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표 촬영감독 "'곡성' 촬영 끝나자 제대한 기분"(인터뷰) ①

[韓영화 장인 릴레이 인터뷰]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6.05.25 09:00 / 조회 : 14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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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표 촬영감독/사진=이동훈 기자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촬영감독을 꼽자면 홍경표(54)는 단연 첫 손에 꼽힌다. 28살 늦은 나이에 촬영 스태프로 영화계에 입문,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등 촬영부를 거쳐 '하우등'으로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한국영화 중심엔 늘 그가 있었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대표작을 열거하면, 곧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역사다. '유령' '반칙왕' '시월애' '킬러들의 수다' '지구를 지켜라' '내츄럴 시티' '태극기 휘날리며' '마더' '초능력자' '설국열차'와 '해무',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곡성'까지, 그는 카메라를 붓처럼 사용하고, 빛을 물감처럼 화면에 담아낸다. 와이드샷이면 와이드샷, 액션이면 액션, 인물이면 인물, 홍경표 촬영감독은 가히 만능형 촬영감독으로 두루 인정받는다.

'해무'로 홍 감독과 인연을 맺은 김윤석이 나홍진 감독에게 '곡성' 촬영감독으로 홍경표 촬영감독을 추천한 건 유명한 이야기. 지독히 힘들고 탈도 많았던 '해무' 촬영 현장 때문에 가슴앓이를 톡톡히 한 홍 감독은 사실 '곡성'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지옥에서 막 빠져 나왔는데 또 다시 지옥으로 들어가기가 선뜻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나리오에 반해 결국 나홍진 감독의 프러포즈를 수락, '곡성'의 깊고 음산하고 마법 같은 화면을 만들어냈다.

사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영화 지망생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스토리가 곧 영화다. 대구에서 자라면서 질풍노도 같은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어찌어찌 마음을 다잡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들어왔다. 민주화 운동이 절정이던 1980년대 말이었다. 같이 하숙하던 형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배웠다.


중학교 때 미술을 좋아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이란 걸 받아봤지만, 영화는 꿈도 꾸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를 때, 먹구름이 잔뜩 낀 것 같은 때에, 형이 비디오카메라를 사줬다. 1988년, 28살 즈음이었다.

평생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고,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서, 이것저것 부딪힐 때였다. 부동산 자격증이 유망하다고 해서 공부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비디오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게 마냥 좋았다.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영상이 재밌으니 편집까지 배웠다. 교보문고에 가서 영상과 편집에 관련된 책을 사서 공부했다. 밤을 새서 편집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하고 싶어졌다.

비디오교본 뒷장에 있는 저자 연락처를 보고 전화해 "어떻게 하면 영화 촬영 일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황당해하면서도 한국영화촬영감독협회 연락처를 알려줬다. 무작정 촬영감독협회에 전화해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일단 오라"고 했다. 면접 자리 인줄 알고 양복을 입고 갔다. 가자마자 바로 현장에 내보냈다. 그렇게 간 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촬영장이었다.

"뭐 이런 현장이 있나" 싶었다. 욕설이 난무하고, 여배우에게도 심한 말을 예사로 뱉는 곳이었다. 그래도 일단 갔으니 1년만 버텨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면서 송해성 감독, 차승재 당시 프로듀서 등 새로운 영화를 고민하던 젊은 영화인들과 교류했다. 10편 정도 촬영감독 세컨드를 하면서 충무로 시스템에 한계를 느꼈다.

촬영감독이지만, 카메라보다 빛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촬영감독 따로 조명감독 따로, 각자 일을 하는 시스템은 구태라고 생각됐다. 91년 미국으로 영화 공부를 해야겠다며 떠났다. 받은 돈도 없으니 모은 돈도 없었다. 부모님 몰래 전세금을 뺐다.

한국에서부터 고민했던 DP(Director of Photography) 시스템을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파고 들었다. DP는 촬영감독, 조명감독 따로 있는 충무로 시스템이 아니라 촬영감독이 조명감독(개퍼)과 그립팀(조명장치를 세팅하는 사람들)을 직접 운영하며 전체 그림과 빛을 설계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에서 김수희 주연의 '애수의 하모니카'를 찍으면서 처음 DP시스템을 도입했다. 한국이라면 조명감독협회 등쌀에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조명감독이 촬영감독 밑이라니"라면서 아예 조명장치를 빌려 주지 않았으니깐.

집안이 어려워져 한국에 돌아왔다. 미국에서 촬영감독으로 뿌리를 내릴 생각으로 떠났기에 아쉬움이 짙게 남았다. 돌아왔더니 차승재 프로듀서가 우노필름을 세우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단편영화 촬영감독을 했다. 실험영화연구소에서 스터디를 하며 새로운 영화 시스템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촬영감독 한국 데뷔작인 '하우등'을 찍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영화에 DP시스템을 도입했다.

말들이 많았다. 조명에 필요한 발전장치를 빌려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일 없이 놀고 있는 조명 인력을 챙기고, 조명감독협회에 가서 읍소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홍경표 촬영감독에게 빛은, 현장 장악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빛이 렌즈보다 더 중요하다. 결국 촬영이란 빛을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빛과 색을 총괄해서 어떻게, 얼마나 공을 들이느냐에 따라 카메라에 담기는 게 달라진다."

그는 '하우등' 때부터 반드시 영화에 빛이 느껴지도록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초창기 작품에는 유달리 과한 빛과 색이 과한 적도 있었다. 시스템과 계속 투쟁이었다.

"내가 어떻게 빛을 담고, 어떻게 촬영할지 결정도 안 했는데 이미 크레인이 세팅이 돼 있다. 그러면 다시 세팅을 해야 하고, 얼마나 시간 낭비냐. 이건 게임이다. 내 인생이 걸린 게임인데, 내 실력을 제대로 발휘 못하면 지는 게 아니냐."

홍 감독은 "기술 스태프가 제대로면 영화 퀄리티가 일단 보장된다"고 했다. "감독이야 신인들도 나오고, 기성 감독들도 있지만, 기술 스태프 실력이 확실하면 영화의 기본적인 질은 보장된다"고도 했다. 그는 "자꾸 그러다보니 나만 나서는 사람이 됐다"고도 했다.

그렇게 싸워가며 돈을 모아 '지구를 지켜라' 때부터 조명을 샀다. 조명장비를 안 빌려주니깐. 그리하여 그는 한국영화계에 홍경표 사단을 만들었다.

영화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촬영팀 3~5명, 조명팀 4~5명, 그립팀 3~4명으로 구성된 그만의 DP시스템을 만들었다. 혹자는 비싸다고 비아냥댔다. 혹자는 잘난 척한다고 뒷말을 했다. 표준계약서가 없던 시절, 홍경표 감독은 자기 돈으로 DP시스템을 운영했다. 결국 그의 시스템을, 영화계가 인정했다. 힘들었다. 지치고 포기할까도 싶었다.

그러다 만난 영화가 봉준호 감독의 '마더'였다. "빛이 있고, 그림이 있다"는 그의 생각과 봉준호 감독의 생각이 맞아 떨어졌다. 홍 감독은 제안을 받으면 시나리오를 읽고 영상을 선명하게 떠올린다. 그리고 감독과 이야기해서 의견을 조율한다.

'마더'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빛과 그림, 색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외로운 싸움에 회의를 느끼던 시절, '마더'는 다시 마냥 즐겁게 비디오 카메라로 빛을 담아내던 시작을 되새겨줬다. 봉준호 감독은 카메라를 한대를 쓰는 대신 카메라를 움직여(오퍼레이팅) 의미를 둔다.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블록버스터를 하면서도 "내가 블록버스터 찍으려 했던 게 아닌데"라고 회의했던 그에게 '마더'는 "초심으로 돌아가 힘 안들이고 찍는 법을 되살려줬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과 '설국열차'를 다시 했다. 인물에 집중하는 영화다 보니 촬영감독으로선 보여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인물의 굵기, 질감 등등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했던 '해무'는 힘든 나날이었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현하는 것도 힘들었고, 사고까지 났던 촬영현장은 힘든 나날이었다. 배 위라서 포커스를 맞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제작자였던 봉준호 감독에게 "못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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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표 촬영감독/곡성 스틸


'해무'가 그리 끝난 터라 다음에는 편안한 코미디 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홍진 감독이 '곡성'을 들고 찾아왔다. "6개월 동안 촬영하면서 지옥 같은 그림들을 계속 머리에 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홍 감독은 나홍진 감독에게 "대단하다. 어떻게 '곡성' 이 이미지를 2~3년간 머리에 계속 담고 있었냐"라고 했다. 하루를 고민했지만 "너무 땡겼다".

홍 감독은 "'곡성'은 미리 어떻게 찍을지 생각하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도 콘티를 버렸다. 둘이 논의하면서 마치 재즈처럼 찍었다. 그렇게 찍고 6개월만에 집에 돌아오니 군대에서 제대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홍경표 촬영감독은 "촬영을 하는 걸 슈팅이라고 한다. 사냥꾼이 목표를 쏘는 것이란 뜻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목표한 그림이 정확히 스크린에 구현되는 순간 엄청난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조그만 현장 모니터로는 제대로 잡혔는지 모를 그림이, 스크린에 옮겨지는 순간에야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는 필름 시대를 거쳐 디지털 시대를 최선두에 서서 가고 있다. 여전히 필름의 질감이 더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디지털의 미래도 같이 고민한다. 홍 감독은 "3D 촬영도 고민해봤다. '곡성'은 스크린X(스크린을 3면에 걸쳐서 활용하는 방식) 촬영도 검토했었다. VR도 공부해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도 최고지만 늘 공부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최고이기도 하다. "촬영감독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인문학, 철학, 심리학, 빛 등등을 다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감독과 대화를 하고 그 그림을 카메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리우드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는 그가, 앞으로도 계속 그려나갈 영화들이 더 궁금해졌다.

#홍경표 촬영감독이 전하는 '곡성' 뒷이야기②, 홍경표 촬영감독이 도입한 DP란? 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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