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이병헌과 김윤석이 그린 말들의 전쟁

[리뷰] 남한산성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09.26 14:41 / 조회 :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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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땅에 찧었다. 치욕의 역사다. 이 기억을 영화로 옮긴다는 건 어쩌면 무모한 도전이다. 승리와 복수, 대리만족과 위안을 찾기 마련인 요즘, 치욕과 갈등을 이야기하는 건 어리석다. '남한산성'은 이 어리석음으로 살길을 찾았다.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은 김훈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영화로 만든 작품. 제작사 싸이런픽쳐스는 김훈 작가의 딸이기도 하다. 알려졌다시피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와 주화파 최명길, 척화파 김상헌 등 신하들의 대립, 그리고 전란에도 살아내려는 대장장이 날쇠의 이야기를 담았다.

어려운 이야기다. '남한산성'은 말과 말이 싸우는 이야기다. 오랑캐에게 치욕스럽게 항복을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척화파 김상헌, 삶이 있어야 사직과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주화파 최명길. 47일 동안 고립됐던 남한산성의 고된 하루하루를 말로 연명하고 말로 싸웠던 이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누워있는 글을, 보이지 않는 말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황동혁 감독은 그 작업을 해냈다. 말을 육화시켰다. 말끼리의 싸움을, 보이지 않는 명분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 고단했을 작업이 '남한산성'의 본질이다. 황동혁 감독은 '남한산성'을 정적인 가운데 동적으로 그려냈다. 얼어붙는 산성 속에서 끈질기게 피어나는 불처럼 그렸다. 이 본질의 성취는 탁월하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고단하다.

청의 군대에 쫓겨 남한산성에 피신한 임금과 신하들. 이조판서 최명길은 적장 용골대와 화친을 이야기한다. 세자를 볼모로 보내라는 용골대의 말에 초라한 조정은 수근거린다. 때마침 남한산성에 도착한 예조판서 김상헌은 어찌 세자를 적에게 보내 화친을 꾀하냐며 맞서 싸워야 한다고 외쳤다. 화친에 순간 기울었던 왕과 신하들은 굳센 명분을 내세운 김상헌의 말을 쫓는다. 신하들은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의 목을 베어 결사항전의 의지를 세우자고 입을 모은다.


최명길은 다시 한 번 용골대를 찾아 화친의 조건을 달리 할 수 있을지 묻겠다고 제안한다. 조선을 버리고 청나라 사람이 된 역관(통역가)은 최명길을 맞아 조선의 왕과 신하들을 비웃는다. 용골대는 다른 방안은 없다며 칸(청나라 황제)이 오고 있다고 최명길을 내친다.

김상헌은 말로 살 길을 찾으려는 최명길의 노력과 달리 성벽을 점검하고 병사들을 살피며 싸움으로 살 길을 찾으려 한다. 그런 김상헌에게 성벽을 지키던 날쇠는 병사들이 추운 겨울을 나며 버틸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한다. 김상헌은 날쇠의 의견을 쫓고 점점 그를 신뢰하며 병기의 수리까지 맡긴다.

최명길은 조정 가운데 온통 싸우자는 목소리가 가득하자 외롭다. 날은 춥고 병사는 얼어붙고 먹을거리는 떨어지고 적은 가득한데, 대책은 없다. 그저 싸우자는 말들뿐이다. 오직 김상헌만 성 밖의 군사들과 연락해 안과 밖이 힘을 합쳐 싸우자는 계획을 말하고 실천하려 할 뿐이다.

김상헌은 날쇠에게 성 밖의 군인들에게 왕의 첩지를 전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청의 칸은 마침내 당도하고, 남한산성의 운명은 꺼지기 전 등불이다. 최명길의 목을 베라는 신하들은 그저 꼬리말은 개처럼 눈치만 본다.

'남한산성'은 고단하다. 고단한 싸움에, 외로운 처지를, 그 곁에서 본 것처럼 담아냈다. 누구의 말이 옳다고 편들지 않는다. 그저 풀어놓고 들으라 한다. 관객에게 생각하라고 한다. 보고 느끼라 한다. 그 고단한 풍경을 스산하게 담았다. 이 고단한 성취에 몰입한다면 두고두고 곱씹을 거리가 풍성하다. 명나라냐, 청나라냐, 강요하는 상황이 지금 북핵을 놓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단한 한국의 모습과 닮아 더욱 그렇다.

'남한산성'은 11개 챕터로 소설처럼 꾸몄다. 한 편의 수묵화며, 한 권의 소설 같다. 원작처럼 영화는 날쇠와 나루라는 할아비 잃은 소녀로 민중을 담았다. 성벽 위에서 얼어붙고, 무모한 윗사람의 명령에 의미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 나라 팔아먹고 청에 붙은 사람마저, 하나하나 의미를 실었다.

최명길을 맡은 이병헌, 김상헌을 맡은 김윤석, 인조를 맡은 박해일, 무관 이시백을 맡은 박희순 등등 배우들의 존재감은 '남한산성'의 기둥이다. 이병헌과 김윤석은 말들의 싸움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주고받고 치고받고 자르고 뒹구는 말의 힘을 스크린을 뚫고 나오도록 했다. 이병헌이 흐르는 물 같다면, 김윤석은 타오르는 얼음 같다. 황동혁 감독은 둘의 모습과 의상, 색, 목소리 등 모든 점에서 대비를 줬다. 인조 역의 박해일은 둘의 액션을 거울처럼 받아냈다.

이병헌이 영화를 열고 닫지만 가장 캐릭터 변화가 큰 건 김윤석이다. 김윤석은 김상헌을 대의를 위해 민중을 버렸다가 민중의 힘에 의지하고 민중에 죄책감을 느끼는 늙은 범처럼 풀어냈다. 청의 칸 역할을 맡은 김법래는 '남한산성'의 발견이다. 존재감이 탁월하다.

'남한산성'은 또 다른 주인공은 추위다. 얼어붙은 산과 강, 눈에 잠긴 산성, 하얗게 피었다 사라지는 입김, 잔뜩 곱은 손가락과 발가락. 글로 느낄 수 없는 영화만의 주인공이다.

음악은 류이치 사카모토가 맡았다. '마지막 황제' '레버넌트'의 음악을 맡은 그 류이치 사카모토다. 음악의 정서가 다른 한국영화, 한국 사극 음악과 다르다. 처연하되 흐느끼지 않고, 비장하되 장엄하지 않다.

'남한산성'은 고단하다. 이 고단한 정서는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일테다. 이 고단한 정서는 누군가에겐 지루할 것이다. 기쁨이든, 지루하든, 분명한 건 영화가 쏟아내는 질문들에 생각을 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남한산성'은 모처럼 만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자,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다. 어떤 답이더라도, 그래도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언 강에서 물고기가 잡힌다고 말한다. 동토에도 봄이 온다고 믿는 사람들이라면 사뭇 반가울 것 같다.

10월3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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