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정원' 녹색 뮤즈 문근영과 절반의 성공

[리뷰] 유리정원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10.19 10:38 / 조회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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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뮤즈의 이야기는 많다. 영감을 주고, 사랑하고, 이용하고, 상처받는 이야기. '유리정원'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작가와 뮤즈의 이야기지만, 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기에 다르지만, 그렇기에 화학반응이 적다.


엽록체를 이용해 인공혈액 녹혈구를 만드는 연구를 하는 재연(문근영). 연구실을 책임지는 정교수(서태화)와 사랑하는 사이다. 그렇지만 동료 연구원에게 연구 아이템과 사랑하는 사람마저 뺏기고 만다.

첫 소설은 사람들 관심 밖인 데다 자존심만 남은 무명 작가 지훈(김태훈). 재능 없으면 술집이나 하라는 문단의 거두에게 홧김에 표절이나 하지 말라고 했다가 그나마 있던 출판사와 인연마저 끊기게 됐다.

재연은 어릴 적 벌목꾼이던 아버지가 남긴 숲 속의 유리정원으로 이사해 연구를 마저 한다. 우연히 재연의 옥탑방에 머물게 된 지훈은, 재연이 남긴 그림과 메모를 보고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지훈은 재연을 찾는다. 유리정원에 스스로를 가두고 사는 지훈은 재연을 거부한다. 지훈은 재연을 엿본다. 재연의 글을 옮긴다. 재연의 삶을 재구성해 글을 쓴다. 초록의 피를 갖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다. 지훈이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 '유리정원'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병으로 몸이 굳어가는 지훈은, 생명을 살리는 재연의 연구에, 그녀의 고립된 삶에 연민과 공감을 느낀다. 재연은 지훈의 소설이, 자신의 비밀과 맞닿아있다고 믿는다. 거짓이지만 진실이고 싶어한다.

둘의 거짓춤은 지훈이 재연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 비밀을 소설에 옮기면서 파국을 맞는다.

'유리정원'은 '마돈나'로 주목받은 신수원 감독의 신작이다.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하다. 신수원 감독은 '마돈나'에서 유기된 여성의 이야기로, 탐욕스런 세상과 그 속에서 희생당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유리정원'에선 사랑에 배신당해 외톨이가 되는 여인 이야기로, 좀 더 내면으로 들어가려 했다. 생명이란 근원으로 더 다가가려 했다.

이 시도는 절반만 성공했다. 문근영이 그린 재연은, 순수할수록 오염되기 쉽다는 남자의 말대로 오염돼 간다. 오염이라기보다 원래로 돌아간다. 숲으로, 나무로, 돌아간다. 홀로 서 있지만, 숲에서 같이 서 있는 외로움.

재연은 남자에게 버림받은 까닭에 자신이 옳다는 걸 입증하려 한다. 스스로 서기보다는, 상사이자 남자에게 입은 상처로, 그저 숲 속의 유령처럼 살아간다. 그런 재연을 지훈은 뮤즈로 이용한다. 그녀의 삶을 도둑질하고, 그 도둑질로 성공을 거둔다. 교감이나 사랑 따윈 없다. 알량한 죄책감만 남았을 뿐.

많은 예술가와 뮤즈의 이야기 속에선, 뮤즈는 예술가의 성공을 위해 희생당한다. 그건 예술가와 뮤즈의 이야기란, 결국 성공한 예술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유리정원'도 마찬가지다.

'유리정원'은 이끼가 무성한, 한때는 생명이 넘쳤지만, 이제는 죽어가는 숲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 숲에서 태어나 숲 밖으로 나왔지만 숲으로 돌아간, 아니 도시에서 쫓겨난 여인을 엿보게 한다. 동화 속 요정처럼, 재연은 순수하다. 순수하라고 강조 당한다. 그 말라가는 순수함을 엿보는 시선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극히 남성적이다. 남성 예술가의 시선이다. 그렇게 '유리정원'은 '마돈나'처럼 버림받은 여인을 통해 폭력적인 남성 세계를 그린다.

그렇기에 '유리정원'은 절반의 성공이다. 이 세계에 주체적인 여성은 없다. 엿보는 대상으로서 뮤즈만 남는다. 마지막 지훈의 내레이션은 '유리정원'이 뮤즈를 엿보는 남자의 시선이라는 걸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리정원' 절반의 아쉬움을 메운 건 문근영이다. 국민여동생이란 타이틀로 오랜 시간을 보낸 문근영은 '유리정원'에서 순수하다는 옛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조금씩 변질시키는 변화를 유려하게 그려냈다. 옛 이미지 활용을 주저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변화의 순간들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다. 비밀의 토굴에서 김태훈을 바라보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문근영의 시선은, 그녀의 오늘보다 내일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리정원'에 등장하는 모든 남자 배우들의 연기는 참으로 아쉽다. 일부러 문근영을 돋보이게 하려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동물 같다. 마치 순수한 식물처럼 문근영을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모든 남자들은 동물처럼 그리려 한 것 같다. 지훈 역의 김태훈만 점점 문근영을 닮아가는 것처럼 그려진다. 의도인지,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전형적이다.

'유리정원'은 남성 예술가의 시선으로 뮤즈의 삶을 조명한다. 뮤즈로, 여성의 영원한 삶을 그린다. 이 삶을 남성의 엿보는 시선으로 완성해야 했는지, 절반의 성공이 반갑고, 절반의 실패가 아쉽다.

10월25일 개봉.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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