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반장이라 부르면 달려올 것 같다..김주혁을 그리며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10.31 10:00 / 조회 : 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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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의 김주혁 스틸.


김주혁이 죽었다. 믿기지 않는다. 멍했다. 자고 일어나니 비로소 눈물이 났다. 그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김주혁을 알고 지낸 지 15년은 훌쩍 넘었다. 친형 같다던 소속사 빡빡머리 대표가 머리카락이 있었던 시절, 둘이 으쌰으샤 같이 해보겠다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일로 오다가다 보고, 사석에서도 더러 봤다. "그만 좀 삐치라"고 할 만큼은 봤던 것 같다. 김주혁은 트리플A형이라 잘도 삐치고, 낯가림도 심하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열면 그렇게 정을 줄 수 없다. 처음에는 소심한 줄로 알았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배려가 많다는 걸 알았다. 거칠고 무례한 어른 남자들과 거친 연예계에 오래 있다 보니 그리 보였던 것 같다. 주위 남자들과 참 많이 달랐다.

김주혁은 대배우로 불렸던 고 김무생의 아들이다. SBS 공채 탤런트 8기로 데뷔했지만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카이스트'에 출연했을 땐, 진짜 카이스트 다니는 사람 아니냐는 소리를 들었다. 좋은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랬던 김주혁은 충무로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한국영화계보단 충무로라는 말이 어울렸던 시절이었다. '싱글즈'에서 장진영에게 "열심히 사랑했잖아, 그리고 열심히 잊었잖아. 그럼 된거야"라고 했다. 다른 남자 배우가 했다면 그리 담담하게 위로가 되지는 안았을 테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만화 주제가 같은 이 긴 제목으로 김주혁은 한국의 휴 그랜트라 불리기 시작했다. 찌질하면서도 부드러운. 김주혁만의 감성이었다.

'홍반장' 인기에 힘입어 TV로 돌아가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가 정점이었다.

"친일 부역 영화"라며 '청연'은 조리돌림 당했다. 그 뒤로 드라마와 영화, 부침이 컸다.

돌이켜보면 김주혁은 한국의 휴 그랜트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엔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자꾸 발목을 잡는 것 같다며 싫어했다. "한국에서 당신이 그런 걸 제일 잘하니 잘하라는 거 하라"고 하면 "내가 나이 들어 언제까지 그런 것만 할 수 있겠냐"며 삐치곤 했다.

그리하여 다른 시도들을 했다. 드라마 '무신'을 했다. 근육도 키웠다. 어찌어찌 잘 되나 싶더니 MBC파업의 폭탄을 맞았다. 좋은 스태프들이 두루 빠진 터라 드라마가 산으로 갔다. '무신' 끝나고 부산영화제에서 만났다. "그래도 하나는 건졌다"며 같이 낄낄 됐다.

김주혁이 '1박2일'을 한다고 했다. 정말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 트리플A형이, 휴 그랜트도 싫다던 배우가, 리얼 버라이어티를 하다니. 전 국민이 다 아는 예능 프로그램을, 그것도 폐지를 하네 마네 하는 시점에서 하다니. 악플에 밤잠 못 이루면 어쩌나 싶었다. 하나하나 다 볼 텐데 싶었다.

기우였다. 김주혁은 '1박2일'로 '구탱이형'이란 별명을 얻으며 다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들을 얻었다. "처음엔 걱정 많이 했는데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다"며 웃었다. 좋고 싫은 게 금방 드러나는 성격이라, 그가 진심이란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았다.

2005년 김주혁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빈소를 찾았다. 2015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차마 못 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온통 아버지 손님이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온통 김주혁의 손님이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자칫 누를 끼칠 것 같았다. 10년이 흐른 뒤 그를 위로하려는 사람들이 넘칠 만큼, 김주혁은 잘살았다.

'뷰티 인사이드'가 개봉한 뒤 그 해 겨울 김주혁을 만났다. 김주혁은 '뷰티 인사이드'에서 매일 자고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 되는 남자 중 하필이면 이별하는 역을 맡았다. "역시 이별의 아이콘이야"라며 서로 웃었다. 그는 웃으며 안녕이라며 돌아서면, 그 뒷모습에서 울고 있는 남자를 그릴 줄 아는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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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없다' 김주혁 스틸


지난해 여름 즈음, 김주혁과 소속사 사무실에서 마주쳤다. '비밀은 없다'가 막 극장에서 내려지던 시점이었다. "영화 참 잘봤다"는 기자에게 "저는 못 봤습니다"라고 받았더랬다. 저간의 사정을 알기에 둘이서 "껄껄껄" 마주 보며 웃었다. 원래 약속과 많이 달라졌기에 속이야 상했겠지만, '비밀은 없다'에서 그가 그토록 바랐던 다른 얼굴을 봤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다시 휴 그랜트 시절 김주혁을 봤다. 사랑에 웃고 울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김주혁은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워진 듯 했다. "연기가 다시 재밌어졌다"는 말도 그때쯤부터 하기 시작했다. 사랑도 만났다.

올 초 '공조' 기자시사회 직후 따로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김주혁은 '공조' 관련한 인터뷰를 안 할 생각이었다. 현빈 유해진 두 배우만 할 예정이었다. "왜 인터뷰를 안하냐"는 기자 말에 그는 "두 분만 해야지. 저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친구 때문이냐" "홍상수 감독 질문을 받을까 염려돼서 그러냐"며 "꼭 인터뷰를 해라. '공조'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에서 김주혁을 다시 볼 것"이라고 했다. 기자의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김주혁은 '공조'로 인터뷰를 했다.

그는 '공조'로 영화로 첫 상도 받았다. 사망 불과 이틀 전이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주신 것 같다"고 했다. 이제 김주혁은 하늘나라에서 부모님에게 자랑스런 아들로 상을 보여주게 됐다. 천천히 가도 됐으련만 너무 일찍 만나러 갔다.

김주혁은 '홍반장'에서 고 김광석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직접 불렀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텅 빈 방문을 닫은 채로 아직도 남아 있는 너의 향기

내 텅 빈 방 안에 가득한데 이렇게 홀로 누워 천장을 보니 눈앞에 글썽이는 너의 모습 잊으려 돌아누운 내 눈가에 말없이 흐르는 이슬 방울들"

"지나간 시간은 추억 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나는 왜 이렇게 긴 긴 밤을 또 잊지 못해 새울까"

아직도 홍반장이라고 부르면 그가 달려올 것 같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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