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아가씨' 방울이 남성 시각? 남성 판타지? 납득할 수 없다"(인터뷰)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6.06.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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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사진=임성균 기자


거장, 마에스트로, 깐느박, 핏빛 복수자... 박찬욱 감독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각각의 단면들은 사실들이다. 이 단면들이 쌓이고 쌓여 박찬욱이란 세계가 입체로 만들어진다.

새 영화 '아가씨'는 박찬욱의 그런 세계들이다. 그는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로 인기를 얻었던 영국소설 '핑거스미스'를 각색해 '아가씨'라는 세계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막대한 유산의 상속녀(김민희)를 유혹해 재산을 빼돌리려는 사기꾼 백작(하정우)이 있다. 상속녀는 후견인인 이모부(조진웅)와 결혼해야 할 처지다. 이모부도 그녀의 재산을 노린 탓이다. 사기꾼 백작은 상속녀에게 하녀(김태리)를 보낸다. 하녀가 곁에서 자신이 상속녀를 유혹하는데 돕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만 하녀와 상속녀가 사랑에 빠진다.


과연 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박찬욱 감독의 설명을 들었다.

-왜 여자끼리의 사랑이었나.

▶원작이 여성 간의 사랑 이야기 아니었나. 동성애적인 요소가 없었더라도 원작에 대한 흥미가 워낙 컸었기에 '핑거스미스'를 선택했을 것이다.


-할리우드 진출작인 '스토커'에 이어 '아가씨'도 여성주의가 눈에 띄는데. 과거 전작들이 복수, 폭력 같은 남성적인 서사였다면 최근작들은 여성적인 서사가 두드러지는데.

▶꼭 그랬던 것 만은 아니다. '스토커'로 여성 주인공 이야기를 했기에 다음 영화를 또 여성 주인공을 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두 명의 여성 주인공이니깐. 마침 할리우드에서 서부극 연출 제안을 받았다. ( 박찬욱 감독은 당시 서부극 '더 브리건즈 오브 래틀버지' 제안을 받고 준비 중이었다. 마을에 불한당들이 습격해오고 이에 맞서는 보안관이 생존자들을 이끌고 복수하는 이야기였다)

서부극은 원래 너무 해보고 싶던 장르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제작사 용필름 임승용 대표에게 미루자고 했었다. 그런데 결국 엎어지긴 했지만 남성들의 서사인 서부극 시나리오를 쓰고 났더니 '아가씨'를 하는 게 여성 주인공 이야기를 '스토커' 이후 연속으로 한다는 느낌이 안들더라.

'올드보이'를 한 뒤 (여성 주인공인)'친절한 금자씨'를 한 건 의도적이었다. 남성 중심의 서사인 복수극을 3부작으로 마무리하려면 세 번째는 여성 중심이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다.

따지고 보면 '공동경비구역 JSA'도 원작에선 수사관이 남성이었다. 그 역할을 이영애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그런 방향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성이 능동적으로 활약하는 이야기가 끌렸던 것 같다.

-'친절한 금자씨'도 그렇고, '스토커'도 그렇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 '아가씨'까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 여자가 주인공이면 결말이 해피엔딩인데. 의도적인가.

▶일부로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음, 생각해보면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가씨' 마지막에 김민희와 김태리의 베드신을 보면 정확히 데칼코마니 같은 대칭을 이룬다. '아가씨' 속에선 곳곳에서 두 여인을 대칭으로 그린 걸 볼 수 있는데. 첫 베드신의 체위도 서로를 쳐다보면서 가로로 이어지는 대등한 구도이고. 계급으론 아가씨와 하녀인데 대칭으로 그리려 한 까닭은.

▶대칭구조가 많다. 첫 정사장면의 부감샷도 그렇고, 체위도 그렇고. 식민지 시대였다. 일본과 조선, 그런 계급차이, 이런 것들의 격차를 무력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대등한 상태로 발전돼 가는, 그런 모티프가 가장 중요했다. 마지막에 히데코(김민희)가 무릎을 꿇고 숙희(김태리)의 구두끈을 고쳐준다. 그런 테마를 담으려 했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원작을 일제 강점기로 바꾸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다룬 한국영화로는 역사성이 거세돼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진짜가 되고 싶은 가짜들의 이야기, 즉 페이크(FAKE)를 다루고 그 속에서 진짜를 찾아 나서는 구조로 만들어지면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얻는 것 같은데.

▶그런 면도 있다. 그렇다고 역사적인 시각이 전혀 배제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막연한 배경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필요한 배경이었다. 관념적으로 친일파를 그린다기 보다 적극적인 친일파를 그리고 싶었다. 돈벌이나 권력을 탐해 친일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서, 매료돼서, 숭배하고, 동일화되고 싶은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그게 열등감에서 비롯된 건데, 자처해서 노예가 되고 싶은 그런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 바로 그게 이모부인 코오즈키(조진웅)이다. 그렇기에 그의 미적 취향이나, 그런 것들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 많지 않나.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아가씨'에서 코오즈키는 계속 나오지는 않지만 계속 나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저택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제국이니깐. 그 사람들이 없더라고 식탁이나 서재 등은 그 사람 자체다.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했다.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한 건 서재 장면 같은 경우 한 프레임에 압도적인 정보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싶단 뜻이기도 할텐데. (아나모픽 렌즈는 일반 렌즈보다 먼 거리에 있는 사물들을 가깝게 담아낸다)

▶아나모픽 렌즈는 필름룩에 가까운 느낌을 주려 사용했다. 지금 한국에선 필름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환경이니깐. 가급적 70년대 구형 느낌을 주는 걸 사용했다. 입자가 거칠고, 심도가 낮은. 또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한 건 와이드 스크린으로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기도 하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계속 시네마스코프 비율로 영화를 찍는다. 와이드 스크린이야말로 인간 시각과 가장 가까운 범위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비스타 비율을 쓴다면 미학적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시네마스코프는 스크린의 가로 대 세로 비율이 2.35 대 1로 보여지는 정보의 양이 많다. 비스타 비율은 1.85 대 1이다. 가로 비율이 넓을수록 와이드 화면에 가깝다.)

-다른 감독들과 달리 카메라를 한 대만 사용해서 찍는데, 서재처럼 동선이 쉽지 않은 세트에서 아노모픽 렌즈을 사용하면 오퍼레이팅이 어렵지 않나. 그래서 마치 화면이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박찬욱 감독은 봉준호 감독과 함께 카메라를 한 대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즉 여러 대의 카메라로 찍어서 편집으로 쪼개서 붙이는 게 아니라 카메라 한 대로 인물을 따라가거나 인물은 그대로 있고 카메라가 따라가는(오퍼레이팅) 방식이다. 그래서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 영화는 화면이 흐르듯이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글쎄, 처음부터 카메라는 한 대만 사용했으니 그게 편하다. 각자의 움직임이 많아도 서재는 그 움직임이 한정돼 있기도 하고.

-그림 같은 화면들이 음악으로 연결된다. 음악이 화면을 밀어내는 것 같기도 한데. 장 필립 라모에서 모차르트로 이어지는 음악들이 화면들을 연결하고 리듬을 살리는데. 음악설계는 어떻게 했나.

▶조영욱 음악감독에게 참고할 만한 음악들을 CD 세 장에 담아 전해줬다. 다 실내악이었다. 배우와 스태프들에게도 나눠줬다. 이런 분위기로 음악이 사용될테니 참고하라고 했다. 고전주의 이후의 음악들이었다. 그 중에서 한 곡만 그대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비슷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영화에서 음악은 한 신 한 신 감성을 만들어내는 것 못지않게 전체적으로 리듬을 만들어준다. 촬영이나 편집으로도 리듬을 만들지만 음악도 템포와 흐름을 만든다. 흐름을 놨다, 쥐었다 한다. '아가씨'는 보통 상업영화와 구성이 다르다. 1부와 2부는 사건이 반복되고 3부는 해방을 가져온다. 그런 구성을 음악을 이용해 통합된 리듬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다.

-2막에서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서재 세트는 아주 중요했다. 일본과 영국의 분위기를 조화롭게 만들었는데. 말하자면 가짜의 조화를 추구했다. 쉽지 않았을텐데.

▶이 장소는 히데코(김민희)를 형성시킨 공간이자, 코오즈키(조진웅)가 자기 욕망을 쌓아온 우주다. 백작(하정우)과 히데코가 처음 만나는 공간이며, 히데코와 숙희(김태리)가 파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파괴가 카타르시스를 주고. 그렇기에 영화의 중요한 게 다 집약된 곳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히데코의 방이고.

그래서 이 장소는 시대상황을 보여줘야 하는 한편, 코오즈키의 내면을 시각화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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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사진=임성균 기자


-히데코가 사내들 앞에서 낭독하는 음서들 중 하는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인 '금병매'를 모티프로 하고, 하나는 사드 풍이라고 했는데. 다 가짜인가.

▶그렇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모든 책들은 다 가짜로 만든 것이다. 왜 금병매라고 묻는다면, 변태들의 모임이 국제적인 성격을 갖도록 하고 싶었다. 조선에도 외설문학이란게 있었으면 사용했을 것이다. 조선은 그토록 지독하지 않고 해학적이라 너무 재밌어 질 것 같아 제외했다.

-히데코의 방과 배 안의 선실. 두 장소는 숙희와 정사를 벌이는 곳이자 각기 다른 의미로 중요했을텐데.

▶히데코의 방은 생물 같은 느낌이다. 벽지를 보면 외설적인, 그리고 여성성이 드러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블루 톤이다. 선실은 레드 톤이다. 히데코 방이 차갑다면 선실은 따뜻하다.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생각했다. 선실은 대칭성에 초점을 맞췄다.

-'아가씨'에서 칸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일각에선 두 여성의 베드신을 놓고 남성적인 시각이라고도 평하는데. 남성적인 시각이란 게 영화적인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긴 하다. 그것과 별개로 남성적인 시각이라고 가장 이야기되는 게 마지막에 두 여성이 방울을 갖고, 즉 기구를 사용해서 정사를 벌이는 게 불편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방울은 이 영화에서 비슷한 모양으로 계속 등장한다. 그걸로 맺음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을텐데.

▶방울과 비슷한 형태의 도구들이 등장하는 건 물론 의도적인 것이다. 처음 등장하는 방울 모양의 도구는 문진이다. 구리로 된 구슬이다. 이건 히데코를 훈육하는 폭력의 도구였다. 뒤에 정사에 사용되는 도구는 은으로 된 방울이다.

낭독회 장면 중에 정전이 된다. 사람들은 동요하지만 정작 책을 읽는 히데코는 동요하지 않고 내면으로 빠져든다. 그러면서 숙희와 그런 장면들을 상상한다. 변태적인 남성들의 강요에 의한 낭독이지만, 그 안에서 자기 것으로 희열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컷에서 첫 정사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 문진과 방울은 그런 점에서 연결된다. 폭력의 도구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사용해서 사랑을 나누는 건, 강요당한 낭독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전복의 쾌감을 준다. 은 방울은 해방여행에서 축하의 세리모니로 사용된다. 그 때 둘의 사랑은 애들 같고 놀이 같다. 배우들에게 애들이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처럼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다. 전복이자 놀이로서 쾌감의 도구이다.

그런데 왜 그게 남성적인 면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납득할 수 없다.

-김민희와 김태리의 정사 장면을 스태프들을 다 내보낸 채 무인카메라로 찍었다던데. 과거 남녀의 정사 장면보다 더 섬세하게 배려를 한 까닭이 있다면. 또 무인카메라로 찍으면 원하는 그림이 제대로 찍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는 없었나.

▶영화의 스토리보드를 늘 만드는데, '아가씨'에선 정사 장면 스토리보드를 제일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제일 자세히 만들었다.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자세가 실제로 가능한지, 그리고 보이면 안될 부위가 카메라에 담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 조정했다. 그래서 배우들이 옷을 입고 연습도 했다. 감정을 연습한 게 아니라 카메라에 어떻게 담길지를 미리 파악한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무인카메라가 리모트 헤드란 장치로 섬세하게 조정이 가능하다. 동시녹음은 어쩔 수 없었으니 불가피하게 한 명 들어갔다. 그래서 그 장면을 위해 여성붐맨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베드신은 배우들이 예민할 수 밖에 없다. 최대한 배려를 해줘야 한다. 침실 세트 옆에 화장실 세트가 있었는데 그걸 대기실로 꾸몄다. 향초를 피우고 와인도 갖다놨다. 그래서 촬영이 중단되면 아무도 못들어가고 온전히 두 여배우만 쉴 수 있도록 했다.

-남성성이 두드러졌던 과거 영화들에 비해 점점 더 여성성이 깊어지게 표현되고 있다. 앞으로도 더 그런 방향으로 가게 될 것 같은가.

▶여성성이 깊어지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향으로 앞으로 내 영화가 진행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이야기냐에 따라 다르다. 차기작으로 생각 중인 영화는 남성이 주인공이 어두운 폭력적인 이야기다. 미국영화인데 아직 투자가 확정되지 않아 정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런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현재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은 미국 스릴러 소설 '엑스'(도끼)를 영화화하는 게 거론 중이다. 정리 해고된 남자가 마치 자기가 사람들을 취직시키는 것처럼 입사서류를 받아 잠재적 경쟁자들을 살인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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