밤나무는 구하기도 어렵다. 유실수로서의 효용이 크기 때문에 수확목적의 밤나무들은 20년만 되면 베어내기 때문이다. 이번에 구한 밤나무들은 명인이 파주 북부와 양주인근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구한 것들이다.

솟대의 목재는 노간주나무다. 역시 목재가 단단하고 무늬가 곱다. 솟대위의 오리는 밤나무 썩은 것을 사용했다. 이미 약한 부위가 썩어 없어지고 남은 단단한 부위로 만든다.

평창에 세워진 장승 작품들의 주제는 ‘별들의 합장’이다. 별은 신을 대신한다. 결국 일월성신이 한마음으로 합장하고 평창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평창올림픽에 자신의 장승이 서게 된 것을 명인은 참 다행이라고 표현한다. “사모관대 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섰다고 생각해봐요. 국가적 망신이 될 뻔했죠.”

‘왜?’란 의문이 뒤따른다. 이에 대해 목명인은 설명한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등장한 것은 고작 100년 남짓이고 그 이전엔 어떠한 근거도 없었어요. 누군가가 장난스레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마치 전통처럼 자리잡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승은 신앙의 대상, 신입니다. 신성에 남성·여성의 개념을 둔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게다가 뻐드렁니에 우스꽝스런 모습을 한 대상에게 무언가를 빌고 싶겠습니까?”

이야기는 명인이 장승과 솟대에 천착하게 된 계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대의 목명인은 서양화에 심취해있었다. 하지만 벽에 걸 수밖에 없는 평면화에 식상해 공간예술인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한국의 조각기법이 모두 서양기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실망, 우리 것을 찾다보니 장승과 솟대가 눈에 들어왔다고. 그때부터 장승 솟대의 원형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목장들은 “이 형상은 무슨 의미인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왜 세우는가?”등 목명인의 궁금증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아무런 근거없이 그냥 있던 것을 모방하는 이들 뿐이었다. 문화사 서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확인하고 그는 “내가 해볼만한 일이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장승의 원형인 돌장승들을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녔다고. 그리고 확인했다. 돌장승 중 사모관대나 족두리 쓴 장승은 없었다. 불교식 상원주장군·하원당장군이나, 토속적으로 진서대장군·방어대장군 등은 있어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은 없었다. 글이 없던 시절 세워진 돌장승에는 당연히 명문이 새겨져 있지도 않았다.

장승(長承) 장생(長栍) 이름 전에는 벅수 법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 장승은 이미 1만여 년 전부터 이 땅 토종신앙의 주인이었다. 도교적 색채가 강한 장승이란 이름이 굳어졌으므로 그 이름을 굳이 쓰지 않을 수는 없지만 장승과 솟대는 불교와도, 도교와도 무관하게 민초들의 기원과 해원의 대상이었다.

잔존해 있는 돌장승의 부분별 형상을 보면 눈은 거의 모두 퉁방울눈이고 코는 큼직한채 둥근 주먹코, 복코, 벌렁코 등이었으며 입은 과묵하거나 신념에 찬 우직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다. 그는 장승에게서 무수한 위난들을 묵묵히 이겨낸 우리 겨레 민초들의 숨결과 삶의 결을 느낀다고 한다.

도구가 제대로 구비되기 전 장승의 원형은 목장승이었을 것이고 석장승이 나중이었을텐데 이제는 석장승에 원형이 남아있는 바람에 목명인은 그 원형을 살려 목장승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는 그렇게 조상들의 삶의 결을 전승해가고 있는 중이다.

갑자기 명인의 종교가 궁금해졌다. “기독교입니다. 집사도 했었고 밀레니엄전도대회 연합성가대에도 앉아있었고 교회에 성화도 기부 많이 했습니다.” 그는 아울러 질문의 의도를 통찰하고는 “그런데 장승과 솟대는 문화입니다.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문화는 수용해야 됩니다. 종교가 문화적 가치를 수용 못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실제로 목사분들도 솟대를 사가곤 합니다”고 덧붙인다.

우리 나이 일흔. 현재 그는 향토조각 명인이고 그렇게 남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 본인 표현으로 파주의 ‘좀 살았던’ 집안의 7남매중 막내였던 그는 결국 그림으로 방향 전환했지만 스무살 무렵엔 배우가 되어보려고 충무로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71년 1사단 수색중대원으로 복무 중엔 무장공비를 잡기도 했다. 집이 파주 토박이인 탓에 헬기 대신 지프차 타고 포상휴가를 가야했던 흔치 않은 군 경험이 있다. 그는 또 태권도 공인 6단이다. 한때 태권도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가 배출한 검은 띠만 약 600여명 된다고 한다.

스킨스쿠버 경력도 40년이다. 우리나라 스쿠버 1세대다.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아이스 다이빙을 했고, 잠수하면서 미군 전차 빠진 거 건져주고 시신도 500구 이상 인양해 미국무성 훈장도 탔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과 역사 왜곡에 항의해 후지산 호수에 태극기를 꽂아넣은 일은 2005년 YTN을 통해 보도가 되기도 했다. 라이온스클럽과 로타리 클럽에서 동시에 봉사하기도 했다. 수중촬영을 즐겨 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직업인으로서의 이력도 다채롭다. 결혼과 함께 그는 남영동에 화방을 내고 그림을 그렸다. 당시 화방에선 사진관도 겸했다. 이후 가구점도 하고 싱크대 공장도 해보았고 인천일보 파주지사장도 해보았다. 나이 쉰부터 지금까지 조각에만 전념해도 무방할만큼 돈도 벌었다고 한다. 스킨스쿠버와 함께 세계각지의 토템을 공부하기 위해 아프리카, 티벳, 네팔 동남아등 60여개국을 둘러보고 30여개국의 귀한 민속자료를 모아 자신의 작품과 함께 전시관을 꾸린 것을 보면 사업들은 제법 성공했던 모양이다.

그는 스킨스쿠버 계통에선 ‘목대장’으로 불리고(17년간 스킨스쿠버 리더로서 단 한건의 사고도 없었던 것은 그의 자랑이다.), 사회봉사단체에선 ‘목회장’(로터리클럽 회장을 역임했다)으로 통한다. 물론 향토목각쪽에선 ‘목명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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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당기념관에 전시된 탄자니아의 토템 목조각품을 설명하는 목영봉명인./ 파주= 임성균 기자


본인 말마따나 “하고 싶은 것 다해본 세월”이었다. 하지만 일흔 나이의 그에겐 아직도 하고싶은 일이 남아있고 그것은 본인이 복원하고 자리매김한 향토목각을 전승시키는 것이다.

장승 솟대 등 향토 목각은 밖에서 온갖 풍랑과 격변의 상황 속에서 노숙을 하던 한국의 전통적 토테미즘 조형물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장승은 문화재로 지정되기보다 민속자료 정도로나 지정된 것이 대부분이다. 가난한 민중들의 전승 문화가 작금에 와서조차 문화적 가치에서 소외당하고 있는 현실을 목명인은 개탄한다.

“현대의 전동기구를 이용해 전통도 국적도 없이 양산되는 장승을 얘기하는게 아닙니다. 전통 깎기 기법을 계승해 시대에 맞게 창의적인 안목으로 창작된 작품들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1만여년간 이 땅의 민초들과 숨결을 나누며 위무해온 장승과 솟대 아닙니까”

현재 그는 12명의 제자에게 향토조각을 전수하고 있다. 그가 전하는 향토조각은 말 그대로 온전히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과정이다. 하지만 전수자들의 여건이 어렵다 보니 2년 돈 벌어 1년 배우는 이들도 있고 유치원 수준의 성취를 믿고 주변의 부추김에 독립해나가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는 수업료도 안 받고 재료비도 안 받는다. 전수과정에 쓰는 목재도 밤나무같이 단단한 재질의 나무들이다 보니 한 차 들여오면 4~5백만 원이 훅 나간다. “소나무 같은 건 무 깎듯 깎을 수 있는데 배울 때부터 단단한 나무 깎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2013년부터 향토목각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누군가 쓰겠지' 하고 미뤄뒀는데 아무도 안쓰는 바람에 직접 나섰다고 한다. ‘한국 향토목각의 기초’(2013년), ‘한국 향토목각의 조각기법’(2014년), ‘한국 향토목각의 창작과 재현’(2015년)을 발간했고 이제는 네 번째 서책 원고를 마감했다고 한다. 관련 사진들을 첨부해 2018년 초면 발간될 것이라고.

“나라의 큰 행사에 제 작품들이 일조할 수 있게 돼 정말 영광입니다. 이번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이 땅의 혼(魂)이랄 수도 있는 장승이 세계만방에 한국의 전통문화로서 알려지길 기대합니다”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마디 장승을 파내가는 명인이 거친 손마디로 따라주는 황차의 맛이 입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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