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역사왜곡 논란이 희한한 이유..옳은 길과 쉬운 길

[전형화의 비하인드 연예스토리]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08.01 11:04 / 조회 : 1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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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로 영화를 만들 때 옳은 길과 쉬운 길은 무엇이었을까.

'군함도' 논란이 뜨겁다. 지난달 26일 개봉해 31일까지 450만 관객을 동원했다. 외형적으론 흥행몰이 중이다. 하지만 첫날부터 스크린 독과점이라며 융단폭격을 맞고 있다. 2000개가 넘는 스크린에서 상영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정해진 수순이기도 했다.

스크린 독과점 논란은 차지하고, '군함도'는 다른 두 개의 논란에 직면했다. 하나는 류승완 감독이 "착한 조선인, 악한 일본인이란 이분법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에서 촉발된 이른바 역사왜곡이다. 둘은 촛불영화며 적폐청산을 외치는 영화란 비아냥이다. 이 두 논란은 어쩌면 하나다.

역사왜곡 논란은, 희한한 프레임에서 촉발됐다. 일제 강점기를 그리는데 일본인만 나쁜 게 아니다? 나쁜 조선인도 많았다? 그럼 일제 강점기가 일본만 나쁜 게 아니라 조선인도 나빴다는 뜻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나쁜 게 아니라 개인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역사왜곡이며 식민사관이다, 로 전개된 듯 하다.

류승완 감독과 배우들 인터뷰에서 꼬투리를 잡고, 프레임에 계속 덧칠한다. 류승완은 친일파 감독이며, 식민사관에 빠져 있는 생각이 부족한 감독인양 조리돌림되고 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희한하다. 이 프레임의 촉발은 왜 '군함도'에서 등장인물 중 조선인'도' 악역으로 묘사했냐라는 질문에서 시작됐다. 영화 속 등장하는 일제에 꼬리 치는 조선인 부역자들 비중이 높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 기저에는 일제 강점기를 콘텐츠로 다룰 때는 악한 일본인이 절대악으로 그려져야 마땅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악으로 깔려있다. '군함도'에 등장하는 일본인 중 입체적인 인물은 없다. 그저 다 기능적인 악당들이다. 억지로 그나마 착한 일본인을 찾자면 황정민이 탈출 준비를 할 때 눈 감아준 일본인 노동자 정도다.

이 논의는 왜 '군함도'에는 절대 악이 없느냐, 다시 왜 절대 악이 일본인이 아니냐여야 마땅하다. '군함도'에 일본인 절대 악역이 없는 걸, 2차 세계대전 나치 이야기를 다룬 '바스타즈'나 '쉰들러 리스트'와 비교해 비판하곤 한다.

절대악인 체제와 맞서는 이야기를 그릴 때는, 그 체제를 상징하는 악역이 있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이 비판은 타당하다. 상업영화에선 흔히 절대악이 등장하고, 그 절대악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쾌감이 탄생한다. 아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면 자연스럽고 익숙한 드라마 전개다.

그렇지만 이 길을 걷지 않았다고 일본인만 악역이 아니었다고 역사왜곡이란 틀로 규정하는 건 희한하다. '군함도'에는 단 한 명으로 상징되는 악역이 없다. 곳곳에 악역이 산재됐다. 조선인 부역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일본인 소장, 일본 군인 등등 악역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절대 악이 없다는 게 상업적인 약점이다. 이는 류승완 감독이 역사의식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군함도'로 너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탓이다. 그는 군함도로 영화를 만들면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절대 악당을 만들고 두들겨 패서 쾌감을 주는 건 류승완 감독의 장기다. '베테랑'에서 익히 봤다. 그는 '군함도'에서 이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류승완 감독은 군함도에 자기 가족만 살면 된다는 한량과 어린아이, 깡패, 위안부, 지식인, 독립운동가, 부역자 등등을 가뒀다. 그리하여 군함도를 일제 강점기 조선의 축소판으로 만들었다.

그가 '군함도'로 그리고 싶었던 건, 일제 강점기 다양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그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잘못된 역사를 영화에서라도 바로잡아 대리만족을 주는 데 있다. 명백한 반민특위의 은유인 촛불장면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이 의도가 탈출 장르 영화가 주는 쾌감까지 이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이 쾌감이 부족한 건, 다시 일본인 절대 악역이 없는 탓이다. 민중의 힘을 모으지만 그 해결은 잘생긴 독립군에 모든 걸 맡긴 탓이다.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군함도의 실상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는 비난에서 또한 출발한다. 그리하여 상업영화로 군함도를 이용했다는 비난이 인다. 군함도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 때 보고 싶었던 영화와 다르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렸다. 그런 이유들이라면 군함도 실상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찾아야지, 군함도에서 탈출하는 상업영화를 볼 이유가 없다.

'군함도'는 일본인 절대 악역이 없기에, 영화 속에서 일어야 할 분노를,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군함도라는 역사에서 분명히 가져온다. 이 아쉬움과 역사왜곡은 궤가 다르다.

'군함도'가 역사왜곡 영화라는 비난은 부당하다. 그렇다고 '군함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일제 부역자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비난하는 것도 부당하다. 기대에 못 미치는, 혹은 기대와 다른 영화에 대한 비판을,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에 대한 반감에서 조리돌림하고 있을 뿐이다. 각각 다른 비판의 궤가 '군함도'로 쏟아지고 있을 뿐이다.

류승완 감독은 '군함도'에서 위안부에 총을 들렸다. 피해자에게 총을 들고 싸우게 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인 부역자가 일본 소녀를 강간하다가 죽이는 걸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몰살하려는 명분을 주게 만들었다. 이런 영화 속 불화에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런 아쉬움에 지적이 있어야 한다. 역사왜곡이란 왜곡된 프레임이 아니라, 영화 안에서 비판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그게 '군함도'를 둘러싼 논란이 뜻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난에서, 한 걸음 더 나가는 방식일 것이다.

류승완 감독은 분명 '군함도'를 만들면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게 옳은 길이었는지는 더 많은 말들이 나와야 한다. 그게 '군함도'를 소비하는 2017년 관객의 쉬운 길이 아닌 옳은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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