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은 왜 애호박男이 됐나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11.28 14:49 / 조회 : 16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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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사진제공=UAA


유아인이 '애호박남'이 됐다. 본인이 결코 원하지 않았을, 하지만 그를 비판하든 응원하든, 숱한 말들 속에서 그는 애호박남이 됐다. 그 말들의 전쟁엔 유아인이 분명 한몫했다.


시작은 이랬다. 누군가 SNS에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칸에 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하고 코찡끗할 것 같음"이라고 유아인을 평했다. 그 글에 유아인이 "애호박으로 맞아봤음?"라고 답했다. 분명 장난스런 답이었다. 깊은 뜻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 애호박으로 때릴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이 붙었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은 누군가에겐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처럼 받아들여졌다. 유아인은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부와 명성을 거머쥔 인기 남성 연예인이다.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농담이랍시고 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다음이다. 유아인은 쏟아지는 비난에 사과하지 않았다. 굴복하지 않았다. 설현에게 백치미라는 표현을 썼다가 곧장 사과하고 반성한 설경구와는 다르다. 잘못을 안 해도 일단 비난이 쏟아지면 죽을죄를 진 건 마냥 사과부터 했던 여러 연예인들과도 달랐다.

유아인은 맞섰다.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꼴페미"로 규정했다. 잘못된 페미니스트로 구분했다. 자신이 잘못이 없기에,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치부하고 무시하고 대응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했다. 구분 짓기다. 그는 "정상적 사고와 인격을 가진 모든 여성분들께 호소한다"며 "부당한 폭도의 무리가 여성의 명예와 존엄함을 먹칠하는 현재의 상황을 방관하지 마십시오"라고 썼다.


유아인의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은, 그리고 돌아올 몫들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연예인이라고 스스로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들에, 침묵하거나 사과부터 하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목소리를 높이는 건 온전히 그의 자유다.

하지만 유아인은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들을 줄도 알아야 했다. 유아인은 스스로를 거친 목소리들의 피해자라고 생각할 터다. 그렇지만 유아인은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가 기득권자이며 가해자의 어떤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거친 목소리들로 자신이 받는 상처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의 말이 주는 상처도 생각했어야 했다. 그게 더 가진 사람의 책임이다.

유아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은, 분명 그의 진심을 담았을 터다. 그는 지금까지처럼 사회적인 약자와 부당한 것들에 냈던 목소리를, 그 선언에 담으려 했을 터다. 그럼에도 그가 말들의 싸움 속에서 뱉은 듯한 페미니스트 선언은, 구분 지음과 다름없다.

한국사회에서 어떤 여성은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고 일자리를 잃었다. 어떤 여성은 페미니즘 교육을 하고 매도당했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 선언은 많은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유아인이 말들의 싸움 중심에서 외친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적어도 이 말을 하기까지 숱하게 싸워오고 상처받았던 사람들에겐 모욕처럼 여겨지기 쉽다.

쉽게 뱉어진 말처럼 쉽게 입히는 상처도 없다. 왜 상처일지 모르는 건, 같은 이유로 상처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 가진 사람이라면, 더 생각했어야 했다.

대체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구분 지음은, 적과 우리 편을 나뉠 때 쓰이기 마련이다. 유아인이 이 표현을 쓰고 난 뒤에, 일베부터 오유까지 페미니스트에 적의를 띈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아인 스스로도 왜 그들의 환영을 받는지를, 왜 '꼴페미'의 적의를 받고 있는지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그건 유아인이 구분 지음을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어쩌면 원치 않고, 어쩌면 끔찍하게도 싫었을, 어떤 사람들의 상징이 돼 버렸다. 온전히 그의 몫이자 책임이다.

더욱이 유아인은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폭도"라고 규정했다. 한국사회에서 "폭도"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생각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표현이다. 5.18과 4.3 등 숱한 현대사의 아픔 속에서 피해자들은, 가해자들에게, 더 가진 자들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폭도라고 불렸다. 구분 지음에서 폭도까지 이어진 유아인의 말은, 그의 뜻과는 별개로 그를 가해자의 위치에 올렸다. 유아인은 이 말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말콤 X'란 영화가 있다. 흑인 인권운동을 펼쳤던 말콤 엑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영화 속에서 한 백인여성이 말콤 엑스에게 묻는다. "나같이 선한 백인이 흑인의 인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말콤 엑스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없는 사람들의 투쟁은 없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말콤 엑스와 동시대에 흑인 인권 운동을 펼쳤던 마틴 루터 킹은 달랐다. 그는 "노예의 후손과 주인의 후손이 같이 형제애를 나누는 낙원"을 꿈꿨다. 두 사람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둘이 있었기에 흑인 인권운동이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마틴 루터 킹의 연대가,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던 건 역사가 증명한다. 옳든 그르든.

유아인의 구분 지음이 페미니스트들, 또는 설치는 여자들에게 박해받고 있다고 믿는 남자들의 상징이 돼 버린 것. 그리고 그런 유아인의 상징성에 더욱 반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유아인의 애호박을 둘러싼 말들의 본질이다.

유아인은 유아인의 애호박 현상을, 핍박받는 순교자의 심정으로 대응할 게 아니라 더 깊게 봐야 한다. 비주류를 자처하든, 그 속에서 자유롭고 싶든, 그것이 인기 남성 연예인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혜택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애호박의 시작은 그의 몫은 아니었지만, 결말은 그의 몫이다.

언제나 더 가진 자는 더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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