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피겨스' 감춰질 수 없는 여성들의 신나는 연대기 ①

[리뷰] 히든 피겨스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7.03.20 14:02 / 조회 : 3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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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숨겨진 인물, 또는 숨겨진 숫자. '히든 피겨스'는 감춰졌거나 지워진, 그러나 기억하기에 충분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숫자의 이야기기도 하다.


'히든 피겨스'(감독 데오도르 멜피)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한편으로 흑인 인권 운동이 한창이던 그 시절.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다.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흑인이기에 여성이기에 잊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되돌아오게 하는 데 필요한 수학공식을 찾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수학자 캐서린 존슨(타라지 헨슨), 미 항공우주국(NASA) 최초의 흑인 여성 간부가 된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나사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 메리 잭슨(자넬 모네),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다.

흑인 여성 셋이 자동차가 고장 나 길가에 서 있다. 경찰이 다가온다. 백인 남성이다. 흑인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 무례하고 거친 경찰은 세 여성이 소련에 맞서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일을 하는 나사 직원이란 소리를 듣자 돌변한다. 적에 대한 증오가 혐오를 앞선다. 백인 남성 경찰이 에스코트해 세 흑인 여성을 나사에 데려다 준다. '히든 피겨스'는 이런 이야기다.

흑인 여성은 아무리 뛰어난 수학자라고 해도 우주선을 우주 궤도에 올리는 수학 공식을 만드는 일에는 참여할 수 없다. 기껏 보조작업을 할 수 있을 뿐. 그나마 커피 마저 흑인 전용이 따로 있다. 건물에 화장실도 없다. 유색인이 쓸 수 있는 화장실은 800미터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연구실에 있을 뿐. 그런 상황에서도 캐서린 존슨은 무수한 숫자 속에서 답을 찾아간다.


도로시 본. 훨씬 어린 백인 여성 간부에게 매일 모욕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흑인 여성에겐 정규직이란 언감생심. 도로시 본은 살아남기 위해, 같은 처지의 흑인 여성 동료들을 위해, 컴퓨터를 홀로 공부한다. 막 들어놓은 IBM 컴퓨터가 미래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

메리 잭슨. 엔지니어가 되고 싶지만 흑인 여성이 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지만 흑인 입학 금지다. 법적인 투쟁 끝에 야간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남편 마저 백인들에게 알랑거리지 말라고 하지만 노력 끝에 흑인 여성 최초 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다.

실존 인물 세 명의 이야기인지라, 당연히 울림이 크다. 능력이 있어도 흑인에 여성이란 이유로 뚫을 수 없었던 유리천장을 뚫는 이야기에 감동이 없다는 게 이상할 일이다. 오해와 박해, 부조리한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간다. 강한 적이 있었기에 가능했기도 했다. 이미 흑인 남성은 전쟁에서 능력을 발휘해 군 간부가 됐던 시절이기도 했다.

감동이 보장된 실화, 시대와 맞는 이야기, 흥겨운 음악. '히든 피겨스' 음악은 '해피'로 유명한 팝스타 퍼렐 윌리엄스와 영화음악 거장 한스 짐머가 같이 만들었다.

'히든 피겨스'는 정치적인 올바름에 페미니즘이란 시대정신, 여성 연대 등이 적절히 조합됐다. 그런 조합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기본적인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히든 피겨스'는 흑인 여성 세 명의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은 타라지 헨슨이 맡은 캐서린 존슨이다. 극 중 이 인물은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담은 캐릭터다. 맞서기보단 끈질긴 인내 속에서 성취를 이루는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인데도 주도하지 못한다. 그녀가 이룬 성취는 능력을 알아봐주는 백인 남성 보스 알 해리슨(케빈 코스트너) 때문인 탓이다. 더 능동적이었던 메리 존슨, 도로시 본이 아닌 캐서린 존슨이 이야기를 이끌다 보니 그녀들의 성취도 백인 남성의 시혜처럼 느껴지는 게 옥에 티다.

'히든 피겨스'는 그럼에도 신명 난다. 피해자나 범죄자가 아닌 전문직인 흑인 여성들. 투쟁만이 아닌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히든 피겨스'가 여성들의 연대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귀하다. '히든 피겨스' 원저는 흑인 여성 작가 마고 리 셰털리의 손에서 탄생했다. 나사 직원이었던 아버지에게서 캐서린 존슨 이야기를 듣고 에세이를 썼다. '더 리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등을 만든 여성 영화 제작자 돈나 지글리오티는 이 이야기를 듣고 에세이가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를 결정했다. 각색은 여성 작가 엘리슨 슈로더가 했다. 아카데미 수상자인 옥타비아 스펜서가 참여해 궤도에 오른 건 물론이다. 뿐만 아니다. 할리우드에서도 3%가 채 안된다는 여성 촬영감독(맨디 워쿼)이 찍었다.

숨겨진 인물들을 세상 밖에 내놓은 게, 여성들이고, 그 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한국에 도착한 건, 분명 의미 있다.

3월2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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