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호의 MLB산책] '젊은 영웅' 호세 페르난데스 영면에 부쳐

장윤호 스타뉴스 대표 / 입력 : 2016.09.27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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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사고로 사망한 호세 페르난데스. /AFPBBNews=뉴스1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엄청난 파도로 인해 출렁이던 보트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갑판 위까지 들이닥친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보트 선장과 이야기 중이던 15세 소년 호세 페르난데스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사람이 바다에 빠진 것을 알자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엄청난 파도가 넘실대는 컴컴한 밤바다로 뛰어들었다. 보트의 전조등이 이들이 빠진 바다를 향해 비췄고 빠진 사람은 향해 헤엄치던 소년은 그 사람을 발견한 순간 깜짝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수영을 할 줄 알았지만 충격으로 인해 당시 상태는 간신히 바다에 떠 있는 정도였다. 이들의 절박한 심정에도 불구, 무심한 파도는 계속해서 이들을 거칠게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가 떨어뜨리기를 반복했고 소년은 바로 지척의 거리에서도 어머니에게 가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어머니에게 도달한 소년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내 등을 꼭 잡아요. 하지만 누르지는 마요. 천천히 갈 거여요. 우린 (배로) 돌아갈 수 있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왼쪽 어깨를 꼭 붙잡았고 소년은 오른 팔만으로 집채 같은 파도를 헤치며 보트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보트까지의 거리는 불과 60피트(18미터) 정도로 그리 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몰려오는 높이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파도를 헤쳐야했던 소년과 어머니에겐 영원처럼 멀고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약 15분간에 걸친 사투 끝에 보트에서 던져준 밧줄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들 모자는 사경을 벗어났고 쿠바를 탈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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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데스를 추모하며 꽃을 바치는 팬./AFPBBNews=뉴스1


이에 앞서 이들은 무려 13번이나 쿠바 탈출을 시도했으나 대부분은 보트에 올라타기도 전에 붙잡혔고 한 번은 미국 마이애미 인근 앞바다까지 가는데 성공했으나 해변에 도달하기 직전 미국 해안경비대에 적발돼 쿠바로 강제 송환됐다. 미국 법은 망명을 시도하는 쿠바인들의 경우 일단 미국 땅에 발을 붙이기만 하면 망명자 신분으로 합법적 체류를 허락하지만 만약 땅에 내리지 못하고 바다에서 붙잡히면 쿠바로 돌려보내는 특이한 형태로 되어있다.


그러기에 미국 해안에서 해안경비대에 적발될 경우 일부 쿠바인들은 해안에 근접했을 경우 배에서 뛰어내려 필사적으로 수영을 하다가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는 쿠바로 송환된 뒤 그때 만 14살에 불과했던 나이에도 불구, 감옥에서 살인범 등 강력범들과 함께 몇 달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뒤 이들은 또 한 번의 탈출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번엔 북쪽 방향의 마이애미가 아니라 남쪽의 멕시코 칸쿤 쪽으로 가기로 했다. 일단 멕시코로 간 뒤 육로로 미국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거리가 훨씬 멀고 건너야할 바다도 더 거칠지만 감시가 덜했고 무엇보다 미국 해안경비대를 만날 위험도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자는 위에 언급한 생사를 오가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멕시코에 도달한 이들은 이들을 탈출시켜준 브로커의 집에서 머물며 다른 쿠바 탈출자들과 합류했고 약 일주일 뒤 버스를 타고 미국의 텍사스-멕시코 국경 쪽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 복장을 하고 나타난 한 무리의 강도들에게 승객 모두가 붙잡혀 귀중품을 몽땅 강탈당하기도 했으나 최소한 미 국경을 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일단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자 이들은 바로 쿠바인들의 망명과 합법체류를 허용하는 법에 따라 마침내 꿈에 그리던 자유의 몸이 됐다. 페르난데스는 텍사스에 도착해 이민국에서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 심경은 도무지 뭐라고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고 토로했다. 그때가 2008년 4월5일이었다.

많은 쿠바 야구선수들이 메이저리그 드림을 꿈꾸며 목숨을 걸고 쿠바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페르난데스의 경우는 어렸을 때 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격수 알레디미스 디아스와 같은 동네에서 살며 야구를 하긴 했으나 특별히 메이저리그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쿠바를 탈출한 계부가 자리 잡고 있던 플로리다 탬파에 도착한 뒤 고교 야구팀에 트라이아웃을 통해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기 시작했고 올란도 에르난데스와 호세 콘트레라스 등 쿠바 출신의 메이저리그 투수들을 지도한 쿠바 출신의 코치 올란도 치네아를 만나면서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영어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야구에만 몰두했고 빠른 시일 내에 최고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탬파의 브롤리오 알론소 고교를 두 번이나 플로리다 챔피언으로 이끈 페르난데스는 2011년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1번으로 마이애미 말린스에 지명됐고 2012년 싱글A와 싱글A 상위리그를 평정한 뒤 2013년 더블A 또는 트리플A로 갈 예정이었으나 스프링캠프 도중 마이애미 투수들의 잇단 부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았다.

2013년 4월7일 페르난데스는 뉴욕 메츠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만 20세의 루키는 5이닝동안 메츠 타선을 5이닝동안 삼진 8개를 곁들여 3안타 1실점으로 틀어막는 인상적인 역투를 했다. 생애 첫 메이저리그 등판이었지만 그에게서 빅리그에 대한 두려움이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롤러코스터와 뱀 뿐”이라면서 “난 감옥에도 있어봤고 총격을 받기도 했으며 바다에도 빠져봤다.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데이빗 라이트(메츠 슬러거)를 상대하는 것이 겁나지 않는다. 그가 (내게) 뭘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해 루키로 올스타게임에 나간 페르난데스는 28경기에서 12승6패, 평균자책점 2.19를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신인왕에 뽑혔다. 172.2이닝동안 삼진 187개를 쓸어담았고 그의 시즌 WAR(베이스볼 레퍼런스)는 6.3에 달했다. 더블A도 거친 적이 없는 만 20세 루키의 성적은 메이저리그 역대급이었다. 지난 2014년 오른쪽 팔꿈치 통증으로 토미 존 수술을 받는 어려움을 또 거쳤으나 이미 생사를 오가는 어려움을 극복한 그에게 토미 존 수술 정도는 가벼운 장애물에 불과했다. 지난해 복귀해 11번의 등판에서 6승1패, 2.92의 성적으로 재기를 알린 그는 올해 커리어 최고인 29번의 선발등판에서 182.1이닝동안 무려 253개의 탈삼진을 쓸어 담으며 16승8패, 2.86의 빼어난 성적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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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아웃에 거려있는 페르난데스의 유니폼. /AFPBBNews=뉴스1


4년간 메이저리그에서 그가 남긴 38승17패, 평균자책점 2.58. 특히 그의 ERA+는 무려 150에 달한다. ERA+에서 100은 평균 메이저리그 투수를 말한다. 150이란 수치가 얼마나 높은 지 짐작할 수 있다. ESPN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70번 이상 선발로 등판한 오른손 투수가운데 페르난데스보다 높은 ERA+를 기록한 선수는 아무도 없다. 로저 클레멘스, 톰 시버, 드와이트 구든 등도 페르난데스 아래쪽에 있다.

남을 위해서라면 15살 때 이미 집채만한 파도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바다 속에서 뛰어드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어린 영웅.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믿기기 않는 ‘아메리칸 드림’을 써 가던 만 24세의 젊은 슈퍼스타는 그 엄청난 잠재력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도 못하고 너무도 빨리, 홀연 듯 우리 곁을 떠나갔다. 단 24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로 영화보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돌아보면서 고개 숙여 그가 제 세상에서 편히 쉬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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