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산사에서 내놓은 밥 같은 영화..은근한 촛불

[리뷰] 박열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06.1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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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내놓은 밥.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박열'은 자극 없고 담담하다. 그 결은 누군가에겐 영혼의 위로를 줄 것 같다. 누군가에겐 심심할 것 같다. 그래도 그 결이 이야기하는 지금을, 다 공감할 것 같다. 이준익 감독은 여전히 과거를 오늘에 빗댔다.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성난 일본 군중은 조선인 6000여명을 학살했다. 민심을 돌리려 괴소문을 유포했던 일본 제국주의 내각은, 조선인 학살이 도가 지나치자 여론을 돌리려 희생양을 찾는다.

마침 아나키스트 조직인 불령사를 조직했던 박열은, 불령선인을 단속하는 일본 경찰에 의해 감옥에 잡힌 상태. 일제는 박열을 대역사건의 주동자로 몬다. 박열은 일본 황태자 폭탄 암살 사건을 꾀했던 터. 박열은 일제의 계략을 눈치채고 사건의 재판을 통해 조선인 학살사건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도 그의 뜻에 동참해 일본의 광대 놀음에서 제 뜻을 펼친다.

이준익 감독은 묻는다. 박열을 아냐고. 아나키스트를 아냐고. 이준익 감독은 2000년 영화 '아나키스트'를 제작했다가 쫄딱 말아먹었다. 그래도 박열을 건졌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괴사진을 만났다. 사형 선고를 앞둔 두 사람이 포개져 앉아 세상을 응시하는 사진. 혹독했던 일제 시절, 일본 황태자 암살을 획책했던 대역죄인들이, 감옥에 갇혀 조사를 받던 남녀가, 지금이라도 불가능할 법한 사진을 찍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 박열은 세상을 전면으로 응시하고, 가네코 후미코는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책을 본다. 박열의 한 손은 턱에, 한 손은 가네코 후미코의 가슴에 올려져 있다. 권력을 부정하고, 죽음에 초연하며, 세상을 응시하는 시선. 이준익 감독은 그 사진이 아나키스트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 이후 17년만에 '박열'을 세상에 선보였다.

불령선인. 일제가 말 안 듣는 조선인을 일컫는 말이다. 박열은 그 불령선인을 따서 불령사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마치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인 '니거'를, 흑인 스스로가 정체성으로 치받아 쓰는 것 같다. 100년이 좀 안된 그 시절, 박열은 그랬다.

이준익 감독은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에서, 그를 봤다. 그리고 '박열' 시작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를 거칠게 앉혔다. 권력에 저항하되 권력을 탐하지 않고, 세상을 비웃되 세상을 사랑하고, 일제와 싸우되 일본 민중과 연대하는 22살 청년. 죽음으로 저항하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세상을 깨치려 했던 그를, 오늘에 되살렸다.

'박열'은 박열과 그의 처 가네코 후미코를, 얽힌 뱀처럼 그렸다. 부모가 버려 9살 때 조선에서 식모살이를 하다 죽으려 했던 일본 소녀. 이렇게 죽기엔 억울하다며 세상에 복수하려 했던 여인. 우울한 검은빛이 생겨났다며 조선인 아나키스트들과 같이 불령사를 만들었던 사람. 21살에 박열과 같이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숨을 거둔 시대의 그림자.

이준익 감독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얽히되 평등하게 담았다. 카메라는 둘의 얼굴, 둘의 리액션, 둘의 표정까지 같은 높이에서 잡는다. 여느 영화라면 여성에게는 높은 자리에서 아래로 바라보기 마련인 카메라 눈높이가 없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정과 반에 의한 합으로 그리되, 누가 정인지 누가 반인지를, 구태여 나누지 않았다.

이 나누지 않는 정반합은, '박열' 전체를 관통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반으로 하되, 일본 민중을 반으로 그리지 않는다. 불령사를 정으로 하되, 식민지 지식인인 조선인 기자를 정으로 하지 않는다. 불령사를 변호하는 일본인 변호사를 정으로 하되, 일본인 간수를 반으로 담지 않는다. 일본 내무장관을 반으로 하되, 일본 검사를 반으로 하지 않는다. 이 회색빛 정반합, 선명하지 않는 구분은, '박열'의 색이다. 아나키스트의 색이다.

이준익 감독은 아나키스트를 기질이라고 봤다. 반골 기질에, 그러면서도 설렁설렁하고, 로망을 꿈꾸며, 떠도는 삶. 저항을 하되 권력을 탐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만으로 존재를 찾는 삶. 그리하여 '박열'은 담담하다. 적에게 겨누는 총구가 없다. 적조차 뚜렷하지 않다. 일본제국주의가 자유를 억압했기에 적일 뿐, 아나키스트에 조국은 없다. 그리하여 '박열'은 담담하다. 뜨겁지 않다. 과하지 않다. 민족주의를 애써 찾지 않는다. 감옥에서 울리는 노래 '인터내셔널'이 '박열'이다.

'박열'은 검사의 취조와 공판, 그리고 감옥으로 구성됐다. 단조롭다. 이 단조로운 공간을 오가는 모습을 연극처럼 보여준다. 카메라가 배우의 얼굴, 몸짓, 표정, 소리에 집중한다. 관객의 눈앞에 펼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이 단조로운 구성은, 박열의 취조와 가네코 후미코의 취조를 정반으로 붙이고, 다시 공판으로 합을 이루며 완성된다. 일본 제국주의를 희롱하는 한바탕 연극에 관객을 동참시킨다. 이 연극에 관객이 기꺼이 동참한다면 '박열'에 푹 잠길 것 같다. 거리를 둔다면, '박열'의 연극을 심심한 광대놀음으로 볼 것 같다.

'박열'의 타이틀롤을 맞은 이제훈. 그의 필모그라피 중에서 온도가 제일 낮다. '박열' 속 박열이 곧 이준익 감독인 만큼, 둘은 머리숱 빼고 많이 닮았다. 유쾌하고 설렁설렁하되, 진지하고 세상을 사랑한다. 이제훈의 온도가 점점 더 낮아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은 최희서. 스타 탄생을 예감시킨다. 일본인이라고 해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 같다. 코끝 찡긋 부터 허리에 올리는 손. 높아졌다 낮아졌다 퍼졌다가 좁히는 연기태가 모두 좋다. 발성과 시선, 눈빛, 얼굴 근육 사용, 종종거리는 몸 사용, 작지만 커 보이는 태도. 역사 속 그림자로 남은 가네코 후미코를 현재로 되살렸다. 가네코 후미코 캐릭터가 근래 한국영화에서 두 번 볼 수 없는 캐릭터이기도 하지만, 그 캐릭터를 감독과 배우가 같이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참 좋다.

'박열'은 100년이 좀 안된 옛날 이야기다. 그럼에도 지독히 현재와 닮았다. 모의 만으로 사형이 선고됐다는 건, 통진당 해산과 닮았다. 일제가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했지만 곧 잊혀질 것이라고 장담한 건, 세월호 조사와 닮았다. '박열'이 얻은 현재다.

'박열'은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박열의 시로 시작해 "산다는 것은 그저 움직이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라는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 한 대목으로 맺는다. '박열'의 결이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둘이서 하나라는 뜻이다.

'박열'은 횃불 같지 않고, 촛불 같다. 뜨겁지 않다. 은은하다. 은근하다. 이 은근함은 산사에서 내놓는 밥처럼 정겹다. '박열'이 반갑다면 지쳤기 때문일 것 같다. 위로를 은근히 건넨다.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살라 한다.

6월28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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